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위그 단독 인터뷰, 리움 미술관 특별전을 앞두고 작가와 나눈 대화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작가 피에르 위그와 바자가 단독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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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HOST OF YOU
지금 당신이 만날 수 있는 가장 기이한 세계. 리움미술관에서 피에르 위그의 개인전 «리미널»이 열리고 있다.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린다는 작가와의 인터뷰.

«피에르 위그: 리미널» 전시 전경. <캄브리아기 대폭발 16>, 2018, 수조, 투구게, 화살게, 아네모네, 모래, 바위. 피에르 위그가 작품 앞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
류츠신의 SF 소설 <삼체>에서 외계 생명체인 ‘삼체’는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꽤 신선한 전략을 취한다. 너희는 벌레다. TV, 휴대폰, 광고판 등 현대인의 시선이 고정되는 모든 종류의 스크린에 띄워진 이 간명한 메시지로 인해 인류는 대혼란에 휩싸인다. 피에르 위그의 개인전 «리미널» 전시장을 나서며 문득 반문하고 싶었다. 우리는 벌레다. 이것은 과연 멸칭인가?
오늘날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우리는 왜 비현실적인 것에 주목해야 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저서 <행간>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오래된 우화를 들려준다. 일찍이 라이프니츠가 <신지학>에서 언급한 거대한 피라미드 이야기이다. 정상은 찬란히 빛나는 반면, 기초는 심연을 향해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이 피라미드 안에는 ‘운명의 궁전’이라 불리는 무수히 많은 방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방은 ‘가능성’이다. 하나의 방에 가능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의 세계가 상응하는 셈이다. 방문을 열어젖히면 “한 번의 시선으로,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바라보듯” 가능한 운명들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피에르 위그의 개인전 «리미널»을 보고 ‘운명의 궁전’을 떠올린 것이 단순히 의식의 흐름 탓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무엇이 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에 관심이 있다”고 말해온 작가의 예술 세계 안에서 내가 경험한 것 또한 그런 종류의 사고 확장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회화, 조각, 퍼포먼스를 창작하고 그것을 관람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무언가가 내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을 원합니다. 그건 마치 아침에 일어나서 방 안에 토끼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경험일 테죠. 그리고 그 순간, 관계는 달라질 겁니다. 더 이상 저와 무관한 존재가 될 테니까요. 어쩌면 인간이 진정으로 하고 있는 건 새로운 종을 창조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전시 제목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한다. 누군가 나에게 이 사변적인 세계의 방문을 기꺼이 열어젖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방 안에 가득 차 있는 토끼를 만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면, 아감벤의 글을 인용해 대신하고 싶다.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드는 사람만이 가장 원대한 현실을 창조해낼 것이다.”

<리미널>, 2024~현재, 실시간 시뮬레이션, 사운드, 센서.
하퍼스 바자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 당신의 전시를 보고 그야말로 온 몸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암흑 속에서 다른 감각기관에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로 전시를 감상했기 때문일 겁니다. 덕분에 그곳이 베니스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죠. 다른 전시들이 베니스라는 도시의 맥락 안에 놓였다면, 당신의 전시는 달랐습니다. 당신은 의도적으로 그 공간의 사회문화적 단서를 지웠어요. 어떤 이유였습니까?
피에르 위그 나름의 규칙이 있는 어떤 세계를 창조해서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공간이 매우 어두워서 물리적인 환경을 파악하기 어렵고, 건축물의 형태도 알기 힘들었을 거예요. 저는 각각의 작품, 즉 존재감 있는 창조물(creature)만 남겨두고, 작품과 작품이 서로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것들이 현실의 평면이 아니라 보다 형이상학적인 관계로 존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현실을 지워야 했죠. 그게 베니스일지라도 말입니다.
하퍼스 바자 당신의 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이므로 리움에서의 전시는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피에르 위그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이 주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전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푼타의 경우 공간이 방처럼 나뉘어 있어 미로 같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면, 리움의 전시는 일종의 사이클입니다. 위층에서 <리미널>을 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아래층<카마타>를 보고 다시 올라가는 식으로 순환하죠. 사운드는 그것들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어요. 전시를 관람하는 내내 곳곳에서 사운드가 끝없이 이어질 겁니다.

<주드람 4>, 2011, 수족관, 화살게, 소라게,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든 뮤즈>(1910)를 바탕으로 수지로 제작한 소라 껍데기.
하퍼스 바자 순환하는 전시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푼타에서 전시 초반에 만난 <리미널>이 마치 태초의 인류 같았다면 후반부의 <카마타>는 그렇게 잠깐 파닥이고 뼛조각이 된 필멸자를 위한 추모 같아 수미상관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리움에서의 전시는 두 작품이 ‘운명의 계단’을 타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처음으로 돌아가면, 사방이 어둡기 때문에 특히 소리는 심연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마치 최면술사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처럼요. 예를 들어, 두 개의 수조가 놓인 방에서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아주 세심한 연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르한 파묵은 “미술이란 시각을 만족시키기보다 모든 감각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피에르 위그 동의합니다. 미술은 총체적이고 공감각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카셀의 도큐멘타 13에서 티노 세갈은 <This Variation>이라는 작품을 선보인 적 있어요. 어떤 방이 있었는데 아주 어두워서 관람객은 그곳에 들어서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많은 배우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고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작업은 정말 아름다웠는데, 티노 세갈은 눈을 감아도 몸의 감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거예요.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저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소리가 가장 그렇습니다. 저는 온도, 냄새, 소리 등 시각을 넘어서는 다양한 감각을 다각도로 느낄 수 있는 작업을 여러 해 동안 시도해왔습니다. 인체와 같은 온도를 유지하여 따뜻함을 발산하는 조각(<In Border Deep>)을 실험하기도 했죠.
하퍼스 바자 <오프스프링>에서 흘러나오는 곡이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라는 점은 다소 의아합니다. 너무 유명한 곡이니까요.
피에르 위그 시작은 2002년 작업 <Untitled(Light Box)>였어요. 저는 에릭 사티 음악의 표현주의적 접근 방식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티는 앰비언트 음악의 선구자 브라이언 이노의 작품에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죠. 아무튼 그 시대는 앰비언트 음악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명확한 시작과 끝이 없고, 내러티브가 적으며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었죠. <Untitled(Light Box)>는 빛과 연기의 움직임이 ‘짐노페디’ 3번, 4번과 어우러진 종합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오프스프링>은 다릅니다. <오프스프링>은 생성형 작업입니다. AI에 ‘짐노페디’의 모든 곡을 입력하면 신경망이 사티가 실제로 작곡한 적이 없는 새로운 곡을 생성합니다. 여기에 다른 유형의 사운드가 겹쳐져 점차 원래의 아날로그 피아노에서 벗어나 전자 음악으로 진화하는 것 같죠. ‘오프스프링’이라는 말은 ‘다음 세대’ 또는 ‘후손’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보면 에릭 사티 음악의 다음 세대를 창조하는 느낌이 듭니다. 사티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여전히 ‘짐노페디’의 유령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프스프링>, 2018, 라이트박스, 빛, 안개, 사운드 시스템, 향.
하퍼스 바자 어떤 음악으로 변주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요.
피에르 위그 알 수 없어요. 그저 그 순간에 일어날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클래식 콘서트에서는 가수가 연주할 곡을 이미 알고 있고 조명도 그에 맞춰 설계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떤 음악이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고 그 불확실성에 맞춰 조명을 동기화해야 하죠. 저는 그런 불확실성을 작업에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게 가장 흥미롭습니다.
하퍼스 바자 AI는 <오프스프링>뿐만 아니라 작업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리미널>의 얼굴 없는 여성은 관람객의 움직임에서 자극을 포착하고, 이에 반응하며, 실시간으로 기억을 쌓아갑니다. 보테가 베네타의 검은 의상을 입은 <이디엄(Idiom)>들이 착용한 헬멧은 관람객의 움직임, 질량, 목소리 등에서 수집한 감각을 새로운 언어로 변환하고요. <카마타> 역시 관람객의 자극에 따라 지속적으로 자체 편집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AI가 전시장의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작동 방식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죠. 관람객이 세부적인 기술보다는 경험에 집중하길 바라기 때문일 텐데요. 그렇다면 관람객에게 AI는 ‘믿음의 영역’인 건가요?
피에르 위그 저는 사실성에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관심 있는 것은 실체 없는 실체의 가능성이죠. AI는 단지 하나의 도구일 뿐이에요. 저는 AI에 대해 어떤 환상이나 꿈을 품고 있지 않아요. 내일이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저는 그저 AI가 작동하도록 열심히 작업할 뿐입니다. 푼타에서도 AI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작업을 했을 뿐이고, 어떤 때는 잘 작동했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과정 자체에 흥미를 느껴요. 이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 테니까요.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어왔어요. ‘인간 예외주의’라고 하죠. 이 개념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 기존의 인식을 제거하거나 흔드는 일이 제 관심사입니다.

<휴먼 마스크>, 2014, 영상, 컬러, 사운드, 19분.
하퍼스 바자 조건을 투입하고 시간을 들여서 모든 게 우연으로 돌아가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당신의 일이라면 예측불허를 견디는 과정 또한 필요조건으로 따라붙을 텐데요. 기꺼이 불확실성에 연루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피에르 위그 저는 고정된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아요. 저에겐 그게 더 힘든 일이죠. 저는 사물이 스스로 생명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가 되어 그 대상을 지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찾아다니게 된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어느 날 전시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이 열리면 영화가 시작되는 등의 단순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사실 그 프로그램도 결국 예측이 가능하니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창조물을 만드는 것이죠. 창작물(creation)과 창조물(creature)은 다릅니다. 창작물이 완성된 결과물이라면 창조물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저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진화하고 발전하는, 어쩌면 언젠가는 스스로 주체성을 갖게 될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습니다. 창조라는 단어조차 너무 가식적인 느낌이 드는군요. 저는 그런 존재를 창조, 아니 허용하려고 합니다. 언젠가는 그들 스스로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거예요. 단순히 회화, 조각, 퍼포먼스를 만들고 그것을 관람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무언가가 내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을 원합니다. 그건 마치 아침에 일어나서 방 안에 토끼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경험일 테죠. 그리고 그 순간, 관계는 달라질 겁니다. 더 이상 저와 무관한 존재가 될 테니까요. 어쩌면 인간이 진정으로 하고 있는 건 새로운 종을 창조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하퍼스 바자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 작업이 불투명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복잡성을 긍정합니다. 저는 위험을 감수하는 편을 택해요. 그렇지 않으면 미술계의 ‘닐슨 시청률’ 같은 것을 따라가게 될 테니까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인터뷰에서 대중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죠. 예상컨대 이번 전시는 한국에 사는 일반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을 것입니다.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다양한 관람객이 여기에 모일 거예요. 이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피에르 위그 이건 ‘대상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대한 문제예요. 저는 가끔 어떤 것들이 너무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그걸 좋아할 것이다 같은 식으로요. TV는 이렇고, 틱톡은 저렇고. 모든 것이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죠. 하지만 저는 관객을 미리 상정하는 타게팅 개념을 뒤집고 싶습니다. 대신, 작품 속 존재들 자체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저는 가능한 한 그것들을 ‘당신을 위해’ 만들지 않으려 해요. 그것들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들을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당신이 그것들을 박물관에서 보든, 숲속에서 보든, 그건 '만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도 단순한 관람객이 아니라 목격자가 될 것입니다.

«피에르 위그: 리미널» 전시 전경. <리미널(Liminal)>, 2024~현재, 실시간 시뮬레이션, 사운드, 센서.
하퍼스 바자 어떤 종류의 목격자인지도 궁금하군요. 저는 <주드람> 시리즈나 <주기적 딜레마(엘 디아 델 로호)>와 같은 수조 작업을 보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분재나 수석을 감상하며 자연의 경치를 즐기는 ‘축경(縮景)’을 떠올렸습니다. 다만 ‘축경’의 생태계는 거의 변하지 않지만, 당신의 수족관 생태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이 아닐까 싶네요. ‘축경’은 절대자의 입장에서 자연을 낯설게 바라보며 이를 통해 내면을 수양합니다. 당신의 수족관은 어떤가요?
피에르 위그 퍼포먼스는 보고 나면 사라지고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실제의 퍼포먼스와는 다르죠. 동물은 그렇지 않아요. 동물들은 반복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그 행동을 포착하려고 합니다. 이 동물은 항상 조개 껍데기 속에 숨는 것을 좋아하고, 저 동물은 또 다른 행동을 선호하죠. 각각의 동물은 마치 배우처럼 작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한 배우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또 다른 배우는 <탑건>에서 온 것처럼 보이죠. 큰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전혀 상관없는 영화들에서 각자 고유의 역할을 가진 배우들을 같은 무대에 세운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말한 ‘축소의 감각’에 동의합니다. 수조를 만들고 그것을 관찰할 때, 마치 영화에서 한 장면을 추출하듯이 프레이밍하는 걸 좋아해요. 이건 이야기가 없는 영화예요. 저는 이 존재들이 움직이고, 서로 상호작용하며, 다른 그룹과 합류하고, 때로는 작은 갈등을 빚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한편으론 살아 있는 장면이지만 유리를 통해 바라보기 때문에 ‘이미지 같은’ 특성을 지닌다는 점도 흥미롭죠. 유리 안에 존재하는 이 세계를 저는 바깥에서 지켜봅니다. 때때로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이 보이기도 하죠. 수조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과정을, 그 관계성을 반사된 제 모습과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목격자일 뿐이므로 ‘축경’처럼 절대자의 시선이나 우월한 위치를 점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수조 주변을 걸어 다닐 때 때때로 배우들(동물들)은 배경 속으로 사라지고, 제 시야에서 벗어나며, 제 통제 밖에서 그들만의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일정 부분의 지배도 있지만 동시에 배우들은 자신만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이고 서로 다른 행성입니다.
하퍼스 바자 젊은 시절 급진적인 좌파 그룹에서 활동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미술로 전향했습니다. 이 경험이 당신의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요?
피에르 위그 스무 살 무렵, 저는 급진적인 자율주의나 아나키즘을 신념으로 삼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냈어요. 그 안에서 직접적이고 대립적인 형태의 정치적 접근이 가진 한계를 목격했고 결과적으로 엄격하게 정치적인 방식보다는 좀 더 시적인 접근을 택하게 되었어요. 동시에 그 경험은 저에게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나 지배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제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특히 주체가 대상과 맺는 관계성에 대해서 말이죠.

«피에르 위그: 리미널» 전시 전경. <이디엄(Idiom)>, 2024, 인공지능에 의해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목소리, 금색 LED 마스크.
하퍼스 바자 이번 전시를 앞두고 “나는 무엇이 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무엇이 될 수 있는가’가 포스트휴먼 시대의 비전이 되고, ‘무엇이 될 수 있었는가’가 과거에 대한 인류의 반성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사변적 허구에 접근하는 일이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피에르 위그 어떤 의미에서 사변은 주어진 현실의 계획, 즉 인간이 만든 규칙의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사변적이라는 것은 ‘다른 곳’이나 ‘바깥’을 찾는 것이며, 외부에서 새로운 것을 구성하거나 적어도 우리 자신의 구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깥으로 나아감으로써 우리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동일한 사고와 믿음의 순환 속에서 계속 맴돌 뿐이며,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겠죠.
하퍼스 바자 당신의 작업이 사변적인 것과 반대로, 당신이라는 예술가는 지난 몇십 년간 현대미술 안에서 누구보다 실천적이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예술 세계에 머물게 하나요?
피에르 위그 모든 것은 픽션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체계도 픽션입니다. 현대 미술은 그야말로 슈퍼 픽션이죠.(웃음) 하지만 저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허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존재 자체의 허구성도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경험을 조금 더 우아하게 만드는 것뿐이고요. 비록 인위적이라 하더라도, 현대미술은 적어도 제가 이러한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다만 여기서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합성생물학? 괴물을 창조해야 할까요?(웃음)
Credit
- 사진/ 곽기곤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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