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괴로움 VS. 먹는 즐거움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혀와 위장에도 그들 각자의 취향이 있다. 먹는 것에 있어 극과 극 사이에 놓인 어느 안티 푸디스트와 푸디의 입장정리. | 음식,미식,안티 푸디즘,푸디즘

먹는 괴로움 믿을 수 없겠지만, 세상엔 음식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감히’ 난 치킨이 싫다. 회는 입에도 못 대고 족발과 보쌈을 포함한 고기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 다녀온 이후론 못 먹는 음식이 하나 더 늘었다. 보글보글한 거품이나 녹색 크림으로 멋을 낸 예술적(가격도 작품 뺨치는) 요리들 말이다. 그렇다! 용기 내어 고백하건대, 난 먹는 일에 큰 취미가 없다. 남들이 좋아하는 대부분의 음식을 꺼리지만 어차피 식사란 ‘주유’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므로 그다지 까다로운 편도 아니다. 횟집에서는 반찬만 먹어도 상관없고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라면 바게트만 씹어도 되는 인간이 나다. 맛없는 혹은 못 먹는 음식보다 더한 괴로움은 이토록 무던한 내 혀를 두고 수많은 미식가들이 혀를 차는 순간이다.어찌나 다사다난한 동정과 권유를 받아왔는지 신경학자 러셀 포스터의 TED 강연을 보면서도 그들을 떠올렸을 정도다. “제 경험상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단지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정도입니다.” 공감하나? 이건 ‘아침형’과 ‘저녁형’을 ‘탐식형’과 ‘주유형’으로 대신해도 얼추 맞는 얘기다. 정말이지, 그들은 우쭐거린다. 설교가 음식의 맛을 돋우는 비밀 양념이라도 되는 양 때로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주변만 쓱 둘러봐도 피해자가 속출한다. 맛보다는 편안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A는 생일날 손이 아닌 포크로 빵을 먹었다는 이유로 호된 매너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고 털어놨다. ‘좌빵우물’ 식의 테이블 매너엔 그렇게 철두철미한 사람이 생일밥상에서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내는 건 예의가 아님을 모른다니,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그런가 하면 ‘아재 입맛’으로 구박 받던 B는 자신의 송별회 장소로 소주 주점을 점찍어두었지만 어쩔 수 없이 와인에 치즈를 음미해야 했다는 제보를 전했다. “30만원이 넘게 나와서 그런 게 아니야. 이건 취향의 문제라고! 그들 말마따나 먹는 건 본능적이면서 사회적인 행위잖아. 더욱 조심스레 권해야지!” 내게도 수많은 일화가 있지만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을 꼽자면 “엄마가 어렸을 때 맛있는 걸 많이 안 해줬나 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다. 회를 멀리한다는 게 ‘부모 욕 먹일 짓’일 줄은 차마 예측하지 못했다.(엄마는 솜씨가 있는 편이다. '한때'는 열심히 하기도 했고.) 이 무례함은 뭔가? 혀와 위장의 쾌락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취향은 나쁜 취향이라 믿게 된 걸까?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안티 푸디즘에 관한 책 의 저자 스티븐 풀은 요즘 미식 문화의 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오늘날에는 페란 아드리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엘 불리에서 지난밤 만찬을 먹은 뒤 ‘눈물을 흘렸다’고 공개적으로 밝힌다고 해서 심각한 정신적 혼란 상태의 징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임에 관해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상세하게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하는 것이 야만의 증거다.” 지금 음식은 그냥 음식이 아니라 의무감으로라도 열정을 쏟아야 할 교양이자 종교,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돼버렸다는 얘기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스티븐 풀은 더 이상 정치인이나 종교인을 믿지 않는 이 시대에 요리사들이 이 두 역할을 해주리라는 비아냥을 덧붙이기까지 한다. 비약인가? 글쎄, 추종에 가까운 공고한 세계관, 그곳에서 불온한 낌새를 드러내거나 그들만의 규칙에 위배되기라도 하면 미개인 취급하기 일쑤니 신앙이나 권력과 견줄 만하지 않나.물론 세상 모든 미식가들이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미식가가 되고 싶은 ‘자칭’ 미식가들이다. 아마 현재 안티 푸디즘의 정점에 서 있는 요리는 전 국민의 반 이상을 ‘냉믈리에’로 만든 평양냉면일 것이다. 정말 함흥냉면과 비빔냉면은 열등한 존재일까? 면을 잘라 먹거나 식초와 겨자를 뿌리면 하수인가? 웃음밖에 안 나온다. 게다가 그놈의 ‘면스플레인(냉면에 대해 자꾸 가르치려 드는 자세)’을 포함한 숱한 ‘자랑질’이 성숙한 식견에서 비롯됐다는 보장도 없다. 고급스러운 음식 취향을 자랑하면서도 “요즘은 먹는 데 왜 이리 유난”이냐는 밥상머리 대화로 신선한 충격을 준 C 역시 “송로버섯이든 설렁탕이든 음식이란 게 제대로 된 걸 많이 먹어봐야 퀄리티를 판단할 수 있는데 요샌 그냥 먹어봤다는 데 의미를 두고 알은체를 한다”며 도장 깨기나 다름없는 맛집 탐험 문화를 지적했다. ‘세계적인’ L 레스토랑을 비평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특정 매거진에 글을 기고하지 못하는 음식평론가 이용재(지금도 블로그(bluexmas.com)를 통해 사투 중이다)의 경우만 봐도 미숙함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찬가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다니 그 얼마나 대단하면서도 얕은 신성함이냔 말이다.이쯤에서 “감히!”를 외치고 있을지 모를 어느 미식가(바라기)를 위해 요리사이자 푸드 칼럼니스트인 앤서니 보댕의 한마디를 얹어야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우리처럼 요리를 하거나 음식에 관해 글을 쓰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지랄’을 부린다고 (정기적으로) 일러주어야 한다.” 여전히 불쾌한가? 그렇다면 인정하자. 당신은 ‘푸디’가 아니라 독실한 ‘푸디스트’다.먹는 즐거움 미식 파라다이스에서 푸디로 살아가는 즐거움에 대하여. 푸디, 식도락가, 미식가, 대식가, 탐식가. 글자는 달라도 결국 비슷한 맥락이다. 음식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 당신이 읊은 단어가 바로 ‘나’다. 그리고 내 주변엔 그런 푸디들이 여럿 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의 목적이 음식일 때가 대부분이며 만남의 목적 또한 각자 품어온 맛집을 함께 탐험하기 위함이다. 아는 사람끼리 먹었을 때 음식은 더 맛이 난다. 음식에 이야기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식재료의 발견, 재료 조합의 밸런스, 신선도와 굽기의 정도, 고민해서 고른 와인과의 매칭까지. 먹으면서 끊임없이 대화한다. 주제는 고갈되지 않는다.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게 혀와 머리에 저장된다. 이렇게 먹는 것에 사활을 거는 것을 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푸디즘’이란 단어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먹는 것은 생애 가장 즐거운 일이다.나는 왜 음식을 사랑하는가? 그것은 미각적 쾌락 때문이다. 푸드 포르노그래피에 자극 받기도 하지만 쉽게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혀로 직접 감지해보는 것이니까. 먹고자 하는 욕망에 따르기 위해선 부지런해야 한다. 미각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면 돈도 상당히 많이 든다. 먹는 데 쓰는 돈이 아깝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주로 계산하는 시점엔 취기가 한껏 올라 통장 잔액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반추할 때도 있다. 허기와 식욕은 원초적인 욕구지만 파인 다이닝처럼 고가의 음식을 향유하기 위해선 비싼 값에 대한 기회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쾌락적 순간에 앞서 고민과 선택이 필요한 일이다. 얼마 전에도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 비용으로 20만원을 쾌척했다. 먹지 않았더라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있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여전히 음식을 택할 것이다. 생강으로 만든 분홍색 거품, 뚜껑을 열면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연기, 공예 수준으로 재현한 가짜 딸기는 기예나 다름없다. 7가지가 넘는 요리 접시마다 와인과 커틀러리를 바꿔주었던 직원의 서비스, 그리고 오픈 주방으로 훤히 드러나던 요리사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여전히 선명하다. 20만원이란 액수를 두고 셈을 헤아리는 것을 멈추게 된다. 향유할 수 있는 많은 것 가운데 유독 음식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속도가 더디다. 호기심에 구매했던 2만원짜리 올리브의 향, 텍스처, 맛을 느껴본 후엔 음식의 질이 어느 정도 가격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몸소 알게 되었다.미식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건 첫 직장에서 마감이 끝나면 혼자 남산이 보이는 작은 레스토랑에 가서 전식, 본식, 후식에 와인을 곁들였던 순간부터다. 지금부터 5년 전이면 요즘처럼 혼밥이 흔하지도 않았다. 고독하게 즐기는 저녁식사로부터 오는 어떤 감흥을 경험했다. 당시 월급으로 1백만원 남짓 받던 사회초년생 시절, 5만원이란 거액으로 누린 두 시간의 호사였지만 그 값을 결코 허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음식에 대한 좋은 기억은 또 다른 맛을 찾게 만든다. 매사에 우유부단한 성격이지만 음식에 있어서만큼은 맞지 않는 것은 탈탈 떨어져 나가고 좋았던 것은 기호와 취향으로 쌓여갔다. 피겨를 모으고 한정판 신발을 줄 서서 구매하듯 미식을 즐기는 것은 맛을 다발로 하나씩 엮어가는 수집의 과정이다. 음식에 대한 몰입과 집중은 애호가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라고 생각한다. 경험치가 취향의 레이어를 한층 두텁게 만든다.미디어가 부추기는 푸드 포르노그래피에 이끌려 특정 음식을 맛봤을지라도 한 개인의 미식 취향은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음식에 대한 개인의 취향이 ‘푸디즘’으로 오인되어 비판과 저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먹는 행위를 오직 배와 위장의 욕망으로만 치부하는 1차적인 접근법이라 생각한다. 먹는다는 것은 오감을 가동시키는 일이다. 음식의 형태를 눈으로 감지하고 재료의 향을 맡으며 치아로 질감을 느끼고 혀로 맛을 본다. 특히 대화가 없는 고요한 테이블에선 사각사각 씹는 소리와 위장으로 꿀꺽 넘어가는 진동이 더욱 가깝게 들려온다.음식을 향한 광신도적인 분위기가 먹지 않을 권리에 대한 외침을 일으켰음에 동의하지만 먹는 행위 자체의 의미와 즐거움까지 매도하는 것은 유감스럽다. 음식이 영혼을 건드리는 매개체든 그저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를 채우기 위한 에너지원이든 먹는 행위는 그들 각자의 취향이다. “취향은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금 상기한다. 포르노그래피처럼 묘사된 ‘먹방’의 한 장면을 따라잡기 위해 음식점 앞에 길게 줄을 서는 것조차도 한 개인의 기호이며 선택이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곧 당신이 아니다”는 안티 푸디즘에 이렇게 반기를 들고 싶다. 당신이 먹는 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