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여정의 고유한 바이브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채움보다 비움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배우. 꼿꼿하게 걷는 사람.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대한 고유의 바이블을 가지고 있는 여자, 그리고 배우, 조여정. | 조여정

조여정은 꼿꼿했다. 빨간색 작은 크로스 백을 메고 경쾌하게 걸어 들어올 때도, 블랙 백리스 드레스를 입고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벽 뒤에 숨어 있을 때도, 노란 바나나를 먹으며 수다를 떨 때도.조여정은 단단했다. “팔에 힘을 조금만 풀어주시겠어요?” 옆에서 사진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평소 조여정에 대해 잘 아는)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저 상태가 힘을 빼고 있는 건데.(웃음)”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그녀의 팔을 보고 있노라니 흰색 티셔츠 소매를 둘둘 말아 어깨까지 올린 채 맨땅에서 푸시업 하던 천은주가 오버랩되었다. 작년에 4부작으로 방영됐던 KBS 드라마 에서 조여정은 역대급 센 캐릭터로 분했다. 치정, 살인, 방화, 도주, 자수, 복수. 교도소 독방에 갇혀 목에 핏대가 선명하게 설 정도로 독하게 몸을 단련하던 그 장면을 ‘GIF’ 파일로 만들어 이 글 옆에 첨부하고 싶달까? 분노, 포효, 주정, 광기, 협박, 구타. 조여정은 한 인간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온몸과 에너지를 폭발시켜 열연했다.“내가 못해내면 어쩌지?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너무 무서웠어요. 막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더라고요.” 나긋나긋이 트레이드마크인 오른쪽 보조개를 보이며 그녀가 말했다. “근데 첫 신을 찍고 나니까 ‘됐다,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 작품은 조여정에게 생애 첫 드라마상을 안겨주었다. 2016 KBS 연기대상에서 연작·단막극상을 수상한 것. 그날 청초한 연분홍 드레스를 입고서 단아하게 머리를 묶어 올린 조여정은 담담하게 수상 소감을 말했다. “데뷔하고 받는 첫 드라마상을 로 받아서 정말 너무 기쁘네요.” 말과 말 사이의 아주 짧은 순간, 객석에서 잔잔한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큰 산을 넘고 나니까 이제 내 연기가 시작이구나 싶어서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큰 작품입니다. 앞으로도 막막함을 즐기는 좋은 배우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여정은 야무지게 말을 매듭 짓고 ‘페이드 아웃’했다. 눈가가 촉촉했지만 흐르지는 않았다.고교 시절 하이틴 패션 잡지와 광고의 모델이었고 15대 ‘뽀미언니’로 상큼함을 담당하던 그녀였다. “수능 시험이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시트콤 드라마 첫 촬영을 했던 기억이 선명해요. 대학 입학과 동시에 연기를 시작했거든요.”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과 이란 두 편의 영화가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굵은 점을 찍어주었다. 그전까지는 배우로서 “가고 싶은 방향에 맞닿은 작품에 도달하기 참 어려웠다”는 것이 그녀의 속사정. 한시도 스스로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스타일인 것 같다고 말하니 “20대엔 시간이 많았거든요.”라며 자조적인 웃음을 호방하게 터뜨렸다. “그때는 누구를 만나도 말을 하기 싫었어요. 누군가를 만나면 괜찮은 척을 해야 했으니까요. 주변의 염려나 걱정에 대해 괜찮은 척을 하던 것에 좀 지쳤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열흘 동안 호텔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너무 행복했어요.”조여정은 서른 살에 춘향이 되어 만개했다. 꽃이 만발한 산길을 방자의 등에 업혀 내려가면서 “넌 뭐든지 잘하더라? ‘쌈’도 잘하고 헤엄도 잘 치고 그리고 고기도 잘 굽고.” 그를 어르고 달랜다. 방자가 삐죽거린다. “먹어보지도 않고선....” 그러자 춘향이 말을 톡 쏜다. “꼭 먹어봐야 아나? 냄새만 맡아도 알지.” 조여정은 ‘신(Scene)’으로 기억되는 배우다. 어떤 영화에서든 반드시 되짚고 묻고 싶은 장면을 남긴다. 남자의 순정을 배반했던 에서는 ‘팜므 파탈’ 그 자체다. 옛 연인 귓가에 대고 남자의 착각을 산산조각 내는 치명적인 말을 서늘하게 속삭인다. 배우의 이면을 바라본 감독들은 조여정 자신도 모르는 낯선 얼굴을 깊은 곳에서 건져 올렸다. 그 정점에 있는 영화가 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여자들의 김장 토크가 이렇게도 살벌할 수 있단 말인가. 미용실에서였다. 군인 장교 남편의 권력이 내조하는 아내들의 세계에도 그대로 전이된 아슬아슬한 그 현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여장부 숙진(조여정 역)이 “영철 엄마, 우리 집 와서 김치 좀 담가줄래요? 배추는 사놨는데, 담기가 귀찮네.”라고 말할 때 나는 그녀가 조금 무서웠다. ‘껌’ 좀 아니, ‘철근’도 잘근잘근 씹을 기세다. “제가 화가 나서 정색하고 분노하면 딱 고렇게 돼요. 사실 저도 처음 본 제 모습이었어요.”실제로 만나본 조여정은 ‘조여정 씨’가 아닌 ‘여정 언니’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인터뷰임을 망각하고 평소 고민을 털어놓고 싶게 만드는 리액션의 여왕이었다. 드라마 , 처럼 로맨틱코미디에서 보여준 모습이 실제에 가깝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여성 스태프들을 ‘백허그’로 안아주는 모습은 한없이 스위트했다. 그렇게 살갑고 상냥하다가도 말 가운데 톡 쏘는 샴페인 같은 청량감도 있었다. 그날의 인터뷰 가운데 기억에 남는 멘트를 맥락 없이 나열해보자면, “여자의 속은 아무도 모르거든요.” “미래에 태어날 딸이 혹시라도 배우가 되고 싶어한다면 차라리 안 예쁘게 태어나길 바라고 싶어요.” “배우로서 무언가 다른 점이 없다면 누가 저를 봐줄까요?” 마지막 문장은 보디, 뷰티 케어 등 뭇 여성들이 선망하는 철저한 관리비법에 대해 묻는 질문에서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저도 일을 안 하는 시기에 한없이 늘어져 있어봤는데 오히려 컨디션이 별로였어요. ‘나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운동도 꾸준히 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해야 좋은 얼굴이 만들어지는 건 당연하죠. 스스로에게도 서로에게도 좋은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혹독한 길을 먼저 걸어본 선배가 아끼는 후배에게 진심을 담아 조언해주는 것 같았다. 조여정이 마냥 ‘예쁜 배우’라는 장벽을 넘어서 독기와 광기를 넘나드는 스펙트럼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건강한 실패’ 아니었을지? “ 들어가기 전에 연기 대학원 실기 수업 중 하나로 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어요. 무대에서 거의 퇴장 없이 여러 명과 쉴 새 없이 대사를 주고받는 여주인공을 맡았는데 첫 공연을 완전히 망쳤어요. 욕심을 부리면 이렇게 되는구나 완전히 깨달았죠. 그래서 두 번째 무대 올라갈 때 아무것도 안 들고 올라간다는 느낌으로 해보니까 파트너가 그제서야 보이더라고요. 귀를 기울이니까 공연이 확 열리는 걸 경험했어요. 잘하려고 의욕을 부리면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게 연기인 것 같아요.”연기든 일상이든 요즘 조여정은 채우기보다 비우는 편이다. “20대에는 가만히 있으면 뭔가 불안해서 촘촘히 살았는데 이제는 뭘 더해서 나아지는 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른 넘어서부터는 바쁘게 지내는 것보다 사색하는 시간이 더 좋아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중요하단 걸 알겠더라고요. 내려놓는 시간도 때로는 필요한 것 같아요.” 예전의 모토가 다채로운 경험이었다면 요즘은 한 가지에 집중한다. 요가, 등산, 수영, 서핑 등 예전엔 “운동도 여러 가지를 해봤는데 요즘엔 탄츠 플레이 딱 하나만 한다”고 했다. 선택과 집중을 할수록 취향은 확고해진다. 모자를 눌러쓰고 집 근처 소바집에서 ‘혼소’를 즐겨 한다는 조여정이 요즘처럼 추운 계절에 먹는 음식은 절인 청어를 올린 따끈한 ‘니싱소바’. 평소 중요하게 생각하는 뷰티 팁은 가방 없이 맨손으로 잠깐 집 앞을 나갈 때도 집 열쇠와 함께 립스틱은 꼭 쥐고 나간다는 것. 요즘 침대 맡에 두고 읽는 ‘베드타임 스토리’는 김민정 시인의 . 최근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 조여정은 살뜰하게 책을 읽는다. 혹시 소설을 읽을 때 어떤 배우가 캐스팅되면 좋을지 상상하며 읽는 편인지 묻자, “역할이 여자면 무조건 다 저예요. 진짜로 일어난 일도 아닌데 ‘나 이거 어떻게 연기해야 되지?’ ‘이런 역할 들어오면 어떻게 소화하지?’ ‘이건 너무 어렵겠다’ 그런 상상 하면서 혼자 읽어요. 이거 혹시 직업병인가?(웃음)”라며 총총거렸다. “내 삶이 하는 게 연기인 것 같아요.” 앞서 스치듯 지나갔던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깨지면 아무것도 아닌 ‘겉’에 연연하지 않고 깊숙한 ‘속’을 파고들고자 하는 여배우의 갈망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얼마 전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해체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꼭 똑 부러지게 연기할 필요가 있을까? 정서만으로도 충분한데 그 순간에 꼭 발음을 정확하게 해야 할까? 그런 강박을 없애볼까 싶어요. 늘 하던 것에서 탈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괜히 이것저것 문제 삼아 보고 있어요.(웃음)” 3월부터 시작될 KBS 드라마 에서 조여정은 극의 미스터리를 담당한다. “은희는 사랑을 못 받은 여자예요. 그러니까 자꾸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하고 사건이 일어나요. 고소영 언니의 인생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캐릭터예요. 일어나는 사건들의 키를 제가 쥐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저한테 없는 부분을 자꾸 꺼내야 하는 드라마라 또 막막하네요.”조여정과 은희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사랑에 대한 집착이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어려워하고 있나 봐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