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하고 도발적인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바바라 크루거는 1980년대에 등장해 특유의 대담하고 도발적인 예술로 세상에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 현상에 대해 도전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 아티스트,전시,전시회,미술,예술

STATEMENTofINTENT불만은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만 외에는요(No complaints, except for the world).”바바라 크루거가 아닌 어떤 사람이 이런 짧은 문장 안에 많은 의미를 내포시킬 수 있을까? 뉴욕에 있는 그녀와 통화했을 때에도 그녀의 모든 말은 작품처럼 간결하고 함축적이었다. 바바라 크루거는 말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만약 크루거의 이름을 모른다 해도 그녀의 작품은 분명히 알 것이다. 흑백 사진과 함께 빨간 직사각형 배경에 하얀 푸투라 또는 헬베티카 서체로 쓰인 문구 말이다. 이를 모방한 수많은 표절이 양산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그녀의 경구는 대중의 영역에 스며들어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다. 버스에 새겨졌든 광고판에 붙었든 이 경구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민으로서의 의식을 되돌아보도록 자극함으로써 광범위한 제도적 변화를 유도한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방식, 이와 관련한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흠모와 경멸, 상처와 사랑에 관해서요.” 크루거가 말한다. 학사 학위도, 정식 예술 교육도 없이 미술계에 발을 들인 여성에게는 도전적인 프로젝트였다. 크루거는 파슨스 디자인 학교를 한 학기 다닌 후 학위를 포기하고 1960년대 후반 콘데 나스트의 매거진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녀는 돌이켜보니 이 일자리를 얻은 것이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 당시엔 콘데 나스트와 허스트 사가 여성이 일다운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남자 상사에게 커피를 타주는 일 말고 진짜 일이요.”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물질주의 사회를 지지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많은 고객들이 추구하는 완벽함에 맞출 자신이 없었어요.” 그녀는 그래픽디자인을 그만두고, 예술작품(초기에 만든 것은 여러 재료를 엮어 만든 벽걸이 장식품이었다)을 만들고 건축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은 그녀가 모던 콜라주 양식을 도입하고 적용하는 실험적인 기간이었다. 초기 작품은 대부분 그녀가 일했던 잡지사에 대한 환멸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도발적인 슬로건을 주요 이미지와 배치함으로써 그녀는 매스미디어에 통용되고 있던 문장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는 역설적인 문장이 1987년 그녀의 실크 스크린 인쇄 작품에 등장한다. 상업성과 철학을 섞어 현대사회가 소비주의라는 거짓된 신을 숭배하는 것을 강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전시 전경, 스프루스 마거스, 베를린, 2010. "/> 전시 전경, 스프루스 마거스, 베를린, 2010. "/>이런 직설적인 화법이 크루거의 주요 방식이다.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녀의 최근 작품들은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을 포함해 다양한 작가를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영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린다. “영감이라는 말은 저 같은 사람에겐 너무 화려한 단어예요.” “저는 보통 일상의 것들이 우리의 경험에 어떻게 녹아드는지를 연구해요.” 이런 이유로, 초반 작품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곳보다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것이 더 어울려 보였다. “개인적인 미술 연습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어요. 제가 아는 건 잡지를 만들고 TV를 보고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제 작품이 이런 대중적인 장소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그녀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만들었던 광고판, 벽화와 커버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 이는 또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최대한 가시적으로 공격을 가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1989년, 이제는 그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워싱턴 여성행진(Women’s March)의 포스터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는 여성의 얼굴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효과를 주었는데, 이는 낙태 합법화를 추진하는 시위자들의 상징이 되었다. 트럼프 정권과 낙태 합법화를 반대하는 단체 아래서 이러한 포스터를 똑바로 쳐다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크루거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시기에 깊은 울림을 보내며, 우리가 당시보다 못한 삶을 살도록 만드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좋았던 시절이란 없어요. 여성이나 유색 인종에겐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이 똑같아요. 좋았던 시절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당시가 정말로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아서 그러한 상황을 겪고 바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가진 개혁의 힘에 대해서 겸손하다. “예전에 사람들은 제 작품을 보고 체제전복적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칭 변화에 저항하는 자들의 허영심이 결국 사회적 보수주의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신이 옳은 생각을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보면 맥이 빠져요. 세상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그들의 양심보다 훨씬 크고, 야심 있고 지적인 그들의 말보다도 훨씬 커요.” 트럼프에게 승리를 내준 민주당의 ‘부실한 선거운동’을 언급하며 그녀는 말했다. “생각과 언어를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수단으로 쓰지 못한다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크루거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있어 전문가다. 그녀는 도시의 교통망을 이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2012년 L.A에서는 12대의 시내버스를 이용해 지역 학교에서의 미술 교육을 장려했다. 작년에 뉴욕에서 열린 퍼포먼스 비엔날레 ‘퍼포마 17’과의 협업에서는 5만 개의 뉴욕 지하철 카드에 ‘누가 침묵하는가? 누가 말을 하는가?(Who is silent? Who speaks?)’와 같은 질문을 넣어 배부하기도 했다. 그 비엔날레에서 바바라 크루거는 처음으로 퍼포먼스 무대도 연출했다. ‘무제(The Drop)’라고 이름 지은 퍼포먼스에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푸투라 서체가 새겨진 제품을 반짝 세일하는 이벤트도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소호 가게 밖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로고 디자인에 있어 크루거에게 적잖은 빚을 진 슈프림의 광적인 ‘드롭(발매)’이 이루어지는 매장 앞 광경을 떠올리게 했다. 전시 전경, 2016. A High Line Commission, on view March 2016 – March 2017."/>여느 아티스트라면 이런 식의 저작권 위반에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겠지만, 크루거의 견해는 달랐다. “뭐 어때요! 이런 논란에도 휘말리다니 놀랍지 않나요? 저에겐 평범한 일이 아니에요.”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의 유명세에 불안을 느낀 걸까? 아니면 감사하게 생각해서인가? “둘 다이기도 하고, 그 중간이기도 해요.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전체 시스템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보여주는 예예요. 누가 주목받고 누가 주목받지 못하고, 누가 유명하고 누가 유명하지 않으며, 누구는 정당한 이름을 얻고 누구는 잊혀지고…. 저는 인용하지 않는 한 ‘위대한’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요.” 이 말 속에 지혜와 겸손함,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바바라 크루거의 위대함이 있다.※ 바바라 크루거의 아시아 첫 개인전 가 서울 용산의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에서 6월 27일부터 12월 29일까지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