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차갑고 척박한 겨울을 지나 생기 도는 봄의 맛이 간절히 필요하다면 4월의 제주로. | 푸드,봄,제주도

짤막한 여정을 마치고 제주공항에 도착하면 이상하게도 립스틱이 사고 싶어진다. 복작복작한 면세점 한가운데서 뭐에 홀린 사람처럼 평소엔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핑크빛 컬러를 손에 쥐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그것이 생기 도는 제주의 음식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본다.제주 오일장에서 만난 봄의 전령사 할머니들은 ‘팝’하고 ‘쨍’한 핑크 컬러의 모자를 쓰고 ‘깔깔이’를 입은 채 푸르른 봄나물과 채소에 한껏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장을 택하는 게 아니라 장이 나를 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날이면 날마다 서는 게 아닌 오일장에 운 좋게 입성할 수 있었다. 엿장수의 달그락거리는 가위 소리, 어디선가 향나무를 태우는 듯한 짙은 우드 계열의 향기, 일렬종대로 널브러져 있는 미끄덩거리는 이름 모를 생선들, 목탁을 두들기며 갑자기 나타났던 스님의 목가적인 등장 신(Scene)까지. 넓은 무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퍼포먼스의 한 장면처럼 정신을 빼앗긴 채로 생경한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작은 간판 위로 ‘곡물부 14-1’, ‘가축부 19-6’, ‘야채부 13-9’ 이런 식으로 시장의 좌표를 표시해두긴 했지만 한번 길을 잃으면 통화 두어 번은 해야 재회할 수 있을 정도로 제주 오일장은 광활했다. 미로처럼 깊이 들어가다 보면 아무런 표시가 없는 구역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곳을 ‘오가닉 존(Zone)’이라 이름 붙여주고 싶다. 혹은 ‘힙 & 와일드 그랜마 존’?이번 오일장 탐험에 동행한 해비치 호텔앤드리조트의 제주 다이닝 레스토랑 ‘하노루’의 하진옥 총괄 셰프가 말했다. “여기는 할머니들이 작은 텃밭에서 키우거나 들에서 직접 캔 봄나물과 채소를 파는 곳이에요.” 우리는 달래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이건 내가 들에서 캐온 것이여. (이하 중략, 제주도 방언은 녹취해도 해독이 불가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하것지?(웃음) 살 꺼여 말 꺼여?” 친정엄마와는 여전히 제주도 사투리로 대화한다는 하 셰프에게 통역의 도움을 빌렸다. “할머니의 달래는 훨씬 통통하고 봉오리도 동그랗죠. 자연 그대로에서 왔다는 의미예요. 제주도는 워낙 바람이 강하게 불기 때문에 그걸 견디고 살아남은 나물이나 채소도 대부분 훨씬 강하고 맵죠. 제주는 뭐든 좀 센 편이에요.” 그날 오일장에서 유일하게 습득한 단어는 제주에서 달래를 ‘꿩마농’이라 부른다는 것이다.(다음 날 저녁 할머니가 담아준 2천원어치의 꿩마농을 송송 썰어 양념장을 만들어 밥에 비벼 먹어봤더니 확실히 향이 알싸하고 식감이 단단했다. 마농은 제주 방언으로 마늘이란 뜻이다.)줄곧 차분하고 평온했던 셰프가 갑자기 ‘말벌’을 발견한 것처럼 놀란 눈을 하고서 어딘가로 향했다. 분홍색 장미꽃 무늬 니트를 입은 할머니가 우리를 채근했다. “이거 가져가, 국으로 끓여 먹어도 나물로 무쳐 먹어도 맛있어. 2천원? 아니야 가져갈 거면 3천원어치는 가져가야지.” 흰 봉지 가득 초록 잎을 와일드하게 담아주었다. 봉지에서 푸른 잎 하나를 꺼내 잎 사이로 수줍게 자라난 작은 꽃을 보여주며 셰프가 말을 이었다. “이거 보세요. 배추에서 이렇게 꽃이 피어요. 이걸 동지라고 부르는데 김치를 담가 먹어도 참 맛있어요. 이게 벌써 나왔네요.”제주의 봄은 물보다 뭍에서 나온 것들이 풍요롭다. 그날 시장에서 옥돔, 우럭, 쥐치, 톳, 몸, 꼬시래기를 지나 땅에서 나온 것을 구경하는 데 시간의 팔할을 할애했다. 셰프의 페이버릿 간식인 ‘땅꼬’ 분식점의 도넛 하나를 입에 물고 짧은 시장 구경을 마무리 지었다. 공항에서부터 잿빛이었던 하늘에서 ‘쨍’한 한 줄기 빛이 구름 사이로 떨어졌다.호텔로 돌아온 셰프는 흰색 조리복을 입고 우리를 맞이했다. 본격적으로 제주 봄의 맛을 보여줄 채비를 마친 듯 보였다. 쌈 채소들이 들썩거릴 정도로 바깥 바람의 강도는 거세져 있었다. ‘백록담 하얀 노루’의 줄임말인 정갈한 이 식당엔 호텔 개관 1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올해 초 여성 셰프가 총주방장으로 부임한 것. 제주에서는 드문 일이라고 했다. 제주 애월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쭉 한 길만 걸어온 20년 경력의 향토음식 전문가다. 제주도의 제철 식재료와 음식 문화를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 그가 생각한 아이디어는 ‘해녀 밥상’이다. “제주 여자들은 워낙 강인하고 생활력이 강해서 쉴 새 없이 움직여요. 새벽에 고사리를 따다 말리고 낮엔 또 밭에 나가서 일하고 그러다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물질도 하고. 해녀 분들은 바다에서만 일하는 게 아니라 밭일도 같이 했어요. 땅도 척박하고 먹을 것도 많지 않으니 더 열심히 일해야 했죠. 밥 먹는 시간조차도 아까우니까 재료를 썰고 장식할 여유도 부족했어요. 밥도 양을 넉넉하게 지어 큰 그릇에 담아 서로 나눠 먹곤 했죠. 해녀들은 공동체 의식이 강해서 뭐든 같이 했어요. 그걸 제주말로 ‘수눌음’이라고 하죠. 해녀의 밥상에는 제주의 문화가 모두 담겨 있어요.”제주의 봄은 물보다 뭍에서 나온 것들이 풍요롭다. 분홍색 장미꽃 무늬 니트를 입은 할머니가 우리를 채근했다. “이거 가져가, 국으로 끓여 먹어도, 나물로 무쳐 먹어도 맛있어.” 흰 봉지 가득 초록 잎을 와일드하게 담아주었다.사실 모든 사람들이 먹는 데 사활을 걸고 이 땅을 밟지만 대부분의 흙이 검거나 회갈색 화산재로 이뤄진 제주도는 미식이 발달하기 힘든 환경이다. 제주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밥을 대충 먹어왔다. 바다와 땅에서 막 건져 올린 재료를 특별한 양념을 가하지 않고 복잡한 조리 과정 없이 가장 심플하고 빠르게 요리해서 먹는 것이 제주 미식 문화의 큰 뼈대다. 물론 신선하고 생기 넘치는 제주의 식재료를 굳이 치장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만.식재료의 중요성을 목청껏 외치며 직접 텃밭도 가꾸고 정직한 농부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으려는 요즘 셰프들이 추종하는 미식 트렌드가 제주의 밥상에 이미 옛날부터 반영되어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항상 집 앞마당에 작은 텃밭을 가꾸며 살아왔어요. 요리할 때 거기서 재료를 바로 캐거나 뜯어다가 한 움큼 집어 넣기도 하고 쌈 싸 먹는 식습관도 발달했죠. 주로 사용하는 양념도 간장, 된장 조금이 전부예요.” 영양학을 전공한 하 셰프가 조근조근 설명했다.하노루에서 5월 말까지 선보이는 ‘해녀 밥상’은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제주의 식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다. 반짝거리는 꽃멸치를 말린 ‘멜’을 주재료로 진득하고 입에 착 감기는 양념을 더해 조리한 메인 요리를 중심으로 따끈한 돌솥밥, 신선한 키조개 초회와 바다의 채소류(톳, 미역, 꼬시래기), 해물로 꽉 찬 된장찌개, 봄 쌈야채가 정갈하게 한 상에 차려진다.한낮에 오일장에서 만난 생기 가득한 재료들이 그날 저녁 식탁 위에 올랐다. 통통한 멜과 두릅을 봄동 위에 올리고 반으로 접어 입을 크게 벌렸다. 입안에서 ‘와삭’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향긋하고 쌉쌀한 향이 터졌다. 결이 살아 있는 ‘봄의 맛’이었다. 호텔 방 침대 위에 노트북이며 보도 자료며 온갖 일감을 펼쳐뒀지만 12시를 넘기지 못하고 깜빡 단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건강한 음식이야말로 세상 가장 오가닉하고 효과적인 수면제다.다음 날 아침 셰프가 일러준 ‘제주의 봄’을 프레임에 담고자 사진가와 바지런히 나섰다. 성산 일출봉 가까이에 가면 유채꽃이 한창일 거라는 것. 전날 셰프는 우리에게 유채나물을 만들어주었다. “꽃이 피기 전에 줄기를 따다 삶아서 무치면 그 맛이 참 달아요. 봄이 되면 김장김치가 맛이 없어지니까 유채로 대체하는 거죠. 딱 지금 이맘때쯤 먹기 좋아요. 성산에 피어 있는 건 사실 인공적으로 키운 꽃들인데 그래도 한번 가보세요.(웃음)” 역시나 ‘셀피’용 ‘스팟’이었다. 노란 후드 티를 맞춰 입은 커플들이 손을 쭉 뻗어 셀카봉과 혼연일체 되어 있었다.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마음은 꽃보다 줄기에 가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뜯어 먹는 걸까? 꽃은 안중에도 없고 길고 곧게 솟은 녹색 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방금 전 우리에게 입장료 2천원을 받은 ‘아재’가 나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먹고 싶어라? 우리는 점심에 유채랑 냉이랑 뜯어가 라면에 넣고 끓여 먹는디 씁쓸하니 맛있어라. 줄 수 있으니 좀만 기다려 보소.” (안타깝게도 그 찰나 한 무더기의 관광객이 몰려온 탓에 ‘유채 라면’은 상상의 맛으로 남았다.)유리창에 좁쌀만 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이호테우 해변을 향해 달렸다. 어젯밤 셰프가 이런 말을 했다. “4월은 청보리가 제철이에요. 배를 타고 가파도로 들어가면 매해 청보리 축제가 열리죠. 제주공항 근처에도 청보리 밭이 있긴 한데 아마 지금 가면 키가 많이 자라지는 않았을 거예요. 무릎만큼 올라왔으려나?”봄에 전성기를 맞는 청보리는 코시롱(고소하다는 뜻의 제주도 방언)하다. 수분기가 부족한 제주의 메마른 땅에서는 쌀보다 보리가 잘 자란다. 사진 한 장만 단서로 들고서 포토그래퍼와 이 밭 저 밭을 기웃거렸다. “여기가 맞을까요? 아닌가?” 서퍼들이 보드 위에 올라 미끄러지듯 파도를 타고 있는 이호테우 해변 가까이에 청보리 밭이 있었다. 팬톤에서 선정한 올해의 색 ‘그리너리’가 낮게 펼쳐졌다. 강한 바람에 청보리들이 찰랑거리며 잔잔한 결을 만들고 있었다. 제주의 봄은 4월부터 완연하게 열린다.HANORU INFOTel 064-780-8311Web www.haevichi.comTime 월~금 17:00~22:00 토,일 06:00~10:00 / 12:00~15:00 / 17:00~22:00추천 메뉴 해녀 밥상과 주꾸미 샤브샤브 각각 8만원(모두 2인 기준), 청보리 비빔밥 3만5천원, 도다리 두릅 초밥 3만원* 제주 봄 진미 4종은 5월 31일까지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