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의 순수한 열정
“연기는 살아 있는 존재가 움직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정지된 사진에 찍힌 피사체와는 다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화보 촬영을 거의 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가요? 그냥 제가 화보랑 잘 안 어울리는 배우니까요. 화보에서는 멋있는 배우들을 찍어야죠. 저는 멋이 없는데, 오늘은 우리 두 배우가 너무 멋지게 나왔어요.
촬영을 준비하며 육식을 안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변호인>이나 <의형제> 같은 영화 속에서 돼지국밥이며 닭백숙을 후루룩 떠 먹던 장면이 생각나는데 육식은 언제부터 안 했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육식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체질적으로 맞질 않아서요. 고기를 조금씩은 먹는데 즐기진 않아요.
바로 전 작품이었던 <택시운전사>에서 연기한 캐릭터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소시민적 모습의 송강호였다면 <마약왕>의 송강호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의 광기 어린 에너지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영화 후반부의 모습은 관객 입장에서 못 보던 느낌이라 신선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초반부에는 초기 작품들, <살인의 추억>이나 <넘버3> 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역동적인 모습들이 나오니까 올드 팬들이 반가워할 수도 있고요. 그 이후로는 어찌하다 보니까 그런 캐릭터들을 많이 연기하지 못했어요.
선택하는 캐릭터들이 점점 더 묵직해지고 있는데 연기의 외연이 넓어지는 것이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헐렁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매 작품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나요? 나뿐 아니라 다른 배우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어떤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작품을 선택하진 않아요. 내가 어떤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해서 거기에 딱 맞는 작품이 들어오지도 않고요. 그때 그때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죠.
평소 대본을 받은 후 출연 여부에 대한 답을 빨리 주는 걸로 유명한데요.
<마약왕> 같은 경우에는 고민의 시간을 어느 정도 가졌나요? 빨리 결정했죠.
(웃음) 항상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두 시간이면 족하다고 말하곤 해요. 두 시간 동안 대본을 읽고, 삼십 분 동안은 고민을 해봐야 하니까 두 시간 삼십 분은 필요하겠네요. 빨리 답을 주는 게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내가 원체 성격이 급하고 매듭 짓지 않는 것을 싫어해요. 고민거리를 안고 며칠이 지나는 걸 참질 못해요. 그러니까 다른 배우보다 시나리오를 엄청나게 잘 본다는 게 아니라 성격적인 문제인 거죠. 어찌 됐든 가타부타 결정을 하고, 깨끗하게 매듭을 짓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출연 여부를 빠르게 결정하는 것처럼 오랜 연기 생활을 하면서 갖게 된 강박적인 습관이 있나요? 강박이라기보다는 어떤 작품을 책임져야 된다는 부담감이 있죠. 그게 뭐,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런데 그 부담감이 무게로 다가오니까 어떨 때는 벅차기도 하고, 힘겹기도 하죠. 그래도 어떻게든 슬기롭게 그 부담감을 이겨내는 게 배우의 숙명인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은 나이를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아요. 힘든 것은 똑같이 힘들어요. 작품을 오래하다 보면 쉬워지는 부분이 있을 줄 알았는데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더라고요.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이런 건 안 해봤겠지, 하는 소재주의적인 측면에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어떤 시점의 새로움을 갖고 싶어요.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해석할 때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번 작품을 촬영하며 가장 난해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아무래도 마약이라는 것이 경험해보지 못한 소재이다 보니까, 경험에서 비롯된 연기를 하지 못하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야 하는 부분이 가장 힘겨웠던 기억이 납니다. 마약 경험자들이 기술하고 증언한 자료집을 참고하기도 하고요.
평소 연기를 할 때 텍스트로 된 자료를 많이 참고하는 편인가요? 아닙니다. 사실 책은 책일 뿐이에요. 체화가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참조를 하긴 하지만 배우의 몸에서 받아들이고,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 거죠. 그래서 사실 저는 그냥 활짝 열어놔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활짝, 그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아요. 캐릭터에 다가가는 방식은 배우들마다 조금씩 다른데, 물론 송강호만이 가지고 있는 방식이 있어요.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지점인데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는 본능도 있고, 배우로서 쌓아온 경험도 있고, 작품에 대한 이해도 있을 거예요.
과거의 인터뷰에서 “노숙자를 연기하려면 외양을 흉내낼 게 아니라 옷을 깨끗이 입고 있어도 그를 노숙자이게 하는 요소를 포착해야 한다”고 말씀한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번에 이두삼을 연기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핵심은 무엇이었나요? 본질을 꿰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두삼이라는 인물은 사회악을 만드는 인물이지만 나름대로 굉장히 잘 살아보려고 했던 남자이기도 해요. 나름대로 진지하고 열심히 살았을 거란 말이죠. 그런 점에 집중을 했던 것 같아요.
<택시운전사>의 “손님을 두고 왔어.”처럼 <마약왕>의 결정적인 대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대사라기보다는 신이 생각나요. 가족과 마지막 통화를 하는 장면이 있는 데 그때 이두삼의 본모습이 나와요. 본인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도 있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있고. 이 사람도 인간이었구나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인 것 같아요.
<마약왕>의 배경이 되는 1970년대에 대한 향수가 있나요? 70년대에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지금 와서 돌아보면 ‘70년대가 이랬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그때 당시에는 그냥 일상을 살아갔으니까요. 다만 새마을운동을 하던 모습이나 경제 성장에 힘을 기울이던 사회 풍경들은 생각이 나요. <마약왕>의 우민호 감독은 그 시대를 살아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말했어요.
우민호 감독,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 함께 연기한 배우들에게 영감을 받은 부분이 있으셨나요? 우 감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호쾌’입니다. 그렇다고 마초는 아니고요.(웃음) 여리고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데 거침 없는 성격인 거죠. 그래서 작업도 시원시원하게 진행됐어요. 배두나 배우와 조정석 배우는 이번 작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워낙 친숙하고, 화보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할 때도 호흡히 너무 잘 맞아요. 이 두 배우랑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에요. 김소진 배우는 <더 킹>에서부터 두각을 보였지만 이제 진가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 같아요. 고전미도 있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서 배우로서 확장력이 넓은 친구예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혼자 생각해 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어딘가에서 배우 송강호 회고전을 기획하며 송강호가 어떤 배우인지 가늠할 수 있는 세 작품을 골라달라고 하면 어떤 작품을 고를 건가요? 글쎄, 그건 주최 측에서 고르지 않을까요?(웃음) 다 아픈 손가락이고 다 아끼는 작품들이라 제가 고르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동안 무수히 많은 모습들을 보아왔는데도 여전히 송강호의 다음 작품에는 호기심이 생겨요. 2019년에는 어떤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나요? <마약왕> 이외에 내년에 두 작품이 더 개봉을 해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5월 마지막주나 6월 첫째 주에 개봉을 할 것 같고, 지금 촬영 중인 <나랏말싸미>가 여름에 개봉할 것 같아요. 각자의 매력이 있는 작품들이에요. <기생충>은 촬영을 하면서도 역시 봉준호구나, 싶은 지점들이 분명히 있었어요.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니만큼 해외에서의 기대도 폭발적이라서 미국에서도 개봉을 해요.
배우 송강호가 가진 야심은 무엇인가요? 특별히 어떤 영화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기보다는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이런 건 안 해봤겠지, 하는 소재주의적인 측면에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어떤 시점의 새로움을 갖고 싶어요.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해석할 때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예요. 우리가 늘 봐왔던 현상일지라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