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뮤익 전시, 왜 화제일까?
미술 관계자 5인에게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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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뮤익을 보는 다섯 가지 시선
현대 조각의 거장 론 뮤익의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을 둘러싸고 다섯 명의 관객이 보내온 다섯 개의 감상.

론 뮤익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유령>. 소녀의 신체적 특징은 그녀가 실존하는 인물일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사춘기 소녀가 변화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느끼는 어색함과 수줍음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조용한 세계
“카텔란 전시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아?” «론 뮤익»을 함께 본 지인이 내게 물었다. 흥미로운 건, 개막 하루 전 열린 언론 공개회에서도 누군가가 카텔란을 언급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확증편향의 오류에 자주 휘둘리는 편이므로, 지금껏 같은 범주에 둔 적 없었던 두 예술가가 두 번이나 비교 선상에 오른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실상이 어떻든, 이번 전시가 2023년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WE»와 중첩된다는 건 일반 관객에게 이만한 관심을 끌었던 현대 조각가의 국내 전시가 드물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현대조각의 문법을 새롭게 창조한 작가들이지만, 그 접근 방식과 미적 전략은 극명하게 갈린다. 카텔란이 실물 크기의 조각을 장소특정적으로 설치하는 반면, 뮤익은 작품의 크기를 극단적으로 키우거나 줄인다. 카텔란이 개념을 중시하는 작가로 제작은 외주에 맡기는 반면, 뮤익은 하나의 작품에 수개월에서 수년의 시간을 쏟아부으며 그야말로 한땀 한땀 손으로 작업한다.(때로는 그 행위가 수행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카텔란이 권력, 종교, 정치, 그리고 예술 세계를 냉소적이고 도발적으로 다룬다면, 뮤익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생애의 순간을 조용히 제시한다.(쓰러진 교황과 죽은 아버지가 적절한 예일까?) 말하자면, 카텔란의 조각 앞에서는 ‘깔깔깔’ 하고 누군가의 시니컬한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데, 뮤익의 조각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적막뿐이다.
뮤익은 미술학자 저스틴 페이턴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조각에 대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 느낌을 상상해보려는 시도”라고 설명한 바 있다. 앞서 언급했듯, 뮤익의 주제는 종종 일상생활에서의 친구, 가족,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 가 닿는다. 타인을 향한 시선을 단순한 관찰이 아닌 공감의 영역으로 확장하기 위해 그가 취한 방법론은, 살짝 움츠러든 어깨의 모양(<유령>)이나 주먹을 반쯤 움켜쥔 정도(<치킨/맨>) 혹은 누군가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방식(<젊은 연인>) 같은 미시 세계를 응시하는 것이다. 청소년기의 어색함, 노인의 취약함, 사랑하는 사이에 주고 받는 은밀한 신체 언어…. 나는 뮤익의 세계에서 감각할 수 있는 그 미묘한 일렁임이 좋다. 조용한 순간에서만 비로소 드러나는.
손안나(<바자> 피처 디렉터, <바자 아트> 편집장)

<치킨/ 맨>은 가구 배치부터 남성의 신체와 자세, 집중된 시선, 그리고 닭의 경계하는 눈빛과 자세까지 모든 부분이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관객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세계로 끌려 들어가 이 개연성 없는 심리적 대결의 이유를 추측하게 된다.
그건 당신의 오해다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크다. 역설적으로 론 뮤익의 작품이 가장 커 보이는 건 직접 마주했을 때보다 휴대전화 화면을 통해서 볼 때다. 휴대전화의 초광각 렌즈가 인간의 눈보다 더 넓은 시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작품은 생각보다 작다. 론 뮤익의 작품이 항상 현실보다 크기가 더 큰 건 아니다. 이번 전시는 이런 역설로 가득하다. 새하얀 벽을 배경으로 놓인 뮤익의 작품들을 차례로 마주치다 보면, 크기의 왜곡으로 인식이 교란된다.
뮤익의 작품을 보고 떠오르는 단어는 ‘하이퍼리얼리즘’이다. 피부의 주름, 모공, 핏줄까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보이는 정교한 표현 때문이다. 마치 현실감에 과속 페달을 밟은 듯, 맨눈으로는 놓치기 십상인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심지어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산업용 실리콘과 레진으로 만든 표면은 살갗의 투명함이나 질감까지 그려낸다. 신체 부위를 석고 틀에 굳혀 확대한 게 아니라, 실제로 피부를 씌우듯 레진과 실리콘으로 빚어낸 구조다. 그러니 ‘하이퍼리얼’이라는 꼬리를 붙이고 싶다면, 그건 당신의 오해다. 뮤익의 작품은 현실을 증폭해서 더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게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정교하게 표면을 처리해서 외려 비현실적인 감각을 구현하는 역설에 가깝다. 모공, 주름, 핏줄까지 재현된 형상들이 정말로 ‘현실적’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뮤익을 간접체험 한 적이 있다. 뮤익을 모르는 사람도, 그의 미학을 한번쯤 겪었을지도 모른다. 2022년, 향 브랜드 탬버린즈가 한 팝업 전시에서 선보인 거대한 조각상이 그것이다. 머리를 민 남자가 옷을 벗고 고개를 숙인 채 웅크리고 있었는데, 이 ‘거인’은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뮤익의 인물 형상들보다 더 크고 높은 5미터 규모를 자랑했다. 뮤익의 1999년작 <Boy>가 쪼그려 앉은 채 고개를 빼꼼 돌린 소년의 모습을 묘사한 5미터 높이의 작품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진짜 뮤익을 보기도 전에 ‘영감을 받은’ 버전을 먼저 만난 셈이랄까.
이번 전시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여러 작품을 한 번에 만날 기회가 이제야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미술관은 대체로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고, 론 뮤익 역시 무척이나 느린 작가다. 미술가 데뷔 후 30여 년 동안 그가 선보인 작품은 48점에 불과하다. 그러니, 뮤익의 작품을 이렇게 만날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거나 적어도 당분간은 올 수 없을 테다.
박재용(큐레이터)

<어두운 장소>는 론 뮤익의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관객이 작품과 거리를 두도록 유도한다. 관객은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세부를 자세히 살피기보다는 감정적 표현에 집중할 수 있다.
예술과 브랜드의 상관관계
론 뮤익의 국제적 위상 뒤에는 프랑스 까르띠에 현대미술 재단과의 끈질긴 협업이 자리한다. 까르띠에 재단은 2005년 뮤익을 처음 소개한 이래로 지금까지 지속적인 교류와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전시가 “2005년부터 이어져온 뮤익과 프랑스 기관 간 끊임없는 교류의 새로운 이정표”로 소개될 만큼, 뮤익 커리어에 있어 재단의 역할은 지대하다. 실제 전시 내용도 재단의 기획 의도가 반영되었다. 작가의 여러 시기 대표작 가운데 거대한 해골 설치작 <매스>를 중심에 세우고 창작 과정을 담은 사진과 영상 아카이브까지 아울러 선보이는 구성을 택한 건, 관람객에게 뮤익 예술의 겉과 속, 작품과 제작 과정을 한데 경험시키려는 재단 측 큐레이토리얼 전략으로 보인다. 실제로 뮤익은 2005, 2013, 2023년 까르띠에 재단 개인전을 가졌는데 매번 그의 작업 세계를 풍부하게 조명했다는 긍정 평가와 더불어 레퍼토리의 한정성을 지적받기도 했다. 거대 스케일의 설치와 극사실 기법은 초창기엔 혁신적으로 다가왔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식처럼 반복되어 관객에게 익숙한 충격으로 소비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뮤익의 <매스>는 분명 죽음과 유한성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이지만, 해골 더미 자체가 홍보용 아이콘이 되어 관객을 끌어모으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과 뮤익의 협업은 동시대 미술에서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의 경계, 창작과 소비의 균형에 대해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은 1980년대 설립 이래 기업 메세나의 길을 열었고, 이를 통해 신진 예술가와 기성 예술가 모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시도를 지속하며 까르띠에라는 이름을 순수예술의 맥락에 녹여내고 있다. 럭셔리 브랜드는 예술 후원을 통해 고급스러움과 창의성이라는 이미지를 획득하고, 이를 소비자에게 문화적 위상으로 어필해온 것이다. 브랜드의 예술 후원이 가져온 순기능은 분명하다. 많은 예술가가 안정적인 지원 속에서 창작을 지속할 수 있었고, 대중은 기업 후원을 통해 수준 높은 전시를 저렴한 비용으로 접할 기회를 얻었다. 까르띠에 재단 또한 세계 각지 순회전을 통해 다양한 문화권 관객에게 예술을 소개하며 공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상업의 밀착은 언제나 비판적 시선 아래 검토되어야 한다. 예술의 자율성과 공공 영역의 순수성이 지켜져야 할 가치임을 확인하기 위한 견제 장치로서.
최인선(아트 디렉터)

<침대에서>는 누워 있는 인물과 함께 이부자리와 베개까지 포함한 대형 조각이다. 관객은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그녀는 마치 우리가 보이지 않는 듯 다른 곳을 바라본다. <바자>가 촬영한 이 사진 속에선 마치 그녀가 등을 뒤로 젖힌 채 알 수 없는 작업의 무게를 짊어지고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딛고 서 있는 <나뭇가지를 든 여인>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어느 내향인의 실존적 질문
론 뮤익의 작품 속 인물들은 관람객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MBTI로 표현하자면, 모두가 내향형(I)이다. 이들은 자신을 향한 질문을 불편해하며, 타인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한결같이 내면에 집중한 상태를 보여준다.
침대에 누워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괸 여자는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침대에서>). 보트의 뱃머리에 앉아 있는 나체의 남자는 불안한 감정 속에서도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배에 탄 남자>). 기다란 소녀는 시선을 대각선 아래로 고정한 채 불편함의 원인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보려 하는 듯하다(<유령>). 테이블 반대편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남자와 닭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타인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고(<치킨/맨>), 젊은 남녀는 은밀한 갈등에 몰두해 서로의 시선을 비켜간다(<젊은 연인>). 심지어 전시장 입구에는 깊은 잠에 빠진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마스크 II>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론 뮤익의 인물들은 기념비적이거나 웅변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시선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며 주로 체념, 불편함, 그리고 피곤함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으로 보이며, 이 지점에서 작가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론 뮤익은 1997년 런던 왕립예술원에서 열린 «센세이션» 전시로 처음 주목받았다. 이 전시에서 그는 마크 퀸의 피로 만든 자화상과 트레이시 에민의 성관계 명단이 적힌 텐트 작품 사이에서 <죽은 아버지>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뮤익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당시 영국 미술계에서는 “죽은 아빠를 보셨나요?”라는 질문이 인사처럼 쓰일 정도로 큰 화제를 모았다. 그렇게 주목받게 된 뮤익은 의도적으로 현대미술계의 아웃사이더로 남기를 선택했다. 그는 전시 오프닝에 거의 참석하지 않으며, 인터뷰도 드물게 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도 극히 적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바라볼수록 그가 더욱 궁금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의 6전시실 마지막 방에서는 관객이 비로소 론 뮤익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시각예술가 고티에 드블롱드가 감독한 40여 분짜리 영화 <스틸 라이트: 작업하는 론 뮤익>은 그의 작업 과정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18개월 동안 촬영된 이 영화는 런던 북부의 스튜디오에서 그의 일상과 작업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뮤익과 그의 팀은 마지막 단계에서 합체될 인체의 각 부분을 떠안은 채 붓으로 살점의 색감을 조정하고 머리카락을 심는 작업에 몰두하며 하루를 보낸다. 때때로 TV를 흘끗 보면서 웃음을 짓기도 하고, 작업실 앞의 캠핑카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은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 모든 장면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초월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론 뮤익은 아티스트로서 ‘작업을 한다’는 본질을 추구하며,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직면하게 만든다.
안동선(미술 전문 기자)

각각 높이 1.2m에 달하는 거대한 두개골 100개로 이뤄진 작품 <매스>가 층고 14m의 전시장 벽면에 쏟아질 듯 쌓여 있다. 론 뮤익은 <매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네 줄짜리 메모를 남겼다. “특별한 모양이나 배열이 없는 많은 양 / 운집하다 / 물체의 질량 / 미사”.
친밀한 해골들
론 뮤익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도와다시현대미술관을 방문했을 때였다. 니시자와 류에가 설계한 미술관의 한 공간을 마치 파수꾼처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중년 부인 <스탠딩 우먼>과 만났다. 만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거인족처럼 엄청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이 나왔다. 생소하되 강렬했다. 좀처럼 잊히지 않는 얼굴과 체형. 한마디로 위화감 그 자체였다. 한참 지나 미술관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고, 재회하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에 휩싸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친밀함이었다. 마치 진공 상태처럼 고요한 공간에서 잠시 그를 바라보며 1대1로 머물렀다. 여전히 초연한 존재와 시선을 교환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보는 눈에 자연스럽게 내적 친밀감이 깃들었다. 2017년 국내에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의 ‘하이라이트’ 전이 열리고 <침대에서>가 전시되었을 때 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침대에 누운 채 손을 괴고 있는 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찾고 싶은 것은 의미나 메시지가 아니라 위화감이 친밀함으로 바뀌는 변화, 그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의 감정을 변화시킨 힘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여러 번 작품을 보러 가기도 했다. 론 뮤익 개인전에 <침대에서>가 포함돼 8년 만의 만남을 가졌다. 오랜만에 침대의 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언캐니 밸리가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매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벤트를 보기 위해 수차례 방문했다가 복도에서 입장을 준비하거나 전시실에서 오손도손 쌓여가는 해골들을 몰래 지켜봤다. 장소특정적 작품 <매스>가 설치되는 과정을 슬쩍 점검한 셈이다. 기다림 끝에 드디어 전시 오프닝에서 해골과 정식으로 소통하게 되었지만 세간의 평가대로 죽음을 상기시키는 메멘토 모리가 아니었다. 그런 섬뜩함이나 번뇌가 아니었다. 사전 교감 탓에 해골은 훨씬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인식됐다. 이들은 분명 전시장의 높은 창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형태로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해골들은 역으로 몸소 징검다리를 만드는, 아니 야곱의 사다리를 구현하는 존재로 나아가고 있다. 지하에서 숨 쉬고 있던 해골들은 봄바람을 즐기러 지상으로 탈출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내 망막에 포착된 해골들은 이미 위화감에서 벗어나 친밀함으로 향하고 있다. 해골들이 불러일으킨 감성과 감각이 관람객 각자의 무의식과 만나 이야기를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100개의 해골들, 100개의 감각들. 앞으로 여름이 올 때가지 해골들을 확인하러 틈만 나면 돌아올 것이다.
전종혁(<바자 아트> 컨트리뷰팅 에디터)
※ «론 뮤익»은 7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Credit
- 사진/ 오준섭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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