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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
몇 년 전, 모 유기농 브랜드의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화장품 원료를 추출하는 재배지와 자연친화적인 공장을 견학하고 나자 피부에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유기농 화장품만 쓰겠다’는 다짐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그 결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한 달쯤 후에 같은 나라로 더마 코스메틱 출장을 다녀왔는데 화두는 천연, 유기농 화장품의 내추럴 성분이 피부에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으며 자극을 줄 수도 있다는 것. 오히려 안정성과 효능이 입증된 더마 제품들이 피부에 이로울 수 있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렇게 나는 유기농 화장품과 이별을 고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도 나처럼 ‘유기농 화장품은 순하니까’ 사용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유기농 화장품의 가치는 다른 데 있다고 말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유기농업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유기농업이란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물을 이용하는 농업방식으로 생태계의 균형을 지키면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환경친화적 농법이다. 유기농업의 원칙은 건강, 생태 보존, 공정성, 돌봄과 배려다. 그리고 이렇게 수확한 원료로 만든 화장품이 유기농 화장품이다. 지속가능한 지구의 생태 복원과 유지, 더 나아가 인류의 건강을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유기농 화장품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유기농 제품에 실리콘, 파라벤, PEG 등을 금지하는 것도 생태적으로 분해되지 않고 생태계를 교란하기 때문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피부에도 해롭지만 말이다.(물론 해롭지 않은 성분 중 금지하는 것도 있다.) 일반 화장품이 제형과 효능 등에 초점을 맞춘다면 유기농 화장품은 지구에 해가 되는 합성물을 지양하고 에너지를 절약하며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공정 과정을 중시한다. 현재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유기농 화장품 산업에 ‘제로 웨이스트’와 ‘플라스틱-프리’, ‘비건주의’가 핵심 트렌드로 자리한 건 당연한 이치다.
제로 웨이스트는 폐기물 제로, 즉 포장을 줄이거나 재활용이 가능한 재료를 사용해 쓰레기를 줄이는 움직임이다. 유리나 목재 또는 소위 ‘그린 플라스틱’(그린 폴리에틸렌은 식물성 폐기물이나 재생가능한 식물성 재료로 제조한다.)이라고 불리는 지속가능하고 재생가능한 용기에 제품을 포장한다. 비건주의도 유기농 브랜드로부터 출발했다. 유기농의 원칙 중 하나인 공정성의 원칙,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공정하다는 철학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동물 실험을 반대한다. 물론 비건 제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유기농 화장품은 아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겠지만 천연 화장품과 유기농 화장품 역시 같지 않다.
간단히 그 개념을 살펴보자면, 유기농 화장품은 유기농으로 인증받은 농산물로 얻어진 화장품. 천연 화장품은 천연 원료를 비화학적으로 추출해 제작하는 화장품이며 비건 화장품은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동물 실험을 하지 않으며 GMO(유전자 변형)을 하지 않는다 등의 조건을 충족하는 제품을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천연, 유기농 화장품에 대한 완벽한 기준은 없다. 이러한 배경으로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큰 다섯 개의 인증기관, BDIH(독일), Cosmebio, Ecocert(프랑스), Soil Association(영국), ICEA(이탈리아)가 모여 유기농 인증의 범유럽 표준화를 위해 국제인증기관 코스모스(COSMOS)를 설립했다. 코스모스 인증 마크는 미국의 USDA와 EWG, 유럽 밖에서 통용되고 있는 ‘그린’, ‘에코’ 마크보다도 더욱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가장 깐깐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과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대세로 떠오른 EWG 인증이 더 이상 유럽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에요. 아시아의 많은 소비자들에겐 매력적인 구매 기준이지만, 유럽의 유기농 화장품 회사들에겐 무시해도 될 정도로 하찮게 여겨지죠.” 뷰티 무역 저널리스트 안네마리 크루제의 설명. 이런 이유로 코스모스는 많은 나라의 스탠더드 기준으로 꼽힌다.
코스모스 기준, 유기농, 천연 화장품의 정의를 대략 요약하자면 이렇다.
유기농 화장품은 전체 원료 중 20%(클렌저와 같이 닦아내는 화장품은 10%)의 유기농 함량을 포함, 물리적으로 가공된 농산물 원료(PPAL)는 95%가 유기농이어야 한다. 천연 화장품은 유기농 함량에 대한 기준은 없으며 코스모스에서 허용한 천연 원료만을 사용해 제조해야 한다. 석유 화학 유래 원료는 완제품의 2%를 초과해선 안 된다.
참고로 2018년 9월 1일 업데이트된 버전 3.0에선 팜에서 파생된 원료 중 CSPO, PSPO을 받는다면 사용가능하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천연, 유기농 화장품 인증기관을 지정하고, 기준에 관한 규정 일부를 개정 고시했다. 전 세계 스탠더드 기준과 달라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유기농 화장품은 유기농 함량 10% 이상, 유기농 함량을 포함한 천연 함량이 95% 이상. 천연 화장품은 천연 함량이 95% 이상) 천연, 유기농 화장품을 법적 근거로 감독 관리하는 건 전 세계 최초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