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포스터를 탄생시킨 디자이너 김혜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아가씨'까지 주요 한국 영화들의 포스터를 제작해온 ‘꽃피는 봄이 오면’의 대표 김혜진이 다루는 콘텐츠는 이제 삶의 영역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일과 삶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서, 더 오랫동안 재미있게 일하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고민 중인 그녀의 아름다운 일터를 방문했다. | 아가씨,김혜진

영화 포스터에 별다른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꽃피는 봄이 오면’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배우 최민식이 출연했던 영화 은 사실 한국 영화산업의 한복판에서 24년째 자리를 지키며 무수히 많은 영화 포스터를 제작해온 디자인 회사 ‘꽃피는 봄이 오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꽃봄’의 대표이자 그래픽 디자이너 김혜진은 이현승 감독의 추천으로 포스터를 제작한 것을 계기로 영화판에 뛰어들어 등 굵직굵직한 한국 영화의 비주얼 작업을 이끌어온 ‘선수’다. 그녀가 제작한 포스터들만 봐도 한국 영화의 흐름을 얼추 읽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꽃봄’ 사무실이 내가 다니는 사무실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그 사무실이 점심 시간에 마실 가고 싶을 만큼 근사한 장소라는 것도 말이다. 테마별로 분류된 책들이 도서관처럼 라벨링되어 있고(다 읽지 않은 책은 서가에 꽂지 않고 바닥에 쌓아둔다고 한다), 조화로운 디자인 가구들과 큰 창이 그림처럼 배치되어 있는 김혜진 대표의 방에 들어서며 아름다운 사무실이라고 감탄하자 그녀는 “이 방에 해가 제일 잘 드는 시간은 해 뜰 때예요. 밤을 새서 야근을 하다가 눈이 부셔서 이 방이 동향이라는 걸 깨달았어요.”라고 웃으면서 말한다.야근이 많은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꽃봄’이 자리 잡고 성장하기까지의 24년 동안 한국 영화 생태계는 많이 변했다. 개봉 시기와 경쟁작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긴 시간을 들여 티저 작업부터 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아주 센 영화 말고는 한 달 반, 두 달 전에야 개봉일이 정해지는 통에 몰아쳐서 작업을 해야 한다.또한 과거에는 극장 앞에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걸 보고 나서야 흥행 여부를 짐작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각종 데이터로 흥행을 예측할 수 있어서 시사일이 늦게 잡히는 영화는 이미 ‘버린 카드’라는 소문이 돌 정도다. 물론 ‘황’ 된다는 미신으로 포스터에 옐로 컬러를 사용하지 못했던 관행이 우스꽝스러운 과거가 되는 긍정적인 변화도 없진 않지만 말이다.“이제는 저희 회사도 규모도 커지고 시스템화 됐죠. 개인적으로는 이런 변화가 좋지만은 않아요. 좀 덜 재미있는 것 같아요. 대기업 자본으로 움직이는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소수의 사람이 판단을 해서 만들었죠. 하나하나 만들어가서 애착도 크고요. 물론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식한 거 아니냐, 그렇게 큰돈이 들어간 영화인데 소수의 사람들이 판단하는 게 맞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리서치가 개입될수록 영화는 노멀해지죠. 비주얼 작업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광고에 가까워 지다 보니까 좀 더 뾰족하게 하기는 쉽지 않은 시장이 됐어요. 그래서 다른 일들을 벌이면서 자극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꽃피는 봄이 오면’이 넷플릭스의 한국 콘텐츠 제작을 함께 하게 됐는데, 한국과는 다른 시스템으로 일하니까 새롭더라고요.”덩치가 커진 디자인 회사와 캘리그래피 카드 브랜드 K-Paper, 그리고 복합문화공간 모스 가든의 대표이기도 한 김혜진이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CEO’가 아닌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이유는 역시나 콘텐츠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그녀의 방에 있는 의 메이킹북을 뒤적이다 강박적으로 완벽한 미장센을 설계하는 박찬욱 감독과 비주얼 작업을 같이 하는 건 너무나 고된 일일 것 같다고 떠보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한 석 달을 와 관련된 작업을 하면서 보냈던 것 같아요. 근데 재미있었어요. 이제는 몰아붙이면서 하는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미학적으로 최상의 퀄리티를 내기 위해 몰아붙이는 시간들이 귀하죠. 적당히, 가 아니라 끝을 보자, 니까.(웃음)”영화 포스터는 영화 내용을 단 한 장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밀도 높은 콘텐츠다. 영화 마케팅의 시작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화 감상의 종착지이기도 하다.(얼마 전에도 짐 자무시의 을 보고 나오던 나의 동행인은 “저 포스터를 떼서 집에 가져 가고 싶다”고 말했다.)“처음에는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이 포스터를 보고 그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든다는 마케팅적인 목적이 강했어요. 근데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니 그게 좀 모자란 생각이지 않나 싶었어요. 포스터는 그 영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역할도 해야 하지만, 영화롤 보고 나온 관객에게도 설득력이 있어야 되는 거 같아요. 영화를 보고 나와서 그 포스터를 보고 기분이 더욱 좋아지는 경험들을 할 수 있도록요.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이 영화를 압축해서 설명해주지는 않잖아요. 의 포스터 비주얼도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은 아니었죠. 어쨌든 우리는 한 장의 이미지로 보여줘야 하니까, 영화에서 반복되는 ‘대칭’을 포스터에서 상징적으로 구현하려 했죠. 근데 누가 집에 포스터를 붙여놨다고 그래서 되게 취향 독특하네, 했어요.(웃음) 저는 는 좋아하지만 집에 그 포스터를 붙이고 싶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영화를 보고 나면 흥행 성적을 대략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은 오랜 커리어로 인해 얻은 ‘덤’이다.“이 개봉할 무렵에 센 영화가 두 편이나 있었어요. 와 . 그래도 저는 이 잘될 줄 알았어요. 다른 두 편이 너무 헤비하니까요. 물론 언제나 다 맞지는 않지만 ‘감’이 생긴 것 같긴 해요. 시사를 보고 나서 이거 천만 관객이 넘을 것 같다고 했었거든요. 당시에만 해도 메시지가 있지 않으면 천만 관객이 안 들었지만, 이건 너무 잘 만든 거예요. 그리고 을 칸에서 봤는 데 너무 재밌어서 천만 관객이 넘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누군가가 좀비 영화는 천만 관객이 안 든다고 해서 ‘좀비물 아니야, 괴물이지’라고 했죠. 최근에는 의 강형철 감독의 신작 를 재밌게 봤어요. 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배우들은 많이 안 나오지만, 그래도 한 8백만 관객은 들지 않을까 싶어요.”이상적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사무실의 바닥에 포대기를 깔고 아이를 눕혀 놓은 김혜진 대표의 사진이 SNS상에서 ‘일하는 여성’의 단면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회자된 적이 있다.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후에는 일이 예전보다 쉬워지는 측면이 있냐고 묻자, 그녀는 답했다.“저는 괴로워하면서 일하는 걸 즐기는 스타일이에요. 일하다 보면 집에 아이가 있는 것도 잊어요. 집중도를 높이지 않으면 일을 많이, 빨리 할 수 없으니까요. 여전히 일은 힘들죠. 공이 들어가고 노력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힘이 안 들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냥 일을 하는 걸 넘어서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싶은 시점이 있더라고요. 모스 가든은 일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시작한 프로젝트예요.”김혜진 대표와 영화 를 계기로 인연을 맺은 스타일리스트 출신 기획자 서은영이 합심해서 만든 복합문화공간 모스 가든은 레스토랑이자 갤러리이고,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며, 산지에서 직송한 농산물과 아름다운 꽃을 구입할 수 있는 복합적인 공간이다.이 공간은 역시나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데, 갑작스레 펑펑 내리는 눈을 피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던 날 통창으로 눈을 바라보며 ‘제주 성이시돌 목장에서 직송한’ 따뜻한 우유를 마시다 도대체 이곳의 정체는 뭘까 궁금해졌었다.“이방인들끼리 모여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들어서 나누는 공간을 계획했는데, 하다 보니 일이 커졌어요. 비주얼 작업으로 원재료를 돋보이게 한다거나, 스토리를 풀어서 콘텐츠를 이해시키는 것이 저희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니, 스토리텔링을 통해 좋은 식재료를 만드는 농부들을 세상에 소개하려고 해요.”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관계를 맺어주는 지점에서 일하던 그녀가 이제는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의 관계를 맺어주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계와 패션계에서 밤낮 없이 치열하게 일하던 여자들이 ‘슬로 라이프’를 지향하는 공간을 만든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지만, 그녀들은 결국 그 안에서도 일거리를 찾아 냈다. 우리 주위의 여자들이 대체로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