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아크리스의 100년을 수놓은 도시

스위스 장크트갈렌에서 시작된 아크리스의 역사. 하우스의 아틀리에와 포스터 로너를 따라가며 과거의 유산을 오늘의 창조로 이어가는 ‘자수’의 힘을 들여다봤다.

프로필 by 이진선 2026.08.26

CREATIVITY FROM EMBROIDERY


스위스 동부의 중심 도시, 장크트갈렌(St. Gallen)은 세계적인 자수 산업의 중심지이자 아크리스(Akris)의 100년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하우스의 심장과도 같은 아틀리에부터 주요 텍스타일 공급처인 포스터 로너를 돌아보며, 아크리스의 과거이자 현재, 또 미래인 ‘자수’에 주목하다.


정제된 테일러링의 스커트수트에 드라마틱한 프린지 장식 클러치 백을 매치한 2026 F/W 시즌 아크리스의 키 룩.

정제된 테일러링의 스커트수트에 드라마틱한 프린지 장식 클러치 백을 매치한 2026 F/W 시즌 아크리스의 키 룩.

취리히 공항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장크트갈렌. 아크리스의 100년 역사가 시작된 장소이자 세계적인 자수 산업의 중심지로 알려진 낯선 도시에 첫발을 내딛었다. 유유자적한 사람들과 구시가지의 아늑한 풍경 때문이었을까? 처음 온 곳이 분명한데도 마치 몇 번이고 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장크트갈렌은 ‘자수의 도시’라 불릴 만큼 중세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자수 유산을 자랑한다. 프레스 트립 중 방문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생갈수도원 도서관(Abbey Library of St. Gall), 직물박물관(Textile Museum) 자료에서 그 증거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공예 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리넨 소재는 ‘화이트 골드(white gold)’로 불리며 도시를 번영하게 만들었다고. 19세기 초 이곳에서 최초의 자수 기계가 개발되면서 저가의 영국산 면직물에 대항해 정교한 고품질의 기계 자수를 선보이는가 하면, 1910년에는 세계 자수 수요의 절반을 공급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제1차 세계대전과 1930년대 세계 경제위기로 잠시 위기를 맞았지만, 1945년 이후 회복해 오늘날 장크트갈렌 자수는 다시금 파리 오트 쿠튀르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 도시 투어에서도 화려했던 섬유 유산의 흔적을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트뢰크네투름(Tr..ockneturm, 직물 건조 탑), 한때 직물을 탈색하던 장소였음을 떠올리게 하는 ‘블라이헤(Bleiche, 탈색)’가 포함된 지명들, 스위스의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피필로티 리스트와 건축가 카를로스 마르티네스가 옛 표백 터 지역을 빨간색 우레탄 카펫으로 덮어 만든 공공미술 프로젝트 ‘블라이헬리(Bleicheli)’ 등. 장크트갈렌에서 섬유의 역사는 단순히 보존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아크리스의 창립자인 앨리스 크리믈러-쇼흐.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성 로렌츠 교회의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 지붕은 아크리스 컬렉션에도 영감을 주었다. 100년의 패브릭 역사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아틀리에의 아카이브 공간. 스케치 중인 알버트 크리믈러의 손.

그리고 그 무엇보다 1922년에 장크트갈렌에서 시작한 아크리스야말로 그 진화의 산증거나 다름없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크리스 컬렉션은 장크트갈렌 자수의 손길 없이 완성된 적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창립자인 앨리스 크리믈러-쇼흐(Alice Kriemler-Schoch)는 장크트갈렌 지역의 비할 데 없는 품질과 오랜 장인정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소재를 조달해 자수 앞치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의 헌신은 아크리스 아카이브의 토대가 되었으며 풍부한 색감과 자수 원단, 입체적인 패턴은 곧 아크리스를 정의하는 기반이 되었다. 또 아크리스에게 있어 이곳의 자수는 창조의 동력원이자 공통의 문화로 연결된다. 크리믈러 가문과 장크트갈렌 텍스타일 하우스 사이의 여러 세대에 걸친 관계는 신뢰의 기반이 되었고, 야코프 슐레퍼(Jakob Schlaepfer), 포스터 로너(Forster Rohner), 비쇼프 텍스틸(Bischoff Textil)과의 협업은 단순한 원단 소싱을 넘어 성장의 동반자로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버트 크리믈러(Albert Krimler)에게도 이 하우스들과의 작업은 필수적이다. 아크리스에 있어 자수는 결코 사후에 덧붙이는 요소이거나 단순한 장식이 아닌, 의상의 성격을 이루는 통합적이고 구조적인 요소이기에. 특히 알버트는 기하학적이고 건축적인 자수를 즐겨 사용하는데, 2026년 봄 컬렉션의 시그너처 사다리꼴 A 모티프부터 소우 후지모토(Sou Fujimoto)의 나오시마 파빌리온에서 영감을 받은 2016년 봄 컬렉션이 대표적인 예다. 이렇듯 자수는 드레이프, 볼륨, 촉감과 분리할 수 없는 구조적인 힘이 된다. 우리는 아크리스의 자수 주요 공급처인 포스터 로너를 방문해 장크트갈렌의 전통적인 자수 아카이브가 아크리스 컬렉션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공동 연구개발을 통해 자수가 도달할 수 있는 경계를 어떻게 확장해왔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2026 F/W Akris 2026 F/W Akris 2026 F/W 시즌 패브릭 중 하나. 아크리스의 뛰어난 텍스타일 기술이 돋보인다. 장크트갈렌의 탁월한 자수 기술이 돋보이는 텍스타일. 화려했던 섬유 유산의 증표. 직물박물관에 보관된 로고로 기하학적인 자수 패턴을 선보였다.

더 나아가 전통을 미래의 기술로 전환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2014년 가을 컬렉션에서는 포스터 로너와 함께 빛을 내는 LED 자수를 개발하는가 하면, 2009년 봄 컬렉션에서는 야코프 슐레퍼와 사진을 프린트한 시퀸을 선보였다. 여기에 전통적인 아플리케 기법과 레이저 커팅을 결합한 허니콤 자수에서 자수를 과거의 유산이 아닌 지속적인 발명의 영역으로 바라보는 아크리스의 혁신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할머니는 자수 앞치마를 만들며 이 하우스를 세웠고, 1940년대에 시작한 아카이브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창작 방식을 형성합니다. 자수는 향수의 제스처가 아니라 발명의 장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문화적 기억이죠. 역사는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자수는 언제나 다음을 향합니다.” 알버트의 말처럼, 아크리스 특유의 정제된 미니멀리즘에 조용하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자수. 트립이 끝날 때쯤엔 아크리스 컬렉션을 바라보는 내 관점도 사뭇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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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사진/ © Akris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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