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파워!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2018년, 하이패션계를 물들인 블랙 파워에 대하여. | VIEW,패션,블랙,버질아블로

작년 2월 2017 F/W 런던 패션위크 기간에 열린 오프 화이트 파티에서 버질 아블로를 만났다. 전날까지 뉴욕에 있었던 그는 매치스패션과의 디너, 이곳 파티의 디제잉을 위해 런던으로 날아왔고 다음 날 밀라노로 떠날 참이었다. “저는 항상 ‘나는 서로 다른 두 곳에 있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곤 해요.” 2016년 11월, 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신이 패션계에서 가장 바쁜 남자 중 한 명이라 소개한 바 있다. 근래만 보아도 워비 파커, 이케아, 지미 추, 리바이스, 엄브로, 컨버스 등과 컬래버레이션 라인을 쉼 없이 발표하며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낸 그. 게다가 나이키와 협업한 ‘더 텐(The Ten)’ 컬렉션은 소위 대박이 났고, 오프 화이트는 열광적인 마니아 층을 등에 업고 빅 브랜드로 성장 중이다. 그런 그가 킴 존스(루이 비통 남성복에 스트리트 감성을 수혈한 장본인이다)의 후임으로 낙점된 것은 약간의 의외성(예상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니까)을 띤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버질에게 붙는 ‘160여 년의 루이 비통 역사상 첫 흑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수식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치 “피부색으로 재능을 평가하는 시대는 이제 완전히 끝났어”라고 하는 것처럼. 어쨌든 사회 초년생 시절 절친 칸예 웨스트와 함께 펜디에서 월급 500불을 받으며 인턴을 했던 버질 아블로는 이제 펜디가 속한 LVMH 왕국,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2018 S/S 뉴욕 패션위크에서 헬무트 랭을 완벽하게 리부트시킨 셰인 올리버 역시 최근 패션계의 블랙 파워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다. 그러나 그가 1990년대 패션에 지대한 영향을 준 전설적인 패션 하우스를 맡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것도 사실. 결과적으로 자신의 레이블인 후드 바이 에어까지 중단하고 몰두한 데뷔 쇼는 성공적이었다. 헬무트 랭의 DNA와 자신이 가진 전위적인 무드를 적절하게 배합한, 그의 표현을 빌려 ‘랭을 완벽하게 오마주한’ 컬렉션으로 평가받았으며, 밀레니얼 세대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법한 피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1990년대 헬무트와 비슷한 미학을 가진 사람을 찾는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차라리 탐험을 하고 이 브랜드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 그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죠.” 컬렉션의 디렉팅을 맡은 영국 의 편집장 이자벨라 벌리가 전했다.한편 모델 업계에서도 2018년 6월 현재, 모델스닷컴 랭킹 ‘핫 리스트’와 ‘톱 모델 50’의 40% 정도 지분을 흑인 모델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 1990년대 거의 원 톱 흑인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나오미 캠벨, 2000년대에도 티아라 뱅크스, 리아 케베데, 조앤 스몰스 등과 같은 훌륭한 흑인 모델들이 등장했지만, 요즘처럼 다양한 흑인 모델들이 한꺼번에 패션계 중심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2017년 ‘올해의 모델’에 빛나는 가나 출신 영국 모델인 애드와 아보아가 있다. 그녀가 커버 걸로 등장한 2017년 12월호 영국 는 1987년 나오미 캠벨 이후 무려 30년 만에 흑인 모델이 커버에 등장한 것으로, 이 또한 101년 역사상 첫 흑인 남성 편집장으로 발탁된 에드워드 에닌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드와 아보아 외에도 칸예 웨스트의 브랜드 이지(Yeezy)의 모델로 패션계에 처음 발을 들인 후 2017년 가장 주목받는 신인 모델로 성장한 슬릭 우즈(Slick Woods), 5월호를 통해 공개된 카린 로이펠트의 ‘Art of Beauty’ 화보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 남수단 출신의 샤넬 니아시아스(Shanelle Nyasiase), 같은 남수단 출신인 아두트 아케치(Adut Akech) 역시 이탈리아 의 4월호 커버를 장식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패션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셀러브리티들은 가장 강력한 블랙 파워 군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칸예 웨스트, 리아나는 명실상부 21세기를 대표하는 패션계 아이콘이며, 각자 이지, 펜티×푸마(Fenty×Puma) 라벨을 운용하는 패션 디자이너기도 하다. 그들의 뒤를 잇는 에이셉 라키는 작년 모델스닷컴이 선정한 ‘최고의 셀러브리티 남자 모델’ 부분을 수상했고, 매끈한 수트 차림으로 디올 옴므 S/S 캠페인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크리에이티브 그룹 AWGE를 이끌며 다양한 패션 브랜드들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한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아이디어가 많을 뿐이죠.” 에이셉 라키의 스왜그 넘치는 인터뷰 기사들을 읽다 보면 왜 그가 칸예 웨스트를 잇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스트리트 브랜드를 이끌던 흑인 디자이너가 거대 패션 하우스의 수장이 되고, 흑인 모델이 주요 패션 매거진의 커버 걸로, 또 브랜드의 캠페인 걸로 활약하며, 흑인 패션 아이콘들의 패션 스타일에 열광하는 일련의 트렌드는 사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이패션계에 깊숙이 침투해버린 스트리트 문화와 감성, 유스 컬처, 힙합 뮤직의 인기,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성숙한 의식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시대라는 것. 애써 인종차별이나 인간평등과 같은 무거운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브 생 로랑이 유색 인종 여성들을 기용한 첫 번째 하우스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죠. 저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채는 게 기뻐요.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러진 않습니다. 그냥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죠.” 자신의 생 로랑 데뷔 쇼부터 다양한 흑인 모델들을 기용해온 안토니 바카렐로. 그의 태도야말로 지금 우리가 이 현상을 바라보는 데 필요한 가장 쿨한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