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백남준이라는 예술가, 삼촌, 한 인간을 기억하기

백남준 작품의 모든 저작권을 관장하는 조카 하쿠타 켄을 만났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6.05.05

MY CRAZY UNCLE, NAM JUNE PAIK


엉뚱한 삼촌 백남준의 조카이자, 플럭서스 그룹의 최연소 목격자 혹은 세계적 작가의 유산 관리자. 2006년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이후 모든 결정을 책임지는 백남준 스튜디오 이사 하쿠타 켄이 백남준 서거 20주기에 한국을 찾았다. 그간 한국 미술계와 크고 작은 불화를 빚어온 켄은 이제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세대는 교체되었고, 백남준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백남준: Rewind /Repeat» 전시 전경, © Nam June Paik Estate Photo: Jeon Byung Cheol Courtesy Gagosian

«백남준: Rewind /Repeat» 전시 전경, © Nam June Paik Estate Photo: Jeon Byung Cheol Courtesy Gagosian

하퍼스 바자 그동안 한국 미술계에 서운한 점이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 «백남준: Rewind / Repeat»는 백남준이 태어난 서울에서 25년 만에 처음으로 작가 에스테이트와 협력하여 열리는 전시이고, 어제 오프닝에는 실로 많은 기관 관계자가 참석했습니다. 그동안의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나요?

하쿠타 켄 한국 기관들과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들과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는 쪽에 가까워요. 그쪽에서 원하는 게 있고, 제가 제안하는 게 있는데 그 과정에서 오해가 자주 생겼죠. ‘예’와 ‘아니요’조차도 서로 다르게 이해되는 경우가 있었어요. 가끔 한국 기관들이 “백남준 에스테이트와 일하기 어렵다”고 말하는데,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그분들은 저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어요. 저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고 그냥 계속 제 일을 할 뿐이었죠. 실제로 많은 정치인들이 와서 사진을 찍고 ‘이걸 하자, 저걸 하자’고 말은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세대가 바뀌었어요. 그전엔 대부분 나이 든 기업인, 정치인이었다면, 지금은 젊고, 똑똑하고, 여성들이 많아요.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를 받았는데 아마 오늘 오후에 가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2032년 백남준 탄생 100주년에 맞춘 전시를 계획하고 있어요.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라면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전시 제목에 ‘되감기’와 ‘되풀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백남준에게 되감기/되풀이란 단순한 영상 조작이 아니라 삶이란 비가역적 시간, 이른바 베르그송적 시간에 맞서 예술이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시간 경험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요.

하쿠타 켄 저는 이 제목이 ‘되감기’라는 개념처럼, 백남준이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정치인이 아니라 가고시안 갤러리와 함께죠.(웃음) 백남준은 이런 식으로 (카세트테이프 모양의 낙서를 끄적이며)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사람들이 뭔지 물으면 카세트나 테이프 레코더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어요. 그리고 다시 물으면 “이게 내 인생이다”라고 했어요. 테이프는 그의 삶이고,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테이프가 돌아가다가 끝이 나면 죽는 거고, 그게 인생이라는 거죠. 하지만 가끔은 되감기가 가능하잖아요. 저는 백남준이 이미 2006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의 유해가 봉은사에 안치되어 있죠. 아마 뉴욕이나 뒤셀도르프보다 여기 있는 걸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코엑스몰도 있고요. 백남준은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봉은사에만 계속 있으면 지루했을 수도 있거든요. 아무튼 백남준은 한국에 있고, 지금 분명히 행복해하고 있을 거예요.


하퍼스 바자 그의 방대한 작업 중에 이 작품들이 선정된 기준이 궁금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아주 유명한 작품들과 아주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로 나뉘어진 듯도 보입니다. 이를테면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나 <골드 TV 부처> <베이클라이트 로봇>은 미술 문외한도 알아볼 만큼 유명하지만, 초기작인 <미디어 샌드위치>나 조각된 목재 회화 <오케스트라> 실물은 저조차 처음 봅니다.

하쿠타 켄 상대적으로 작은 전시라고 할 수 있지만, 핵심 작품을 중심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시를 만들고자 했어요. 지금 구성 그대로 뉴욕 모마나 테이트 모던 혹은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순회할 수도 있죠. <미디어 샌드위치>는 그의 초기 작업 가운데 하나로, 플럭서스 퍼포먼스 아티스트에서 비디오 아티스트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에요. 샬럿 무어먼의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도 매우 역사적인 작품이죠. <런던과 해외를 위하여(우편함)>는 전 세계에 세 점만 존재하는데 하나는 휘트니 미술관에, 또 하나는 런던 테이트 모던, 마지막 하나가 여기있죠. <오케스트라>같은 목재 조각 작업도 중요한데, 한국적인 맥락에서도 의미가 있어요. 백남준은 <오케스트라>를 ‘코리안 TV’라고 부르곤 했어요.

하퍼스 바자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하쿠타 켄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입니다. 뉴욕의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에서 제가 직접 그 작업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아마 열여섯 살 정도였을 거예요. 실제로 그 작품을 만져보기도 했고, 샬럿도 저에게 굉장히 잘 대해줬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더 특별하게 느껴져요. 삼촌은 몹시 화를 내기도 했어요. 제가 샬럿의 브라를 입혀주고 벗겨주는 일을 도왔다고 말이죠. 그 일로 두 사람은 크게 다투기도 했습니다.(웃음)


1990년 마이애미 해변가에서 촬영된 백남준의 사진 앞에서, 하쿠타 켄

1990년 마이애미 해변가에서 촬영된 백남준의 사진 앞에서, 하쿠타 켄

하퍼스 바자 <런던과 해외를 위하여(우편함)>에서 실시간의 JTBC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는 풍경이 흥미로웠어요.

하쿠타 켄 꼭 30년, 40년 전의 영상을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현재의 것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죠. ‘우편함’이라는 건 언제나 현재와 관련되어 있는 사물이고요. 예를 들어 <베이클라이트 로봇>도 그런 면에서 동시대적이죠. 지금 한국은 기술 분야에서 선두에 있는 나라인데, 사실 이 기술이라는 것은 논쟁적인 면이 있어요. 이제는 공장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로봇을 만들고, 심지어는 연인 같은 존재로까지 발전하고 있죠. 이런 시대의 로봇은 차갑고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술을 어떻게 인간적으로 만들 것인가, 가 화두가 되는 것이겠죠. 백남준의 로봇은 그런 면에서 따뜻하게 느껴져요. 개념은 새롭지만 디자인은 거의 1백 년 전의 것이죠.


하퍼스 바자 백남준은 얼리어댑터였지만 요즘 사람들은 백남준 하면 레트로한 브라운관 이미지 같은 걸 떠올리는 듯해요. 물론 백남준은 그런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죠. 작가는 생전에 작업의 콘셉트가 중요할 뿐 그것을 구성하는 미디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백남준의 작업을 그대로 보존하고 복원해야 한다며 그 권한과 권위는 작가뿐 아니라 향유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관련해 백남준 10주기 때 국립현대미술관 로비에 있는 <다다익선>의 모니터 교체를 놓고 1988년 제작 당시의 CRT 모니터로 할 것인지, 신제품인 LED 모니터로 할 것인지 논쟁이 치열했죠. 여기에 어떤 의견을 갖고 있나요?

하쿠타 켄 백남준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지향했어요. 과거와 단절하는, 가장 최신의 기술을 중요하게 여겼죠. 레이저디스크를 테이프로 바꾸었고 이후에는 디지털로 전환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2006년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많은 작품들이 일종의 ‘고정된 상태’가 되었어요. 사람들, 특히 미술관 관계자나 컬렉터들은 조각의 일부로서 작품이 처음 그대로 보존되기를 원하거든요. 어느 정도 이해는 가요. 오래된 TV 세트 자체가 이제는 트렌디해졌잖아요. 사람들은 그 레트로한 외형을 좋아하고 또 수집 가치가 있다고 여기니까요. 사실 기술을 갱신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래된 브라운관을 빼고 새로운 스크린을 구입해 그 안에 설치하면 됩니다.

하퍼스 바자 위대한 예술가가 법적 보호자이자 삼촌이었던 유년 시절 일화가 궁금합니다.

하쿠타 켄 웃긴 이야기가 많죠. 저는 그걸 “플럭서스 속에서 성장했다”고 표현해요. 존 케이지는 목소리가 굉장히 컸어요.(웃음) 집 안을 걸어 다니는 발소리도 아주 컸고요. 가끔 잠이 들려고 하면 존 케이지와 백남준의 대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도 여러 번 만났어요. 백남준과 아주 가까운 친구였거든요. 그들은 저에게 “사업가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진지하게 신용카드를 달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웃음) 우리는 대학에도 자주 공연을 하러 갔습니다. 저는 그런 시간이 좋았어요. 저는 대부분의 공연을 관객석에서 지켜봤죠. 공연이 끝나면 학생들이 저에게 와서 말을 걸곤 했습니다. 제가 그들을 도와 장비를 나르는 모습을 보고는 플럭서스 그룹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한 거죠. 그래서 저에게 온갖 질문을 해댔지만 사실 저는 답을 잘 몰랐습니다. 몰랐지만 아는 척을 했죠. 대부분 여학생들이었기 때문에 꽤 즐거웠던 것 같아요.(웃음) 12살 때는 오노 요코를 처음 만났어요. 삼촌과 오노 요코는 아주 가까운 친구였어요. 오노 요코는 백남준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일본의 샤먼적 퍼포먼스를 선보인 적도 있고요. 예전에 백남준의 작품을 하나 선물했는데 그 작품을 침실에 걸어 두었다며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셨죠.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백남준에게 ‘굿모닝’이라고 말해요.”


하퍼스 바자 젊은 시절 장난감 사업가로 성공했고 1980년대 미국의 어린이 TV 프로그램 <The Dr. Fad Show>의 ‘Dr. Fad’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아까 촬영 중에도 익살스러운 표정을 천연덕스럽게 짓더군요. 이런 면 또한 엉뚱한 삼촌에게 전수 받은 걸까요?

하쿠타 켄 백남준이 아니었다면 저는 훨씬 더 경직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백남준을 보면서 자랐고, 그 덕에 저도 더 자유롭게 창의성을 표현하게 됐죠. 오래 전,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의 대학에서 선보인 퍼포먼스가 떠오르는데, 백남준이 일본 퍼포머이자 플럭서스 멤버인 다케히사 코스기와 함께 무대에 올랐어요. 두 사람이 신문을 읽는데 10분, 15분 동안 계속되어 지루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갑자기 신문을 먹기 시작하는 거예요.(웃음) 두 사람은 신문을 씹다가 목에 걸린 듯 콜록대면서도 결국 한 장을 통째로 다 먹어버렸어요. 저는 그런 기상천외한 장면들을 직접 보고 자랐습니다. 그에 비하면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하퍼스 바자 뉴욕 백남준 스튜디오 이사 겸 법적 대리인으로 작품 관리와 기념사업 등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하쿠타 켄 저는 늘 무엇이 백남준에게 옳은지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백남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것이 유일한 판단 기준입니다.


하퍼스 바자 “작가 유산을 관리하는 일은 보람 없는 일이다” “열에 아홉은 정말 답답하고 짜증 나는 일들이고, 가끔씩 아주 기쁜 순간이 찾아온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그 가끔씩 찾아오는 ‘아주 기쁜 순간’에 대해 들려주세요.

하쿠타 켄 어젯밤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죠. 하지만 그건 아주 가끔이에요. 대부분은 문제가 생기죠. 예를 들어 저작권 문제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진행해 버리죠. 이게 바로 제가 한국에서 겪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예술가의 유산을 운영하는 일에는 매우 많은 비용이 드는데, 아무도 돈을 지불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스미스소니언 협회 같은 기관에서 아카이브를 구축할 때도, 직접 비용을 부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버드 대학교에 ‘백남준 큐레토리얼 펠로십’을 설립했습니다.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지만 실행에는 어려움이 따르죠. 펠로십만 해도 수백만 달러가 들어갑니다. 기금 형태라서 큰 돈을 제공하면 기관이 그것을 운용하면서 매년 그 수익을 사용하게 됩니다. 지금도 계속 거기에 추가로 기부하고 있어요. 이게 제가 예술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예요.(웃음)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작가 에스테이트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백남준의 중요한 작품들은 가능한 한 미술관에 맡기고 정리하려고요. 제 이후에는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일이니까요.


<베이클라이트 로봇> 옆에 앉아 있는 하쿠타 켄

<베이클라이트 로봇> 옆에 앉아 있는 하쿠타 켄

한국에서 백남준이 완전히 이해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솔직히 말해 그건 한국에서 백남준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백남준의 핵심적인 작품들을 직접 보면 비로소 그의 작업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유럽과 미국에 있습니다. 특히 그의 초기작이 그렇죠.


백남준, <Gold TV Buddha>, 2005, Closed-circuit video (color, silent), 27-inch monitor, video camera, tripod, cables, and permanent oil marker on gilded, bronze Buddha, 80x66x215.9cm.

백남준, <Gold TV Buddha>, 2005, Closed-circuit video (color, silent), 27-inch monitor, video camera, tripod, cables, and permanent oil marker on gilded, bronze Buddha, 80x66x215.9cm.

하퍼스 바자 선생님 연세도 이제 일흔넷입니다. 그럼 다음으로 백남준 에스테이트를 이어갈 사람이 없는 겁니까?

하쿠타 켄 솔직히 말하면, 에스테이트를 접고 싶습니다. 유명한 작가의 에스테이트라고 해서 모두 잘 운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수가 가족이 운영하는데, 그 가족들이 그다지 현명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요. 현명하지만 돈이 없는 경우도 있죠. 에스테이트 운영은 작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아주 강력한 비전이 필요한 일이에요. 나 자신이 아닌 작가를 돕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데, 쉽지 않죠. 재정적 여유도 충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작품을 팔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예술 분야에서 돈을 벌기란 쉽지 않잖아요?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해야 하고 프로젝트가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을 고용해야 합니다. 고용 비용, 기술 비용, 운반 비용 등 여러 가지 지출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녀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바쁘기도 하지만 그 아이들이 이 일에 돈을 쓰려고 들 것 같지도 않습니다. 가고시안은 3년에 한 번씩 유산 관리 심포지엄을 개최해왔고 지금까지 세 번 열렸습니다. 첫 번째 심포지엄은 뉴욕에서 열렸고, 저는 거기에 참석했죠. 유산 관련 심포지엄은 전반적으로 수준이 낮습니다. 별로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이것을 계속해야 한다’, ‘저것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을 할 뿐이에요. 물론 백남준은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가이기 때문에 에스테이트는 어떻게든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개 많은 작가들은 훌륭하고 유명하긴 해도 세계적인 수준은 아니죠. 냉정하게 말하면 그런 경우에는 에스테이트를 계속 운영할 이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막대한 돈을 들여 전시를 시도할 수는 있지만, 작품 자체가 뛰어나지 않다면 주요 미술관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미술관은 돈을 받을 수는 있지만 작품 자체는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그만두고 새로운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퍼스 바자 백남준은 여전히 한국에서 저평가 받고 있는 아티스트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의 특성 혹은 그가 단지 한국인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여기에 동의하는지요? 나비효과처럼 에스테이트와 한국 미술계의 불화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까요?

하쿠타 켄 에스테이트와의 갈등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한국에서 백남준이 완전히 이해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솔직히 말해 그건 한국에서 백남준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유럽,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백남준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보다 덜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백남준을 단지 유명한 사람 정도로만 알 뿐,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해외에서 먼저 유명해졌고, 그 이후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한국과 가까워졌는데 그때는 이미 해외에서 명성을 얻은 상태였죠. 백남준의 핵심적인 작품들을 직접 보면 비로소 그의 작업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백남준아트센터에 좋은 작품들이 있긴 한데 대부분의 중요 작품이 유럽과 미국에 있습니다. 특히 그의 초기작이 그렇죠. 저는 여러 미술관과 함께 일하고 있는데, 많은 기관들이 보존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어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그렇죠. 백남준은 그 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요. 한국에서도 그의 작업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퍼스 바자 ‘예술과 기술은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 백남준이 평생에 걸쳐 탐구해온 질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인터넷, 스마트폰, 유튜브의 출현을 예언하기도 했죠. 그가 오늘날의 풍경을 보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쿠타 켄 백남준이라면 이 다음에 무엇이 올지 생각했을 거예요. AI의 문제점을 짚어냈을 수도 있고요. 뭐가 됐든 아주 담담하게 말했을 겁니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에디터/ 손안나


※ «백남준: Rewind / Repeat»는 5월 16일까지 아모레퍼시픽 본사 APMA 캐비닛에서 열린다.


백남준, <Untitled>, 2005, detail, Two-channel video (color, silent), two vintage televisions, CRT monitor, artificial flowers, electric lights, and permanent oil, marker, 114.9x53.3x60.3cm.

백남준, <Untitled>, 2005, detail, Two-channel video (color, silent), two vintage televisions, CRT monitor, artificial flowers, electric lights, and permanent oil, marker, 114.9x53.3x60.3cm.


Credit

  • 사진/ 이태광(인물), 가고시안(작품)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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