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 혹시 조용한 ADHD?

회사를 이직하고 바뀐 업무에 적응하는 데 보통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바자>에 합류한 지 2년, 햇수로는 3년 차인데도 나는 아직 이곳에 적응 중인 것 같다. 이직하기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난달에도, 그 전달에도 꼴찌로 마감을 했으니까.(새벽 2시 51분까지 쓰고 있는 이 원고도 가장 마지막으로 편집장 책상에 오를 것 같다.) 일이 그렇게 많냐 묻겠지만 지난달 나에게 배당된 것은 3백92페이지 중 겨우 8페이지. 미리 안 하고 뭐했느냐고? 매일 꽉꽉 채워 일했는데도 내 시계만 다르게 돌아간다. 나는 대체 왜 맨날 늦는 걸까 고민하던 중 내가 일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고통받아온(?) 선배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겉으로 산만한 게 드러나진 않지만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게 조용한 ADHD 증상이래.” 그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나 역시 최근 들어 집중력이 더 떨어진 것 같아 ADHD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내가 ADHD일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집중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도, 물건을 잃어버린 적도, 조심성이 없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그런데 ‘조용한’ ADHD가 나도 모를 만큼 조용하다면? 먼저 인터넷에 올라온 자가진단 테스트를 해봤다. ‘일을 순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 ‘일을 시작하고 준비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돈을 충동적으로 쓴다’ 등 70% 정도에 해당됐다. 병원에서 제대로 검사 받고 문제점을 개선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1백17년 만의 11월 폭설이 내린 날, 조용한 ADHD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병원으로 향했다.
“매번 마감 일정을 지키지 못해요. 자꾸 지적을 받으니까 내가 이렇게 일을 못하는 사람이었나 자괴감이 들고요. 그래서 점점 주눅 들고 놓치는 것도 많아졌어요. 퇴사를 고민할 정도예요.” 일을 못하는 원인을 찾다가 조용한 ADHD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도 더했다. “ADHD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요. 첫 번째는 주의력결핍형. 책을 읽다가 금방 덮어버리고 어떤 얘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등의 행동을 하죠. 두 번째는 과잉행동형으로 몸을 많이 쓰고 골목대장처럼 설치며 돌아다니는 스타일이고요. 마지막은 충동형이에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죽어도 하지 않는 걸 말하죠. 조용한 ADHD는 여기에서 과잉행동이 빠진 상태를 말해요. 에너지를 분출하는 행동이 남성에 비해 적기 때문에 주로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도 특징 중 하나죠.”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재현은 ADHD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기질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이 중요하다고 전한다. 그는 내 고민이 조용한 ADHD에 기인한 것인지 알아보자며 어린 시절에 대해 물었다. 명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동안 부모님이 한 얘기를 종합하면 속을 썩인 적이 없는 모범생에 가까웠다고 대답했다. 이어 부모님이나 가족, 친척 중에 ADHD를 진단받은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ADHD의 원인 중 유전이 75% 이상이에요. 가족 중에 진단을 받거나 굉장히 산만하고 충동적인 사람이 있다면 본인도 ADHD일 확률이 큽니다.” 지금은 왕래하지 않는 친척의 얼굴까지 떠올려봤지만 문제가 될 만한 사람은 기억나지 않았다. 기질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 끝나자 ADHD 자가보고검사(ASRS)가 이뤄졌다. ‘체계가 필요한 일을 해야 할 때 순서대로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까?’와 같은 질문에 1~4점으로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테스트 결과, 조용한 ADHD에 해당하지만 그 수준이 경계선 정도라고 했다. 상담과 검사를 종합한 결과는? 어린 시절에 ADHD 증상이 있었거나 유전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아니라는 소견. 신재현은 최근 나처럼 자가진단 테스트 후 병원을 찾는 ‘조용한 ADHD 호소인’이 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자가진단 리스트는 실제 병원에서 사용하는 자가보고검사를 토대로 해요. 하지만 참고용으로만 활용하기 때문에 동의하는 항목이 많다고 정신과적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는 조용한 ADHD 자가진단 테스트의 항목은 예스가 나올 법한 게 많다면서 지금의 관심은 공황장애가 처음 등장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조용한 ADHD 호소인’ 중 대부분은 ADHD보다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과 우울이 문제인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과한 스트레스로 불안감이 상승하고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집중력도 떨어진다는 얘기다. 나 역시 정서적인 문제가 더 클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신재현의 소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에 생긴 의문들을 추가로 취재하기 위해 다른 병원을 방문했다.
진심건강의학과의원은 성인 ADHD 자가보고검사를 비롯해 간이 우울증 평가, 사회적 회피 불안, 강박증상, 스트레스 수준에 대한 검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 김지은은 어린 시절에 산만한 편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 학교생활기록부를 조회해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또한 가족 중에 ADHD 환자가 있는지, 부모님의 성격은 어떤지 구체적인 질문으로 나의 기질을 파악했다. 앞서 작성한 문진 분석 결과, 이번에도 조용한 ADHD라고 진단하기에는 수치가 애매하다고 했다. 오히려 사회적 회피와 불안이 높은 성향이라 일할 때 생기는 문제들이 여기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조용한 ADHD라서 진단이 잘 되지 않는 것이냐고 묻자 ADHD와 조용한 ADHD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성향의 강약만 다를 뿐 치료 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용한 ADHD라고 부르는 질환의 정식 명칭은 부주의형 ADHD예요. 주로 성인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나이가 들수록 과잉행동과 충동성은 나아지는데 주의력 결핍은 지속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ADHD는 발산형 사고를 하기 때문에 영감이 필요한 예술가는 진단을 받아도 치료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예시를 들며 ADHD가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ADHD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않다고 했다. “가족력과 기질을 통합적으로 보면 좋겠지만 기억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고 본인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단이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또, 우울과 불안이 높으면 실행 기능이 떨어지는데 이때 ADHD 자가보고검사를 하면 질환이 없는 사람도 ADHD라는 결과가 나와요. 집중력이 낮아진 상태이기 때문이죠.” ADHD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히스토리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한 이유였다. 이외에도 약 30분간 기질 및 성격 검사, 뇌파 검사 등을 진행했고 결과 데이터를 모아 상담실로 향했다. 기질 및 성격 검사는 내가 체크하는 것이고 집과 회사에서 모습이 다른 사람도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자극 추구 성향이 높네요. 이건 도파민을 추구하는 ADHD와 연관이 있어요.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충동적이며 내 방식대로 하는 건 도파민 결핍의 증거죠. 높은 성취에 대한 야망은 있지만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에너지가 떨어지는 편이고요. 대신 끈기는 굉장히 높네요.” 혹시 일할 때 노력에 비해 결과가 별로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냐며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높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존감이 높기 힘들다고 했다. 그동안 내 자존감이 높은 줄 알았는데 의외의 결과였다. 다음은 뇌파 검사 결과에 대한 설명. 대부분 평균이지만 집중할 때 나오는 뇌파가 적었다. 반면, 깊은 수면 상태에서 나오는 뇌파는 높았다. 김지은은 심한 우울이나 ADHD 증상이 있는 사람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현재 상태를 확인하는 거라 결과가 매번 달라질 수 있고 MRI처럼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뇌파는 ADHD 증상이 있는 사람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버클리 실행 기능 능력 검사로는 시간 관리 같은 목표지향적인 능력이 조금 부족한 정도, 나의 생각을 조직화하는 것과 문제 해결 역량은 많이 부족하다고 했다.
모든 결과를 종합한 결과, ADHD일 가능성이 60% 정도 된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내가 매번 마감 일정을 준수하지 못할 만큼 스케줄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약간의 ADHD 기질과 불안 지수가 높은 성향, 낮은 실행 기능 능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김지은은 생활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졌다면 치료제를 복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국내에서 주로 사용되는 ‘콘서타’는 의존성이 거의 없으니 안심하라며 나의 경우 약을 복용하면 부족한 도파민을 증가시켜 충동성을 낮추고 일의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약물 복용은 ADHD의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이라 대부분 눈에 띄게 좋아지지만 행동 교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고 일어나서 이불 개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 한잔 마시기 같이 매일 실천 가능한 작은 목표를 3~5개 정하고 성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얘기였다. 상담을 마치고 스케줄러를 받았다. 다음 마감부터는 여기에 일정을 꼼꼼히 기입하며 꼴찌에서 벗어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