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의 예술론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누드도 불사하고 때론 하이힐을 신기도 하는 자유분방한 클래식 아티스트가 속사포처럼 쏟아낸 예술론을 들어보자. | 지용,피아니스트,Pianist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은 지용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슈만의 ‘헌정’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1840년 슈만이 아내 클라라에게 헌정하기 위해 작곡한 곡이다. 스위치라도 켠 듯 순식간에 음악에 몰입한 그는 애절한 표정을 지은 채 아름다운 선율로 공간을 채워나갔다. 클래식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 광경은 다름 아닌 촬영장에서 벌어진 일. 보통 촬영장에서 박수 소리가 나는 순간은 촬영을 모두 마친 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해산할 때뿐이지만 이날 촬영에선 지용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모든 스태프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연주하는 척’을 해줄 수 있냐는 요청에, “I want to play for real.”(아홉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지용은 영어를 사용한다.)이라고 답한 지용은 촬영 내내 ‘헌정’을 비롯해 바흐의 코랄 프렐류드 중 ‘깨어나라, 부르는 소리 있어’와 쇼팽의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Op. 22’까지 유려하면서도 강렬한 연주를 계속해나갔다.인터뷰가 확정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스타그램 탐방이었다. 단번에 그의 계정을 찾았지만 ‘클래식 피아니스트’ 지용의 계정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 비슷한 아이디의 계정들을 기웃거렸다. 피드를 가득 채운 그의 일상이 패션 잡지에서 일하면서 본 어떤 사람보다 패셔너블하고 자유분방해 보였기 때문. 일단 레이디 가가의 음악에 맞춰 집 안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영상이 눈길을 사로잡았고, 양쪽 팔뚝에는 눈을 뜬 얼굴과 눈을 감은 얼굴의 타투가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전자는 ‘지식은 힘’을 의미하고, 후자는 ‘무지는 축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배경음악이 전혀 없음에도 흥겹게 그루브를 타는 셀프 동영상이나 여자인 나도 신어본 적 없는 높이의 하이힐을 신은 채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심지어 뒷모습 누드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모습이었다.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은 행복하지만, 특별한 재능과 무거운 책임이 주어진 것은 힘들어요. 제게 재능은 불만의 대상인 동시에 기쁨의 근원인 것 같아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거든요.촬영장에서 지용은 추워진 날씨에 핫팩으로 손을 녹여가며 연주를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 개구쟁이 같은 소년미와 지천명이 되어야 지닐 수 있는 진중함이라는 상반된 특성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음을 지용을 보고 깨달았다. “저는 퍼포머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여기엔 의문의 여지가 없죠. 몸속의 모든 뼈와 세포 하나하나에 전부 퍼포머로서의 기질이 있어요. 어릴 적부터 소위 ‘끼’가 많았어요. 하지만 동시에 정적인 사람이기도 해요.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많고, 생각한 모든 것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해요. 사람과 사람과의 커넥션, 그러니까 공감에 관한 부분은 오래전부터 즐겨 하는 생각이에요. 개인적으로 탐구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연주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지용은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명동 한복판에서 게릴라 공연을 하기도 하고, 발레리나 강수진의 갈라쇼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모색해왔다. “연주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이고, 연주자는 자신만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청중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클래식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장르의 음악을 즐기기도 한다. 레이디 가가에 대한 열광적인 팬심은 지용 주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또한 오는 연말에 예술의전당에서 진행하는 유키구라모토와의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는 재즈와 클래식이 접목된 조지 거슈윈의 ‘Rhapsody in Blue’를 연주할 예정이다. 지용의 다소 파격적인 행보는 정통을 중시하는 클래식계에서 비판을 유발하는 일이기도 했다. “늘 비판 받아요.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다름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은 특별하고 각각 나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잖아요. 이건 선물과도 같은 거예요. 솔직히 제가 받는 회의적인 시선은 오히려 동기부여가 돼요.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건 제가 뭔가 잘하고 있다는 뜻이에요.”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주최한 영 아티스트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의 인생을 시작한 그이기에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이야 상당한 내공이 축적되어 있겠지만, 어린 음악가로서 부정적 시선을 감내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터. 그럼에도 음향 시설이 완비된 공연장에서뿐만 아니라 영등포 타임스퀘어나 명동의 길거리 등 평범하지 않은 공간에서 공연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으로서 우리가 느끼는 욕정과 배고픔, 분노 등은 수백 년 전과 마찬가지 감정이에요. 클래식 작곡가들이 곡을 쓸 때에도 그런 감정과 인생의 경험을 투영했을 거예요. 그들도 생계를 위해 고생해야 했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경험을 했겠죠. 1650년이든 2016년이든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똑같은 경험을 해요. 이 단순한 개념이 시대를 초월해 인류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하죠. 그래서 저는 클래식이 낡고 오래된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주를 하다 보면 작곡가들의 감정과 경험이 뼛속까지 느껴져요. 그것이 연주를 통해 청중에게 전달된다면 작곡가가 누구인지 몰라도 감동을 느끼고 곡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에게 연주 활동은 마치 선교 활동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연주자들은 세일즈맨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판매하듯 청중이 있는 곳으로 음악을 가져가야 해요. 음악을 나누는 것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없다면 클래식 뮤지션으로 살면 안 돼요.” 부와 명성을 좇기보다 그저 더 많은 청중과 자신의 음악을 공유하기 원하는 그는 “음악을 통해 자유를 얻고 싶을 뿐, 안정감을 찾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Yes, of course!”라는 명쾌한 답변이 돌아올 줄 알았던, “피아니스트로 사는 것이 행복한가?”라는 마지막 질문에 지용은 단호하게 ‘No’라고 답했다. “불행하다기보다는 어려워요. 음악과 피아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 택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에요. 100%가 아니라 250% 원해야 할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한 선택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껴요.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은 매우 행복하지만, 특별한 재능과 무거운 책임이 주어진 것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어요. 제게 있어서 재능은 불만의 대상인 동시에 기쁨의 근원인 것 같아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거든요.”※ 독자를 위한 지용의 연주 영상은 크리스마스 시즌 인스타그램 계정 (@harpersbazaarkorea)과 웹사이트 (www.harpersbazaar.co.kr)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