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라는 여자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지금 영국 켄징턴 궁전에서는 故 다이애나 비의 의복 전시 <Diana: Her Fashion Story>가 열리고 있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옷 사이로 한 여인의 삶이 보인다. 다이애나는 어떤 여자였을까? 영국판 <바자> 편집장이자 소설가 저스틴 피카디가 황실 스타일의 아이콘 다이애나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전시,다이애나

나는 개인적으로 다이애나를 알진 못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삶을 지켜보았다. 20년 전,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온 나라가 격한 슬픔에 휩싸이는 모습도 목격했다. 그녀와 나는 나이가 같았으며 실제로 며칠 차이로 태어났다. 그녀의 길과 나의 길이 만나는 지점은 없었지만 그녀와 친하게 지냈던 몇몇 사람들을 알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 안에서 여전히 뭐라고 규정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사람으로 남아있다. 확실한 것은 1995년도 에 실렸던 패트릭 드마셸리에(Patrick Demarchelier)의 포트레이트 사진 속 그녀가 엄청난 미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 의 에디터였던 리즈 틸버리스와 그녀가 서로 사랑하는 친구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은 1980년, 다이애나가 아직 젊었던 시절에 처음 만났다고 한다.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시절, 다이애나는 매우 불행했다. 19세의 나이에 찰스 황세자와 약혼을 했던 그녀는 신경성 폭식증에 시달리고 있던 데다가 행복하지 못한 결혼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리즈 틸버리스가 에 기고한 기념비적인 다이애나 추모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다이애나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나 역시 나만의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다이애나와 가장 가까웠던 1993년에 난소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별거와 이혼으로 인한 심적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내게 계속 전화를 걸어주었다.” 다이애나의 다정한 품성은 노숙자와 에이즈 환자 등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열린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리즈 틸버리스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 과연 몇 명이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다이애나는 천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눈부시게 밝았던 빛은 이제 떠났고, 그녀가 없는 세상은 전에 없이 어두워 보이기만 한다.”다이애나의 몇몇 친구들은 그녀가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했다. 이를테면 다이애나의 죽음 직후 에 글을 기고했던 클라이브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나는 그녀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예민하고 불안정한 사람이었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을 때는 마치 광란의 파티 도중 던져진 케이크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다이애나가 가진 약한 점들이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다이애나의 삶 속에서 나 자신의 삶을 보았던 것이다.”나는 그 말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이애나는 멀고 먼 황실의 여인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과 고난, 승리의 경험으로 가득한 삶을 살다 간 여자로 느껴진다. 1997년 8월 31일, 그녀가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영국 여성들이 마치 친구를 잃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한 가지 고백하자면 사실 당시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공교롭게도 다이애나가 죽던 날이 내 여동생의 마지막 날들이었기에(동생은 그로부터 3주 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생의 고통에 훨씬 더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다이애나를 향한 애도의 물결이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동화 같은 스토리가 깨진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삐딱한 생각까지 했다. “동화와도 같은 이야기가 만든 자리입니다.” 1981년 7월 29일, 다이애나의 세인트폴 대성당 결혼식에서 로버트 룬시 캔터베리 추기경이 한 말이었다.하지만 로맨틱한 신화적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은 사람들에겐 시작부터 그 결혼의 그림자가 보였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TV에 얼굴을 비추던 날, 다이애나는 사파이어 약혼 반지에 맞춰 얌전한 리본 장식이 달린 블라우스와 파란색 수트를 입었다. 수줍은 처녀 티가 나는 10대의 모습이었다. 비록 13살 차이가 나는 잘생긴 왕자 옆에 서 있긴 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건 간에, 잘해낼 것입니다.”두 사람의 연애가 너무 짧았던 것은 아닐까? 다이애나는 훗날 그녀의 자서전을 집필한 앤드류 모튼과의 비공개 인터뷰에서 찰스 황세자가 전 여자친구인 카밀라 파커 볼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두려움을 결혼 이틀 전에서야 떨쳐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두 자매에게 “이 결혼 못할 것 같다”라고 말했고, 그녀들의 대답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다이애나, 이제 와서 도망 치기엔 늦었어. 이미 네 얼굴이 손수건에도 찍혀 나오고 있어.” 그때 그녀의 얼굴은 손수건뿐 아니라 수많은 신문과 잡지 커버에도 선명하게 찍혀 나오고 있었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녀의 불안감도 커져만 갔다. 1997년 11월호"/>세기의 결혼식에서 행진을 하고 있는, 20세 여인의 모습을 전 세계 7억 5천만 명의 사람들이 TV를 통해 지켜보았다. 그녀의 또 다른 자서전 작가였던 샐리 베델 스미스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이보리색 태피터와 레이스가 달려 있고, 끌리는 옷자락 길이만 25피트에 달했던 풍성한 웨딩드레스는 다이애나의 외할머니인 바바라 카틀랜드가 썼던 소설 속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였다. 다이애나는 약혼을 한 후에 살이 7kg 정도 빠졌고, 허리 사이즈는 29에서 23까지 줄어들었다. 그 바람에 디자이너들은 몇 번이고 드레스를 고쳐야만 했다. 대중들의 눈에는 공주와 왕자의 환상적인 결혼식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드레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애나 본인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악몽을 꾸는 듯 여겨졌다. 앤드류 모튼과의 또 다른 인터뷰 녹음본에 따르면(타블로이드 신문기자였던 그에게 그녀는 남 모르게 협조를 요청했다), 약혼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한없이 쪼그라들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이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졌다고 말이다. 모튼의 테이프 속에 담긴 다이애나의 어조는 이상할 정도로 건조해서 자학이나 자살 충동 등의 극단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로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대중 앞에서의 삶이란 진짜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어놓는 동화 속 공주님을 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공주님 안에 숨 쉬고 있는 ‘나’는 스스로가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째서 나지? 내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거지?’라고 곱씹으며 자학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로맨틱한 동화 속 공주님이라기보다는 다프네 듀 모리에가 쓴 고딕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대중은 다이애나 스토리를 어떤 악한 세력에 의해 위험한 상황에 빠진 희생자의 이야기로 읽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양면성이 그녀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다이애나는 사생활을 침해하는 언론과 파파라치를 경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며 남편으로부터(그녀가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남자) 좋은 점수를 얻고자 할 때도 있었다.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란 그녀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감정을 안고 살아왔고, 스스로 ‘매우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촌의 첫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서야 했는데 엄마는 녹색 드레스를, 아버지는 흰색 드레스를 가져왔다. 둘 다 예뻤지만, 결국 그날 내가 뭘 입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건 내가 해야 했던 선택 중 가장 괴로운 결정이었다.”훗날 그녀는 옷으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는 데 능숙해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994년 6월 어느 밤, 그녀가 입었던 ‘복수의 드레스’다. 그날은 바로 찰스 황세자가 인터뷰에서 자신과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불륜 사실을 고백했던 날이었다.(시크한 블랙 미니 드레스에 마놀로 블라닉 하이힐을 신고 빨간색 매니큐어를 바른 금발의 다이애나는 그날 매우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그녀는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옷의 상당 부분을(79벌의 칵테일 드레스와 이브닝드레스)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약 3백25만 달러가 모였다. 는 이렇게 보도했다. “그날 경매에 나온 옷들은 화사한 공주였던 다이애나, 여왕으로서의 다이애나, 그리고 스스로 자립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의 다이애나를 모두 보여주는 듯했다.” 가장 비싼 가격인 22만2천5백 달러에 낙찰된 옷은 다이애나가 1985년 백악관에서 존 트라볼타와 함께 춤을 출 때 입었던 미드나잇 블루 컬러의 벨벳 가운이었다. 그 옷은 켄징턴 궁전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에서도 선보인다.전시가 열리는 장소는 한층 더 슬픔을 자아낸다. 다이애나는 결혼한 시점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켄징턴 궁전에 거주했으며, 지금은 다이애나의 큰아들 윌리엄 왕자가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다이애나가 죽던 날, 켄징턴 궁전 앞에는 수백만 개의 꽃다발과 손편지가 쌓였다. 나 역시 그날 촛불을 들고 다이애나비를 추모하러 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침묵했고, 그중 몇몇은 만나본 적도 없는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슬픔은 실로 깊은 것이었다.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열정적이면서도 불안한, 영국인이 원래 가지고 있는 기질을 뛰어넘는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녀를 열정적으로 애도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거리감을 느꼈기에, 다이애나라는 사람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했다. 무엇이 그녀를 유명인에서 성인의 반열로 올려놓은 걸까?누군가에게 그녀는 소란스러운 삶을 살다가 일찌감치 죽음을 맞이한, 현대판 셀러브리티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괜히 서성이며 의미를 찾아보게 되는 어두운 창공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는 켄징턴 궁전의 정원사들이 선택한 추모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올해 초, 다이애나의 기일을 맞아 영국 장미와 수선화,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뜻을 가진 물망초가 가득한 흰색 정원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