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뉴욕이 개관전으로 이진한을 호명했다
6월 7일까지 갤러리현대 뉴욕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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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E TALK ABOUT LOVE
갤러리현대가 뉴욕 프로젝트 스페이스 개관전으로 이진한을 호명했다. 세상 속으로 뛰어든 어느 예술가가 표현하는 이채로운 삶의 면면. 말하자면, 사랑의 다른 이름들.

이진한, <머문 자리의 온기>, 2025, 리넨에 유채, 200x15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하퍼스 바자 겸재 정선의 한양이든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이든, 예술가를 둘러싼 장소성은 그의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당신은 2007년 런던으로 건너가 15년간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몇 년 전 영구 귀국했어요. 초기작에서 외로움의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진다면 이번 신작들은 이전에 비해 생동하는 자유가 엿보입니다.
이진한 영국 생활 초반에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작업의 원동력이었어요. 외국 관객이나 동료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생기는 단절,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슬픔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죠. 그렇게 무언가를 갖지 못했다는 채무감에서 작업이 출발했는데 살다 보니 그런 결핍도 조금씩 채워지더군요. 15년 중 마지막 3년은 영국 생활이 무척 편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 편안함 때문에 작업이 잘 풀리지 않더군요. 생활은 편하지만 작업은 불편한 아이러니였어요. 다시 0에서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중 팬데믹을 경험했고 결국 작업의 거점을 한국으로 옮기게 됐어요. 지금은 아주 편안합니다. 영국에서 살 때는 나에 대해, 내 작업에 대해 무언가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졌거든요. 덕분에 페인트라는 물질성과 지금까지 쌓아온 모티프가 화면 안에서 훨씬 더 자유롭게 변주되고 있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작업실 풍경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이진한 런던의 작업실은 꽤 고립된 위치에 있었어요. 지금처럼 탁 트인 공간을 얻을 여유도 없었고, 날씨나 주변 환경도 따르지 않았죠. 서울에 위치한 현재 작업실은 창밖으로 사람들이 북적이고,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리고 음식 냄새가 풍깁니다. 세상 안에 있다는 느낌이에요. 저는 작업이 세상 밖으로 스스로를 꺼내는 여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전엔 세상 속에서 제 모습을 찾기 어려웠고 그게 작업의 동력이 되었다면, 이제는 점점 세상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림도 그만큼 밝아지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어쩌면 미술 밖의 세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한 걸 수도 있고요.
이진한 예전엔 인간관계의 대부분이 미술계 사람들이었고 언제나 스스로를 새로운 곳, 진보적인 곳, 트렌디한 곳에 밀어 넣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학회나 해외 전시도 자주 다녔죠. 지금은 제 나이 또래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가, 그 희노애락의 정서가 더 궁금해요. 최근 저의 가장 비미술적인 행위라면…(웃음) 임진강 댑싸리공원에 가본 일이에요. 영국은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아서 단풍놀이나 벚꽃놀이를 즐길 일이 없었는데 한국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정취를 만끽하게 되더라고요. 식물원에서 어머님들처럼 꽃 사진도 찍었어요.(웃음)

«Whispers» 전시 전경,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하퍼스 바자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으며>는 물론 이승우의 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 테죠?
이진한 맞아요. 이승우 작가의 글은 거의 다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식물들의 사생활>을 정말 좋아해요.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으며>는 마치 그 소설의 한 장면을 꼭 움켜쥐듯 그린 그림이에요. ‘무조건적인 사랑’은 작업에서 언제나 불변의 주제죠.
하퍼스 바자 “사랑은 다 다르다, 하고 나는 나에게 말했다. 사랑한다는 내용은 같아도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방식은 하나도 같지 않다. 백 명의 사람들은 백 가지 방식으로 사랑한다. 그러니까 특별하지 않은 사랑은 하나도 없다.”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밑줄 그었던 문장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삶’으로 치환한다면, 이 문장은 당신의 작업에 대한 아포리즘으로도 읽혀요. 아까 얘기한 대로 당신은 다채로운 삶의 면면을 동력으로 언어 너머의 보편적인 소통을 모색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진한 그게 제 그림의 힘이길 바라요.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실패한 사랑이라고 규정하는 데 그쳤어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나서 다시 살펴보니 실패한 사랑이라는 건 세상의 잣대더라고요. 어쩌면 그들은 만나지 못하지만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는, 훨씬 깊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저 역시 사랑을 단정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랑의 뉘앙스를 전부 포용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말하자면 적어도 제 그림 안에서는 실패가 아름답게 비춰졌으면 해요. 이별이나 고난, 아픔 같은 삶의 부정적인 측이 재미있게 느껴지게끔 작업 안에서 전복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림은 저에게 그럴 수 있는 도구가 되어주니까요.
하퍼스 바자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가 있어요. 맨발과 꽃이 대표적이죠. 사적인 기억과 관련이 있나요?
이진한 방금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그랬듯, 사랑은 같아도 사랑을 말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잖아요. 연인 사이에 ‘넌 날 사랑하지 않아’, ‘아니야, 난 널 사랑한다니까’ 식의 싸움이 흔하듯요. 타인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때론 감정보다 감각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에서 자랐는데, 엄마가 늘 덧버선을 신었어요. 맨발은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발과 발은 침대 위의 연인이나 가족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만 맞닿을 수 있는 부위예요. 저는 발을 그리는 일이 사랑의 말들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어요. 다만 이전에는 심연에 빠진 발을 그렸다면 요즘은 사랑에 빠진 발을 그립니다. 형태는 점점 매끈하게 추상화되어 가고, 어쩌면 보는 이들은 더 이상 발의 형태를 알아차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발은 제 그림에 등장하는 모티프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대신 요즘은 꽃을 많이 그리고 있어요. “딸이라면 무릇 이래야 돼”가 분명한 집안에서, 그것도 언니와 동생 사이에 낀 차녀로 자라면서 저는 스스로를 시들시들한 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그리는 꽃들이 파스텔톤의 밝은 색보다는 대부분 빛바래거나 어두운 색을 띠는 이유도 거기서 기인했을 거예요.

적어도 제 그림 안에서는 실패가 아름답게 비춰졌으면 해요. 이별이나 고난, 아픔 같은 삶의 부정적인 측이 재미있게 느껴지게끔 작업 안에서 전복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림은 저에게 그럴 수 있는 도구가 되어주니까요.
하퍼스 바자 한편, 당신의 작업에는 동양과 서양의 분위기가 공존합니다.
이진한 어릴 때 그림을 그려도 무의식적으로 서예적인 붓질을 하곤 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와 오래 함께 살았던 영향일 거예요. 특히 할머니가 붓글씨를 좋아하셨거든요. 지금도 붓펜으로 자주 드로잉을 해요. 한편, 2019년 레지던시에서 VR 실험을 계기로 밀어내는 감각과 당겨 오는 감각을 새롭게 인식했달까요. 서양화가 보통 밀어내는 붓질이라면, 동양화는 당겨 오는 붓질이죠. VR 안에서 당길 때도 붓질이 살아나는 경험이 저에겐 서예의 감각을 일깨웠고 저만의 특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하퍼스 바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타인의 삶에 대한 포용이나 매끈한 발, 검붉은 꽃송이, 서예적인 드로잉, 사랑의 뉘앙스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종합적으로 하나의 화면에 구현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진한 예전에는 하나의 화면에 하나의 모티프만 담았다면 이제는 그들이 어떻게 한 화면 안에서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돼요. 과거엔 거울, 유리관, 프리즘 같은 장치를 화면에 꼭 사용했어요. 요즘은 여러 가지 요소가 이미 제 안에 반영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어요. 말도, 이미지도 직관적으로 흘러나와요.
하퍼스 바자 회화란 무엇인지, 왜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지를 스스로에게 늘 되묻는다죠. 요즘의 답은 무엇인가요?
이진한 “예술이 무언가를 초월한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는 알베르 카뮈의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으로 대신하고 싶어요. 저는 예술을 삶의 모든 요소 꼭대기에 두려는 태도가 예술가를 고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유별난 면을 세상 안에 섞이게 하는 행위로서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술은 고독한 향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괴로움과 기쁨의 유별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예술은 예술가가 고립된 존재가 되지 않도록 만듭니다. 가장 겸허하고도 보편적인 진실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흔한 경우로 자기가 남다른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에 예술가의 운명을 선택한 사람도 이내 자기가 모든 사람과 닮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예술에, 나아가서는 자기의 다름에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술가는 자기 자신과 남들 사이의 그 항구적인 왕래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불가결한 아름다움과 자기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공동체 사이의 중간 지점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예술과 작가의 역할> 중, 문학동네)
나는 인터뷰를 마치고 그녀가 에어드랍으로 보내준 카뮈의 연설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삶과 예술 그 사이에 작가가 있었다. 이진한도 그랬다.
※ «Whispers»는 6월 7일까지 갤러리현대 뉴욕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열린다.
Credit
- 사진/ 이우정
- 헤어 & 메이크업/ 장하준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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