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디지털의 경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우리를 둘러싼 패션이 첨단기술과 만나면서 꽤 많은 부분이 변하고 있다. 처음에는 신기할 뿐이지만, 서서히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든다. 소셜미디어 방송과 드론부터 증강현실과 가상현실까지, 패션에 미치는 영향 역시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 디지털,버질 아블로,24 세브르,스티치 픽스,퓨처크래프트 4D

이글을 쓰기 바로 며칠 전 개그맨 유병재와 페이스북 라이브를 진행했다. 버질 아블로가 만들어 세계적으로 흥행한 나이키 ‘더 텐(The Ten)’의 컨버스 척 70 발매 추첨 행사였다. 그는 유튜브 채널에 콩트를 올리는데, 추첨 행사는 이 개념의 연장이었다.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으로 사전 응모자를 추첨하고, 실시간으로 퀴즈를 내며 신발을 증정했다. 참여 분량을 마친 후 크로마키 배경 무대 뒤에서 스태프의 아이폰으로 함께 방송을 보며 2018년의 방송이란 이렇게 쉬워졌다고, 문득 실감했다. 10년 전이었다면 이름 모를 거대한 전문 기기가 한 트럭 있어야지 ‘방송 송출’ 비슷한 것이라도 가능했다. 지금 필요한 장비는 매일 쓰는 스마트폰과 비디오카메라가 전부다. 사실상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과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던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세상이다.버질 아블로는 패션이 기술과 만나면서 나아갈 방향을 가장 흥미롭게 증명한 인물이다. 그는 2017년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 공개 강연에서 이케아와 나이키, 건축가 렘 콜하스, 그리고 공개하지 않았던 오프 화이트의 여러 작업을 소개하며 ‘아이폰’을 자신이 좋아하는 작업 도구라고 말했다. “유일하게 대화와 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죠.” 2017년과 2018년, 열광적인 스니커즈 팬덤의 지지를 얻은 ‘더 텐’ 컬렉션의 모든 초기 아이디어 제안과 수정 작업은 오직 아이폰 노트와 사진 앱, 그리고 메신저 와츠앱 안에서 이뤄졌다.패션쇼를 지휘하는 패션 하우스와 디자이너들도 기술 발전 안에 있다. 전통적으로 컬렉션 무대는 고급 기성복 브랜드, 즉 하이패션이 고객에게 미래를 제안하는 통로였다. 전통적인 패션 하우스부터 젊고 에너지 넘치는 신진 패션 디자이너에게 기술은 수십 년간 변하지 않았던 런웨이 컬렉션을 변주하는 실험의 촉매가 된다. 가장 단순하게, 우리는 스마트폰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패션쇼를 감상한다.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소수의 기자와 바이어를 초대해 2018 F/W 런웨이 컬렉션을 연 고샤 루브친스키는 나우패션(Nowfashion.com)에 실시간 런웨이 무대를 올렸다. 지난 3월 헤라 서울 패션 위크에서는 네이버 V 앱으로 모든 컬렉션을 볼 수 있었다. H&M은 제레미 스콧의 모스키노 협업 소식을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알렸고, 2018년 F/W 시즌, 돌체 앤 가바나는 공중을 부유하는 드론이 들고 나온 가방 시리즈를 선보였다. 화려한 문장과 보석으로 치장한 가죽 가방을 든 정밀하고 작은 전자기기가 피가 흐르는 인간을 대신하여 ‘캣워크’를 점령한 순간이었다.기술은 런웨이 무대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패션 소비에도 영향을 끼친다. 루이 비통 모에헤네시 그룹은 지난 2017년 7월, 파리 한복판에 있는 세계 최초의 백화점 르 봉 마르셰와 합작한 새로운 전자상거래 플랫폼 ‘24 세브르(24 Sèvres)를 선보였다. 24 세브르는 웹사이트와 iOS 앱으로 퍼스널 쇼퍼와 업계 최초 1:1 비디오 상담을 제공한다. 좀 더 사적인 온라인 쇼핑을 위한 페이스북 메신저 채팅 상담 서비스, 스타일 봇(Style Bot)도 출시했다. LVMH 최고 디지털 책임자 이언 로저스(Ian Rogers)는 “메종이 오랫동안 매장에서 습득한 비주얼 머천다이징 전문 지식을 온라인으로 전환할 때”라고 했다.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쇼핑 플랫폼도 흥미롭다. 2011년 설립 이래, 인공지능 기계 학습 과 맞춤형 개인 스타일리스트를 결합한 쇼핑을 제공한 스티치 픽스(Stitch Fix)는 패션에 관심은 있으나 쇼핑에 큰 관심이 없는 절대 다수를 겨냥한다. 고객 각자의 치수와 좋아하는 색상, 라이프스타일, 여가를 즐기는 방법과 이미지 검색에 특화한 소셜미디어 핀터레스트 의 개인 정보 제공 동의를 받는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자체 알고리즘으로 분류하고, 기계 학습을 거쳐 더 세밀하게 나눈다. 3천 명에 달하는 개인 스타일리스트는 각자 맡은 회원의 취향을 예측하여 다섯 벌의 옷을 추천한다. 이 모든 서비스를 받는 데 드는 비용은 20달러로, 유료 고객 80%가 첫 구매 이후 90일 안에 새로운 패션 아이템을 사기 위해 스티치 픽스를 이용했다.4차 산업기술 발전에 개인화된 생산 기법을 결합한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아디다스와 3D 디지털 제조 개발기업 카본(Carbon)이 함께 제작한 ‘퓨처크래프트 4D’는 스니커즈의 대량생산과 개인화라는 난제에 도전한다. 세계 최초로 빛과 산소로 만들어진 미드솔을 사용한 고기능성 운동화인 퓨처크래프트 4D의 핵심은 운동을 위한 기술과 생산을 위한 제조 두 가지 측면의 혁신이다. 아디다스의 협력 아래, 카본은 스피드셀(SpeedCell)이라는 생산 공정을 구축했다. 일반적인 3D 프린터 공정은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한 디자인이 가능하지만 물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시제품을 만드는 용도로만 사용됐다. 하지만 스피드셀은 규모나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완제품이 나오기 전 제품의 자동 세척 기능까지 자동화해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획기적인 기술이다. 패션 업계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과시하고자 기술을 수용한 것은 아니다. 미래를 위한 돌파구라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미국 최대 기성복 브랜드 중 하나인 갭은 최근 주춤한 성장률 탈피를 위해 증강현실을 끌어들였다. AR 앱 ‘드레싱룸 바이 갭’에서 사람들은 다섯 가지 체형 중 하나를 고르고, 가상현실 마네킹에 옷을 입힐 수 있다.이처럼 기술 발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빠르게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다가온다. 인텔의 전략 관계 부사장 산드라 로페즈(Sandra E. Lopez)는 패션과 기술의 만남을 “소통의 일부이며, 패션 생태계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향후 몇 년 안에 가상현실 VR 기기가 대중의 필수품이 되면, 스마트폰과 PC 모니터로 온라인 쇼핑을 하는 대신 실제 매장과 유사한 환경에서 옷을 입고, 사이즈를 가늠하며, 더 만족감을 주는 쇼핑의 세계가 열릴 수도 있다. 생경한 기술이 패션과 만나고 점점 진화하면서, 문자 그대로 ‘의식주’를 영영 바꿔놓을 수도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