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에게 빚진 마음에 대하여
최승자를 보고, 들었던 시인과 편집자들이 시인에 얽힌 짧은 단상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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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1952년생, 시인
더 긴 말은 보탤 필요가 없는 이 시인의 시집은 2016년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끝으로 멈춰 있다. 그사이 나는, 당신은, 우리는, 그가 쓴 8편의 시집을 부단히도 들추어 보았다. 펼칠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어떤 문장들에 기대어 무언가를 토해내고 위로받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최승자를 만났다. 보고 들었다. 한 달 전 출간된 시인의 첫 시선집을 엮은 문학과지성사의 편집주간 이근혜, 시선집 작업에 참여한 시인 이제니, 그리고 2009년 최승자를 인터뷰했던 시인 이우성은 그런 사람들이다. 2009년 3월 경주에서, 2026년 5월 포항에서, 2026년 서울에서. 여기 세 필자가 담아온 사사로운 기억을 나란히 놓는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다음 여섯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최승자의 그사이 17년을 가만히 짐작할 뿐이다.
지금 여기 최승자
2009년 봄에 최승자 시인을 인터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한 잡지의 에디터였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1년 전이었고. 시를 공부했으니까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었던 건 당연하고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한 건, 편집장이 시켜서였다. 오히려 나는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최승자 시인을 인터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뭐랄까, 최승자는 그녀가 썼다는 시는 있으나, 정작 그 자신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 모두가 최승자를 알지만 최승자를 본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녀의 은둔에 대한 건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최승자의 시를 좋아하진 않았다. 그녀가 현실의 못생긴 부분을 너무나 아름답게 적었기 때문이다. 나는 못생긴 건 못생긴 건데, 그러니까 안 보고 싶은데, 최승자는 그저 한두 문장만으로 그 모습을 그려내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게 그녀만의 삶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라고 느끼게 했다. 내가 하얀색 랄프 로렌 셔츠를 입고, 커다란 루이 비통 트래블 백에 온갖 잡동사니를 넣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나는 새로운 세계에 가고 싶었다. 직장의 선배한테 내가 최승자 시인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너는 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따져 묻고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그 선배랑은 절교했다. 절교를 당했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아도 자주 읽었고 자주 울었다. 내가 시다운 시를 쓰지 못하고 시인다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최승자는 없대. 최승자를 본 사람이 없으니까. 이 말은 나에게 전설처럼 들렸다. 없다니. 그래서 편집장이 최승자 시인을 인터뷰하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없는 최승자를 찾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저기 묻고 또 물었으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가족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전화를 걸어서 설명을 드렸다. 직접 이야기를 해보라며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최승자 선생님이세요?”
“네.”
‘진짜? 설마, 진짜?’ 속으로 생각하며,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인은 “그래요”라고 말했다. 경주에 있으니 경주버스터미널에서 토요일 3시에 만나자고 하셨다. 거기 커피숍이 있다고. 전화를 끊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어떻게 최승자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거지? 그저 전화를 걸었을 뿐인데. 누구도 최승자 시인과 인터뷰를 하지 못했는데 나랑? 그리고 맥락 없이 경주라니?
사진가와 둘이 경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사진가가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안 오실지도 몰라요. 어쩌면 내가 환각에 빠졌던 거거나, 동명이인이랑 통화를 했다거나.”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다시 말했다. “터미널에 서서 멍하니 있는 걸 찍자,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보여주는 거야.” 이상한 디렉션이나 하는 내가 바보 같았다. 계속 멍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진가는 그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찍어야 할까요?”
3시가 되었다. 최승자 시인은 없었다. 사진가와 나는 두리번거렸다. 일부러 눈에 잘 띄도록 큰 동작을 하며 움직였다. 10분이 지났다. 20분이 지났다. 30분이 지났다. 혹시 우리가 못 알아본 걸까? 사진가가 말했고, 나는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최승자의 시를 너무 많이 읽어서, 그냥 나는 알 것만 같았다. 모를 리가 없어. 그리고 오고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야외 공간의 한쪽 끝에서 작고 묘한 점 하나가 보였다. 커졌다. 최승자였다. 나는 달려갔다.
“우리가 몇 시에 만나기로 했죠? 제가 그 시간을 잊었어요.”
“괜찮아요, 저도 방금 왔어요.”
창가 쪽에 앉았다. 버스가 나가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는 자리였으나, 지는 해가 내 눈을 정확하게 조준하고 있어서 잘 안 보였다. 눈앞의 최승자 시인도.
둘 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어떤 감정들, 등단하지 못한 문학청년의 회한이 몰려왔으나 무시했다. 긴장되고 떨렸으나 무시했다.
최승자는 시가 잘 나오고, 그걸 받아 적으니 시가 된다고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그녀의 안에서 살고 있는 언어 혹은 언어적 사고들이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어서,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시인으로 사는 삶이 그녀에겐 필연이었을 것이다.
“변화될 수 없는 사회도 있고, 변화될 수 없는 역사도 있고, 참 재미없지만, 세상도 구제불능이고 나도 구제불능이고, 그러다가 시가 나오면 썼어요. 구제불능인 세상을 앓고 살다 시집을 네댓 권 냈고, 언제부턴가, 이제 나한테서 시는 끝났다, 시에서 멀어져가는 세월이 있었어요. 나 많이 앓았어요. 홍역 앓듯 앓다가 두통 앓듯 앓다가, 감기 앓듯 앓다가, 점점점점 옅어지면서 잘 앓아지지도 않고, 또, 조금씩 옅어지는 농도라도 시가 다시 나오기 시작하니까, 쓰는 거예요. 시단과의 접촉이 있고, 원고 청탁도 있고, 그나마 그런 시도 즐겨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녀는 잠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고, 그 시간이 꽤 즐거웠다고도 했다. “하지만 어떤 학생들에겐 이렇게 말했어요. 이 장면 다음에 이 장면이 나오는 게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나는 이 장면 다음에 이어지지 않는 다음 장면이 나오는 시를 좋아해서 슬그머니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고 했다. 그때는 안심했는데, 그 모습이 몇 달 동안 떠올랐다. 번번이 울었는데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질문은 짧게 하고 답변은 길게 들었다.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었다. 다행히 그녀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오랫동안 질문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당시만 해도 커피숍에서 담배를 피울 수가 있었다. 연기 속에서 그녀가 흐릿해졌다. “사라지는 걸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요?” 사진가가 물어본 게 떠올랐다. ‘정말 사라져버리면 사진을 어떻게 찍지?’ 옆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던 사진가를 보며 작게 말했다. “여기서 그냥 찍어요.” 사진가는 5분 정도 셔터를 눌렀다. 지는 해의 결이 흩어지고 담배 연기가 그 사이로 퍼지며 최승자가 시처럼 있었다.
“이제 지쳐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최승자가 말했다. 가방을 들고 주저 없이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사인을 받아야 했을까? 손을 잡아드리거나,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야 했을까? 무엇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그녀가 자신의 힘을 온전히 나에게 이야기하는 데 쓰도록 하고 싶었다.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받아 적듯 걸어서 아까 나타난 길을 역순으로 돌아가면서 정말로 사라졌다.
“당신이 시인인 나를 불러서 왔다.” 그녀가 이 말을 했는지, 나 혼자 떠올린 문장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리고 두고두고 생각한다. 최승자 시인이 그날 그곳으로 인터뷰를 하러 나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연락도 쉽게 됐고, 바로 승낙하셨으니 어려운 건 없었다. 그녀를 없는 사람으로 만든 게 혹시 ‘우리’였을까? 나중에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여러 이유로 연락하기도 쉽지 않고, 인터뷰를 설득하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설사 만났다 하더라도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와서 사명감을 갖고 인터뷰 기사를 정리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주고받은 말들을 그대로 썼다. 호흡과 한숨, 막막함과 포기. 시인의 언어에 담긴 감정과 의지도 기록하고 싶었다. 나에게 주어진 한 시간을 시인 최승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하기 위해. 그 한 시간은, 그녀가 최선을 다해 말한 시간이었다. 그러려고 내가 시를 배운 것 같았다. 글/ 이우성(시인, 에디터)
2010년 서울에서 2026년 포항으로,
그날들 기억의 집
― 최승자 선생님께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지난 7월 23일, 시선집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재쇄 소식과 올가을 출간을 앞둔, 시집 <내 무덤 푸르고>의 덴마크어판 PDF 파일을 전하면서 들뜬 목소리로 선생님과 통화한 후 보름 남짓 지났습니다. 그날 포항은 한창 비가 오는 중이라 하셨어요. 선생님을 뵈러 갔던 5월 늦봄의 그날도 비가 왔었는데…. 선생님 시편 곳곳에 등장하는 빗속 “배고픈 구름장들” “무한 잿빛”(<쓸쓸해서 머나먼>)의 그 하늘인가 싶어 우산 너머로 흘깃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을 되새기면 여전히 “꿈인지 생시인지”(<물 위에 씌어진 3>) 싶고, 실은 5월 12일 아침, 포항행 기차에 올랐을 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찌감치 선생님께 선집 출간 동의를 얻었지만, 호기롭게 후배 여성 시인 아홉 명과 함께하는 판을 짜놓고 나서야 밀려든 막막함, 발행처와 판본마다 조금씩 다른 표기의 혼란스러움, 처음 시도해보는 한지 제작에다 6월 도서전 선공개에 맞춘 일정의 촉박함이 뒤범벅되어 하루하루 걱정과 초조함을 키워가던 4월의 복판. 쪼그라든 설렘만큼 불안감이 차오르던 그 무렵 어떻게든 선생님을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 ‘시인의 말’을 핑계로 대여섯 번 전화가 오갔는데 선생님은 그때마다 전처럼 전화나 메일, 혹은 팩스로 충분할 거라며 낭독도 촬영도 마다하셨어요. 인근 출장을 핑계 삼아 잠깐 인사만 드려도 좋겠다 거듭 청했고, 그럼 밥이나 먹자 하셔서 곧장 표를 예매했습니다. 포항역에 닿기 전 제 머릿속은 2010년 12월 28일, 광화문과 신촌역 사이를 오갔습니다. 그해 1월에 펴낸 여섯 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이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낭독 공감’ 행사가 있었지요. 행사 직후 옮겨 간 식당에서 선생님은 식사를 거의 하지 않으셨어요. 일행들과 헤어져 선생님과 저는 272번 버스를 타고 신촌역으로 향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익숙한 곳에 방을 잡아놓았다 하셨어요. 대현교회 인근 숙소 앞에서 선생님과 헤어져 돌아오던 깜깜한 밤, 마음도 발걸음도 무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정오를 지나 뵙기로 한 시장 앞 정류장은 붐볐습니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두리번대다 외숙부님을 먼저 알아보고 그 옆에 계신 자그마한 체구의 선생님을 발견했습니다. 오래전 짧고 검은 단발머리에 굵은 뿔테 안경의 모습과 달리, 새하얀 머리와 환한 혈색이 낯설고도 반가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지요. 예약한 식당으로 선생님과 나란히, 더러는 뒤에서 선생님의 구름 같은 흰머리를 쫓았습니다. 선생님 걸음이 의외로 빠르셨어요.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이의 익숙한 잰걸음. 미리 주문한 상차림을 두고도 실은 내내 선생님의 표정과 젓가락을 쫓느라 혀끝에 닿는 물회의 맛을 느낄 새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내드린 교정지와 시인의 말에 대해 여쭈었지요. 꽤 여러 번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신 눈치셨어요. 한 줄도 좋고, 쓰고 지운 그대로의 흔적도 좋으니 직접 쓰신 모두를 청했습니다. 내친김에 극구 마다하셨던 낭독도 떼를 써보았습니다. 머뭇거리시는 틈을 타 챙겨 온 <이 시대의 사랑> 초판본을 꺼냈습니다. 짧은 거 한 편이면 되겠죠? 하시고선 망설임 없이 ‘일찍이 나는’을 펼치셨어요. 좀 빠르다 싶었지만 그 순간 선생님의 호흡과 흐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간 앞에서 음성의 탄력이나 또렷함은 흐려졌을망정 행과 연 사이 완급은 온전히 선생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완벽한 몰입일 수밖에요. 그사이 바깥은 빗줄기가 거셌습니다. 매일같이 오가신다는 근처 성당으로 서둘러 자리를 옮겼습니다. 커피를 앞에 두고 선생님과 같은 속도로 교정지를 훑어 나가는 동안, 펜을 쥐고 시어를 고르거나 서명하시는 모습을 함께하는 그 시간이 그저 귀하고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결국 선생님 뜻에 부합하는 제목을 챙겨 갈 수 있어 기뻤습니다. 시선집 제목을 정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닿게 하는 느낌”이라고 말씀하셔서 크게 안도했지요. 선생님은 여전히 ‘시적으로’ 흐르는 삶 속에 계신다 느꼈습니다. “그래, 나는 용감하게,/ 또 꺾일지도 모를 그런 생각에 도달한다./ 시는 그나마 길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내가 닦아나가야 할 길이다./ 아니 길 닦기이다./ 내가 닦아나가 다른 길들과/ 만나야 할 길 닦기이다. 길을 만들며,/ 길의 흔적을 남기며,/ 이 길이 다른 누구의 길과 만나길 바라며,/ 이 길이 너무나 멀리/ 혼자 나가는 길이 아니길 바라며,/ 누군가 섭섭지 않을 만큼만/ 가까이 따라와주길 바라며.”(‘詩 혹은 길 닦기’ 전문, <기억의 집>, 1989) 다가오는 9월에는 대학로의 아르코소극장에서 시선집을 엮는 데 참여한 시인들이 함께 낭독하고, 10월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현장에서 덴마크·스웨덴 번역자, 편집자와 함께 선생님 시를 소개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지금은 어림없다 하시지만 앞으로의 시간도 “혼자 나가는 길이 아니길 바라며” 혹 그날 그 시간을 함께하실 수 있다면…. 저는 다시 꿈을 꾸는 중입니다. 글/ 이근혜(문학과지성사 편집주간)
텅 빈 가득함의 목소리
한 달 전쯤 최승자 시인이 자신의 시 ‘일찍이 나는’을 낭독하는 음원을 들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지난 5월 시인의 시선집을 엮으며 시인이 머물고 있는 포항의 죽도에서 담아온 시인의 목소리였다.
첫 문장을 듣자마자 눈물이 났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천천히 담담히 읽어 내려가다 제일 마지막 문장, “지나지 않는다”에서의 그 낮아지는 목소리. 마지막 문장을 마칠 때의 그 홀연히 사라지듯 홀가분하게 벗어나듯 마무리 짓는 가만하고 굳건한 음조.
수없이 읽은 문장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시였고, 처음 펼쳐 읽었을 때 마음에 새겨진 강렬한 무늬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나는 처음 읽은 문장처럼 그 시의 구절구절을 들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그 문장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까지 갔다가 돌아온 것인지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텅 비어 있었다. 슬픔을 비통을 애통을 고난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쓴 문장의 힘을 오래전에 버렸다는 듯이 가볍게 가볍게 너무 가벼워서 이미 날아가버린 듯한 어조로 읽었다. 어떤 대목에서는 미세하게 느려지기도 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어딘가 조금 어눌하기도 했다.
목소리에는 낭독이라는 행위를 완성하려는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시를 읽는 듯이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 오래전에 누군가 써 놓고 간 종이를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그 위에 적힌 문장들을 그저 한 줄씩 읽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왜 울컥 눈물이 쏟아졌을까.
그런데 나는 왜 그 목소리가 그토록 아프게도 쏟아진다고 느꼈을까.
젊은 날의 최승자는 어떻게 저런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살아가는 내내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는 존재들. 사랑받기를. 필요한 사람이기를. 알려진 이름을 가진 사람이기를. 자기 몫의 자리를 가진 사람이 되기를 무수히 바라는 마음들. 한 생애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긴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젊은 시인은 어찌하여 그 모든 노력보다 먼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놓여 있는 버려짐을, 가장 낮은 그 자리로 내려앉은 걸 바라본 것일까. 누구에게도 보증받을 수 없고 어떤 관계도 끝내 대신 살아줄 수 없는 한 인간의 고독을 어떻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그 문장들 속의 극단과 격렬함에 이끌렸다. 최승자의 초기 시에는 자신을 세계의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까지 밀어붙이는 혹독한 힘이 있다. 상처받은 자아를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슬픔을 순화하지도 않는다. 사랑과 고독과 죽음과 육체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넓어지다가 결국 소멸한다. 한 인간이 세계로부터 얼마나 철저히 그리고 처절히 밀려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서도 그 밀려남을 동정의 언어로 바꾸지 않는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이상할 만큼 곧고 단단하다. 나는 버려졌다. 그러므로 나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하는 대신 버려진 채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
아마 그것이 최승자의 시가 수많은 사람의 오늘을 견디게 한 힘이었을 것이다. 위로한다는 말 없이 위로하는 것.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 것. 삶에는 고유의 의미가 있다고 설득하지 않는 것. 가장 견딜 수 없는 감정을 그것 아닌 다른 이름으로 바꾸지 않는 것. 오히려 절망을 절망이라고 말하는 것. 고독을 고독이라고 끝까지 바라보며 불러주는 것. 그 정확성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시 안에서 기어이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하여 최승자의 시와 함께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시를 쓴 젊은 시인은 살아서 노년의 시인이 되었다. 그 시를 읽은 어린 시인은 살아서 시를 쓰는 한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생을 통과한다는 것은 자신이 겪은 그 모든 일을 자기 몸 안에 그대로 간직한 채로 여기까지 온다는 뜻이다. 사랑했던 날과 버림받았던 날. 시를 썼던 날과 시를 쓰지 못했던 날. 병들었던 시간과 그 깊고 오랜 병에서 다시 돌아온 시간. 시인이 스스로 밝힌 병의 시간으로부터. 그 모든 시간이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지나왔다고 말하는.
이 가득한 텅 빔의 목소리.
시인의 목소리에서 나는 시와 삶 사이의 예지적인 한 장면을 목격한 것만 같다. 젊은 시절 이미 자신의 전 생애를 회고하듯이 써 내려간 시인. 과거에 쓴 시가 미래를 향해 날아갔다가 수십 년 뒤 다시 시인에게로 돌아와 그의 입술 위에 얹힐 때. 한때 자신을 파괴할 듯 격렬했던 언어를 이제는 아무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듯 읽어 내려갈 때. 그러나 그것은 감정이 사라진 목소리가 아니라 너무 많은 감정을 지나온 뒤의 목소리라는 것을.
이 깊고 슬픈 텅 빔의 가득한 목소리.
한 시인의 목소리에는 닳고 지나가고 버리고 견딘 뒤에 남은 어떤 공간이 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쓴 문장의 주인이라는 자리에서조차 비켜난 채로 자신의 오래전 시를 바라보는 목소리가 흐르고 있는 곳. 나는 썼다. 나는 살았다. 그리고 이제 어떤 문장도 나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모든 지난한 날들을 지나온 어느 날 내가 쓴 문장 앞에 다시 앉았을 때 아무런 과장 없이 나 아닌 다른 모든 이의 문장을 읽듯이 내가 쓴 무엇을 읽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저 가볍게 가볍게 날아갈 듯 텅 빈 가득함으로 흐르기를 바라면서. 글/ 이제니(시인)
Credit
- 사진/ 안규림(2009), 문학과지성사(2026)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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