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디를 맡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로마로 돌아왔다!
그녀가 털어놓은 로마에 대한 애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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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자신의 미적 감각을 길러준 도시로 돌아왔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이 글은 이야기이자 대화고,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기록이기도 하다. 동시에 한 사람의 작업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탐구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Maria Grazia Chiuri)가 있다. 오늘날 패션이 놓인 환경 속에서 컬렉션을 만든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집요하게 질문해온 디자이너. 한때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패션은 이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쉽게 흔들리기도 한다. 그런 시대에 치우리는 무엇을 만들고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디올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녀는 이제 펜디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특유의 행동력과 적극적인 태도로 임하는 자리다. 창의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산 시스템과 오랜 헤리티지가 함께 얽혀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는 자리다. 그 비전 안에서 패션은 세상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하나의 도구이자 가능성을 현실로 빚어내는 예술이 된다.
그녀의 커리어를 따라가다 보면 패션 시스템이 얼마나 크게 달라졌는지 자연스레 마주하게 된다. 일하는 속도와 방식, 창의성을 대하는 태도, 메종 내부의 운영 구조까지 모든 것이 변화했다. 처음에는 전체 구성원이 역할을 가리지 않고 일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케팅, 바이어, 머천다이징 부서가 생겨났고, 한때 장인정신을 기반으로 운영되던 메종에는 복잡한 시장 논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이 세계에 들어섰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가 열린 셈이다.
자료와 메모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문득 한 장면이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 팬데믹 직후였던가, 혹은 그 이전이었나. 피렌체에서 치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던 날이었다. 그곳은 오래된 대형 호텔의 정원이었다. 어둑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의 문을 지나면 갑자기 정원이 펼쳐지는 그런 호텔이었다. 거리에는 석재로 마감한 건물들이 단정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날 자리에는 그녀의 딸이자 지금도 함께 일하고 있는 라켈레 레지니(Rachele Regini)도 있었다. 지금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엇보다 그날 나눈 이야기다. 나 역시 피렌체에서 공부하고 몇 년을 살았던 터라 치우리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이야기할 때면 내 기억도 자연스레 겹쳐졌다.
포로 로마노의 산티 루카 에 마르티나 성당.
Italian Designer
그녀는 학교를 갓 졸업했을 무렵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로마 IED(Isituto Europeano di Design) 종합디자인대학교에서 졸업 컬렉션을 선보였고, 그 쇼를 본 키아라 보니(Chiara Boni)가 그녀에게 일을 제안했다. 그렇게 치우리는 보니의 브랜드에서 첫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보니가 운영하던 레이블의 이름은 ‘유 타잔 미 제인(You Tarzan Me Jane)’이었다. 런던에서 본 페미니스트 공연의 제목에서 가져온 이름이었고, 대중에게 익숙한 영화 속 문장 ‘난 타잔, 넌 제인(Me Tarzan, You Jane)’을 뒤집은 것이기도 했다. 보니는 같은 이름의 매장도 운영했다. 로마의 비아 델 파리오네에 있던 가게였다. 오늘날 럭셔리 브랜드가 즐비한 패션 거리로 알려진 비아 토르나부오니와 가까운 곳이다. 당시엔 아직 오늘날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유 타잔 미 제인’은 꽤나 특별한 가게였다. 당시의 급진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탈의실은 따로 없었다. 대신 커다란 서커스 천막 하나가 있었고 손님들은 그 안에서 함께 옷을 입어봤다. 매장은 화려한 네온 조명으로 반짝였고 타잔을 모티프로 한 장식들이 다양하게 공간을 채웠다. 나 역시 그곳에서 치마 두 벌을 샀던 기억이 난다. 하나는 꽃무늬가 들어간 주황색 치마였고 다른 하나는 큼직한 도트 무늬 치마였다.
치우리는 자신의 첫 직장 경험을 떠올렸다. 그보다 앞선 경력이라고는 나폴리 근교의 한 구두 공장에서 잠시 일한 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늘 이탈리아 패션의 가치와 고유성을 들여다봐온 내게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가 모습을 갖춰가던 시절을 생생한 모험의 한 장면처럼 떠올리게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간 이야기, 꿈과 비전, 창작자와 스타 디자이너, 그 곁을 지킨 이들, 우연히 그 자리를 스쳐간 사람들. 그 모든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메이드 인 이탈리아’가 그만의 서사를 만들어가던 당시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탈리아의 사회·정치·문화적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리며 하나의 산업이자 세계적 현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었다.
치우리가 자신의 견습 시절을 이야기하는 동안 나 역시 그 시대의 풍경을 함께 만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시대에 기여했던 이들이다. 치우리에게 배운다는 것은 가만히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옷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거래처와 끊임없이 부딪혔다. 더 나은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전에 없던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치우리가 일을 시작하던 무렵에는 패션 생산 시스템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었다. 값비싼 소재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소재가 지닌 가능성과 한계를 끊임없이 실험하고, 새로운 가공법을 시도하며 그 한계를 밀어붙여야 했다. 창의성과 생산성이 팽팽하게 맞부딪히는 과정에서 동시대의 감각을 담은 옷이 탄생했다. 장인 기술과 혁신, 선진적인 산업 전략을 조화롭게 결합해온 나라로 이탈리아만큼 뛰어난 곳도 드물다. 지금도 치우리가 직접 기업과 공장을 찾아가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생산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지는지 직접 확인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컬렉션이나 옷, 액세서리를 디자인하는 일은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제스처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어서다. 형태와 소재, 기술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과정이 함께한다. 오랫동안 굳어진 관행에 의문을 던지고, 그 너머 또 다른 표현의 길을 열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치우리에게 이탈리아 패션 시스템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자신의 디자인적 뿌리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만든 것은 10년간 이어진 디올에서의 경험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창의성이 산업의 전문성과 장인정신의 경이로움과 만나는 생산 환경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그 안에서 옷은 결코 몸과 분리된 독립적 작품이 아니었다. 몸과 함께 완성되는 물건이었다. 다시 말해 가장 작은 건축이자 오두막이며, 피난처와도 같은 존재.
치우리는 액세서리에서 출발해 프레타포르테와 오트 쿠튀르까지 이어진 자신의 커리어가 패션계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길러줬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해왔다. 단지 창의적인 측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생산 과정과 메종의 운영 방식까지 함께 볼 수 있게 됐다고. 또한 그녀는 브랜드 창립자들과 가까이에서 일했던 경험이 무엇보다 소중했다고 강조했다. 혼자 만드는 것보다 함께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리고 결국 패션은 팀으로 완성되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카피톨리노 박물관의 동상.
Femininity/Feminism
디올 여성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것은 치우리에게 여성의 시선이 지니는 가치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 그녀는 창립자 크리스찬 디올이 세상을 떠난 이후 이브 생 로랑, 마르크 보앙, 지안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 라프 시몬스를 거쳐 이어져온 남성 디렉터 계보를 잇는 메종 최초의 여성 디렉터였다.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여성성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낀 이유다. 둘이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길 필요도 없었다. 치우리에게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데 영향을 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인 오리아나 팔라치의 글을 엮은 <Da Coco Chanel a Mary Quant l’impero della moda tra genio e follia>(리촐리, 2025) 서문에 이렇게 썼다. “어머니가 늘 내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공부와 일이 나의 해방과 독립에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였다. 이는 팔라치의 책과 르포, 인터뷰를 읽으며 얻은 영향이기도 했다.” 치우리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여성이다. 치우리는 자신이 자란 올지아타에서 작은 아틀리에를 운영한 어머니를 “아주 솜씨가 좋고 취향이 뛰어나며 성공한 재단사”라고 회상했다. 키아라 보니와 펜디 자매들도 있다. 특히 펜디 자매들은 치우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치우리의 여성 관련 가치관이 처음으로 분명한 형태를 갖춘 것은 디올에서였다. 그녀가 첫 컬렉션에서 선보인 흰색 티셔츠에는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당시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진영에서는 페미니스트이면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테드(TED) 강연과 이후 출간한 동명의 에세이로 잘 알려진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와 교류하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였어요. 그녀는 패션이라는 시스템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었지만, 탁월한 표현력을 지니고 있었고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도 유쾌했어요.”
캄피돌리오 광장.
Female Gaze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여성 사진가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보다 정확하고, 의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여성성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자신의 작업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여성 예술가들과 협업했는데, 그들은 때때로 치우리조차 예상치 못한 분위기와 감정을 끌어내곤 했다. 그동안 함께 작업한 사진가로는 알리크(Alique), 캐스 버드(Cass Bird), 사라 블레즈(Sarah Blais), 마리폴(Maripol), 로라 콜슨(Laura Coulson), 그라시엘라 이투르비데(Graciela Iturbide), 브리기테 니더마이어(Brigitte Niedermair), 사라 문(Sarah Moon), 크리스틴 리 물만(Kristin-Lee Moolman), 바니나 소렌티(Vanina Sorrenti), 낸 골딘(Nan Goldin), 코코 카피탄(Coco Capitán), 줄리아 헤타(Julia Hetta), 베티나 랭스(Bettina Rheims), 브리기테 라콩브(Brigitte Lacombe), 사라 와이스와(Sarah Waiswa), 파비올라 사모라(Fabiola Zamora), 조 앤 캘리스(Jo Ann Callis)가 있다.
이 협업의 핵심은 철학자 아드리아나 카바레로(Adriana Cavarero)가 1990년 저서 <Nonostante Platone. Figure femminili nella filosofia antica>에서 지적한 문제를 넘어서는 데 있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언어가 없고, 대신 타인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남성이 만들어낸 여성의 이미지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여성의 시선은 여성의 몸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성적 대상화된 모든 차원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신체로 변모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그 안의 관능을 두려움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악의나 복종, 숨겨진 의도는 없다. 그 이미지들은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여성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로, 그 자체가 진정성을 가진다. 피사체도, 옷도, 초점을 맞추는 눈도, 사진을 찍는 손도 그렇다. 이 사진들이 담아내는 여성성은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다. 서사를 담아낸 이미지에서든 스튜디오의 정제된 분위기 속에서 추상적으로 구현된 이미지에서든, 각각의 장면은 여성성을 하나의 존재 방식이자 행동, 퍼포먼스로 바라보는 동시에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차원을 조명한다.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들을 다시 바라보는 여성이다.
카푸친 수도회 지하 납골당.
Less Me, More Us
치우리가 펜디로 돌아와 2026 F/W 컬렉션을 선보이며 내놓은 선언은 바로 ‘나보다 우리’였다. 패션이라는 복잡한 시스템과 마주하는 하나의 분명한 태도이기도 하다. 함께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여기고, 책임을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개인의 개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창작의 모든 과정이 관계와 대화, 끊임없는 조율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보다 우리’라는 말은 치우리의 삶에서도 다음 단계에 해당한다. 그녀가 좋아하고 즐겨 읽었던 카를라 론치(Carla Lonzi)의 선언 “나는 나를 말한다(Io dico Io)”에 이어지는 말이다. 치우리는 2021년 로마 국립현대미술관(GNAMC)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가 디올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제 “나보다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남성이 주도해온 패션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낼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다. 동시에 자매애와 연대, 함께 짊어지는 책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일이다. 이는 치우리가 펜디에서 보낸 초창기 시절부터 이어져온 유산이다. 그녀가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 펜디에서는 ‘나’ 대신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파올라, 안나, 프랑카, 카를라, 알다 다섯 자매, 이른바 ‘숙녀들(le signore)’의 분명한 원칙이었다. 회사에서는 자연스럽고 지속적으로 협업이 이뤄졌고, 모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에서 탄생했다.
그때 치우리에게 패션이라는 일은 자연스레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이 됐다. 위계보다는 관계와 공동의 참여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일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자신의 창의성을 키운다고도 말했다. 그저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것만으로 패션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뜻이다. 치우리에 따르면 패션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포용적이고 다학제적인 대화일 수밖에 없다. 결국 ‘나보다 우리’는 하나의 비전이 실제 프로젝트로 이어지기 위해 필요한 태도인 셈이다. 협업의 정신은 옷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그 옷이 누군가의 삶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에 스며 있다. 치우리는 늘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일을 좋아했고, 특히 1980년대에 지배적이었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위적 거장 디자이너 이른바 ‘구루(guru)’형과 거리가 멀었다고 말했다. 치우리는 패션은 완성된 제품만 보여주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컬렉션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연구와 공부가 있었는지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옷은 더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기억과 사물, 개인적 경험이 서로 얽힌 이야기다. 마치 서로 다른 음악들이 하나의 플레이리스트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입는 옷이나 가족의 기억을 간직한 옷도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늘 그렇듯 팀과 함께 일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려운 순간에도 서로 의견을 나누고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된다. 동시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창작자로서 치우리는 오늘날 패션이 마주한 과제가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음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동시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옷장을 새로이 구상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상상력과 책임감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카푸친 수도회 지하 납골당.
Roma
치우리는 자신이 가장 살고 싶어한 도시 로마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 그녀는 도심의 폰타넬라 보르게제(Fontanella Borghese)에 본사가 있던 펜디로 출근하기 위해 매일 이 도시를 가로질러 다녔고, 이후에는 미냐넬리 광장(Piazza Mignanelli)의 발렌티노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은 에우르(EUR) 지구의 이탈리아 문명궁(Palazzo della Civiltà Italiana)에 자리한 펜디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집에서 그곳까지 가는 길은 매번 로마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여행이자 그녀의 삶을 되짚어보는 여정이 된다. 그녀는 길을 가면서 메종의 모피 공방을 자주 떠올리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실비아 자코모니(Silvia Giacomoni)의 <Italia della moda>(마초타, 1984)에서 읽은 한 문장이 문득 생각난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피, 펜디의 모피가 왜 하필 로마에서 탄생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를 디자인한 칼 라거펠트는 이렇게 답했다. ‘모피가 필요하지 않은 따뜻한 나라에서야말로 상상력의 모든 유희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치우리는 학생 시절 로마 국립근현대미술관(GNAMC)을 찾아다니며 예술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로마는 무엇보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도시다. 서로 다른 시대의 양식이 아무렇지 않게 한자리에 공존하고, 그 충돌과 조화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치우리는 지금도 무엇이든 받아들일 호기심으로 이 도시를 탐험한다. 그녀에게 로마로의 귀환은 삶과 커리어를 아우르는 여정의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아름다운 혼란(una bella confusione)’이라는 말로 집약되는데 이는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영화 <8½>의 제목으로 엔니오 플라이아노(Ennio Flaiano)가 제안했던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치우리에게 로마는 동시에 미미 페치 블룬트(Mimì Pecci Blunt) 백작부인과 정신적으로 조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1920~1950년대 유럽 문화계의 중심 인물이었던 그녀는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던 귀족이자 예술 후원가이며 컬렉터로 전위적 예술과 연극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문화 후원자였다. 그녀는 1958년 로마에 코메타 극장(Teatro della Cometa)을 세웠다. 퍼포먼스와 시각예술, 음악, 동시대의 실험적 시도가 서로 교차하는 문화 공간을 꿈꾸면서였다. 치우리는 수십 년 동안 문을 닫은 채 방치돼 있던 이 극장을 복원해 다시 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창의성과 장인정신, 실험과 공동체를 잇는 상징적 장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녀가 패션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현실과 허구가 뒤섞이는 이곳에서 치우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로마의 인물과 풍경, 이야기와 신화를 다시금 새롭게 엮는다. 체계적인 사고가 놓치기 쉬운 질문과 상상, 우연한 걸림돌을 받아들이면서, 더 넓은 비전을 창조하는 이들에게 늘 함께하는 시적 직관을 따라간다. 그렇게 서로 다른 존재들이 별자리처럼 이어지는 하나의 운명적 관계를 만들면서.
포로 로마노의 카스토르와 플룩스 신전.
이 화보에는 2025년 10월부터 펜디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를 맡고 있는 1964년생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그녀의 도시 로마가 담겼다. 포리 임페리알리, 포로 로마노의 산티 루카 에 마르티나 성당, 뼈를 이용한 예술적 장식으로 유명한 카푸친 수도회 지하 납골당, 캄피돌리오 광장과 그곳의 원로원 궁전, 나일강의 신상, 카피톨리노의 늑대상,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조각상 등이 등장한다. 1958년 미미 페치 블룬트가 설립한 코메타 극장도 그중 하나다. 현재는 치우리와 그녀의 딸 라켈레 레지니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으며, 두 사람은 2025년 이 극장을 다시 대중에게 개방했다.
이 글은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하나의 모범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시도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오랜 시간에 걸쳐 나눈 여러 차례의 대화와 다양한 자리에서의 만남, 이탈리아와 해외 언론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를 읽으며 얻은 생각들을 바탕으로 썼다. 여기에 이탈리아 패션의 장점과 한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연구를 더했다.
Credit
- 글/ Maria Luisa Frisa
- 번역/ 정송하
- 사진/ Anna Biolay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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