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od Scene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맛으로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생애 가장 우울한 <사이드웨이>의 햄버거와 와인, 더없이 관능적인 <아이 엠 러브>의 새우 요리, 공포와 긴장을 자아내는 <바스터즈>의 슈트루델, 처절하고 애처로운 <황해>의 구황작물. 신 스틸러가 된 영화 속 음식들, 기억할 만한 네 가지 맛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 BAZAAR,바자

실연의 맛저기 테이블 위에 머리가 벗겨진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누가 봐도 결혼식에 다녀온 옷차림. 보타이는 너덜너덜 풀어 헤쳐졌고 눈의 초점은 나가 있다. 허겁지겁 햄버거를 욱여넣는다. 테이블 아래로 몰래 손을 넣어 ‘샤토 슈발 블랑 1961 빈티지’ 와인을 일회용 잔에 콸콸 따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벌어진 난데없는 콜키지 셀프 서비스. 게다가 ‘잘토’나 ‘리델’도 아닌 일회용 잔에 몇 백만원짜리 고급 와인을? 물론 나도 경험해봤다. 좋은 샴페인을 호방하게 ‘카스’ 잔에 담아 마시는 것의 묘한 해방감을. 그런데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저것은 와인 학대 행위나 다름없다. 결혼 10주년에 아내와 마시려고 아껴뒀던 와인 아니었나. 얼마나 기대하고 고대했던 순간이었는데.... 의 주인공 마일즈(폴 지아마티)는 와인에 미친 사람이다. 평소엔 ‘슬픔이’가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면 딱 저 모습이지 싶다가도, ‘와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화색이 돈다.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몰 때, 포르노 잡지를 읽을 때, 화가 날 때도 와인을 꼭 쥐고 있다. 가장 ‘극혐’하는 데이트 매너는 싸구려 와인을 시키는 것. (뭐지 이 남자?) 그런 ‘와인 주의자’가 지금 자신이 최고로 아끼는 와인을 괴롭히고 있다. 폭주이자 자학의 맛이다. 소설가를 꿈꾸는 그가 말하길 자신은 지금 “바다로 흘러갈 똥 묻은 휴지 신세”란다. 사랑을 잃어서 그렇다. 그래도 야무지게 먹고 마신다. 일회용 잔일지라도 습관처럼 휘휘 돌리며 스월링(잔을 돌려서 공기와의 접촉을 통해 와인의 향을 깨우는 행위)한다. 무의식적으로 신음 비슷한 소리가 ‘아’ 하고 터져 나온다. 슬퍼도 극도로 맛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좀 더 느껴야 한다. 와인이 곁에 있는 한 실연의 맛은 쓰지 않다. 육감의 맛여자의 장벽은 언제 무너질까? 그것이 ‘색’과 ‘태’를 가진 고유한 음식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엠마(틸다 스윈턴)를 보며 확신했다. 틸다 스윈턴이 나이프로 썰어서 한입 먹고 나서 무언가 느낀 듯 보였던 ‘새우 요리’처럼. “절인 달걀 노른자에 완두콩 크림과 호박꽃, 달콤하고 새콤한 소스를 얹은 라타투이와 새우, 아삭한 야채를 섞은 요리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웨이트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극 무대 위 배우에게 핀 조명이 극적으로 떨어지듯, 그 순간 진공 상태처럼 사방이 뭉개지고 소리가 아득해진다. 묘한 끌림을 느낀 남자의 손길이 닿은 요리 한 접시가 이 여자의 모든 감각을 열어버렸다. 그것은 생의 가장 은밀한 욕망까지 뒤흔들 만큼 격정적이다. 새우를 먹은 엠마의 황홀한 표정은 절정의 순간을 느끼는 여성을 묘하게 연상시킨다. 관능의 맛이다. 극이 진전되면서 엠마와 안토니오는 요리하다 키스하고, 섹스하며 요리 이야기를 나눈다. “속이 투명하게 보여야 돼.”라고 엠마가 ‘우하수프’에 대해 속삭이면 서로의 혀가 포개진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산꼭대기 위에서 벌어진 한낮의 정사. 능선, 바람, 새소리, 나무 냄새, 꽃에 내려앉은 벌이 맞닿은 살과 살 사이로 교차된다. 엠마는 대저택에 갇혀 있던 자신의 몸과 정신을 급진적인 속도로 해방시킨다. 육감의 맛이야말로 권태로운 삶을 전복시키는 한 줄기 빛이다. 긴장의 맛파이가 이렇게 공포스러운 음식일 줄이야. 영화를 본 이라면 모두 동의할 테지만 에서 가장 압도적인 순간은 머리 가죽을 벗기거나 히틀러 암살에 성공하는 신이 아니라 유태인임을 숨긴 쇼산나(멜라니 로랑)와 그녀의 가족을 몰살시킨 한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이 마주앉아 슈트루델 파이를 먹는 장면이다. 한스 대령은 몹시 예의 바른 말투로 이렇게 주문한다. “나는 커피. 숙녀 분에겐 음... 우유 한 잔!” 그리곤 반드시 크림을 곁들여야 한다는 강요를 덧붙인다. 여기서 ‘우유’와 ‘크림’은 일종의 테스트다. 독일식 슈트루델은 가장 일반적인 재료인 사과 외에도 고기 완자를 넣어 만드는데 유태인은 율법상 유제품과 육류를 함께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숨막히는 상황을 즐기듯이, 너무나 탐스럽게 파이를 먹는다. 오죽하면 “크리스토프 왈츠는 파이를 맛있게 먹어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과장된 친절함과 약간의 변태성이 가미된 표정으로, 공손하지만 잔혹한 질문을 던지며, 행복하게 쩝쩝. 어찌나 미묘하고 리얼한지 그 모습을 보다 보면 미각 잃은 얼굴로 겨우 슈트루델을 삼키는 쇼산나에게 절로 감정 이입이 된다. 파이가 곧 쇼산나라도 되는 양 맛깔나게 피우던 담배를 슈트루델에 꾹 눌러 끄는 순간엔 침이 바짝바짝 마른다. 세상에서 가장 섬뜩한 음식일 것 같은 슈트루델은 사실 굉장히 섬세하고 연약한 디저트다. 얇은 페이스트리가 겹겹이 사과와 견과류, 소시지 등을 감싸고 있는 덤덤하고 건조한 맛. 직접 먹어보면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된다. 한스 대령의 말이 맞았다. 슈트루델은 반드시 크림과 함께 먹어야 한다. 허기의 맛를 보면 감자를 쪄야만 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감자를 소쿠리에 쌓아놓고 TV를 보면서 한입 가득 베어 먹어야 한다. 어금니가 다 보이도록 입을 쩍 벌려가며 일단 밀어넣은 다음 우적우적 씹어야 한다. 구운 김, 컵라면, 소시지, 편의점 크림빵.... 영화 속에서 ‘구남(하정우)’은 다양한 인스턴트 식품과 구황작물을 그렇게 먹는다. 그는 항상 배가 고팠다. 폐가를 뒤져 쉬어버린 총각김치를 무작정 입에 쑤셔넣고 담배 한 갑을 다 태울 만큼 하루 종일 숨어 있다가 편의점에서 급히 한 끼를 때워야만 했다. 그 어떤 미식의 기쁨이 생존의 욕망보다 강렬할 수 있겠나? 다소 초라한 메뉴를 선보이는 가 진귀하고 현란한 푸드 무비들을 제치고 ‘먹방의 전설’로 남은 건 음식보다는 음식을 대하는 처절한 태도 때문이다. 게다가 좀 귀엽기까지 하다. 피와 (뼈로 사람을 때려 죽이는) 폭력이 난무하는 나홍진 감독의 광기 어린 미학 속 하정우의 걸신들린 취식 연기는 위트를 더한다. 곰팡이 잔뜩 핀 방, 내복과 모포, 다 터진 입술로 호호 불며 먹는 감자, 그리고 하정우. 미치도록 애처로우면서도 그 모습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이다. 이 그랬듯 역시 모호함의 연속이다. 치정, 외도, 관계에 대한 의심과 미션에 관한 정보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살해 당한 조선족 여인은 구남의 아내일까? 기어코 구남은 죽은 건가? 혹시 구남의 환상으로 해피 엔딩은 아닌지? 이 영화에서 확실한 건 오로지 참을 수 없는 허기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