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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이 아름다운 배우들: 인생은 미완성, 조민수

<하퍼스 바자 코리아>의 창간 28주년을 기념하며. 세월이 만들어낸 연륜이 묻어나는 배우들을 만났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4.07.19
셔츠는 Eudon Choi. 레더 쇼츠는 H&M. 귀고리, 반지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간혹 배우들 중에서는 사진 찍히는 일을 유독 어려워하는 분도 있던데 정반대인 것 같아요. 누구보다 촬영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조민수 연기로, 영상으로 시작한 친구들은 사진을 되게 어려워하더라고요. 저는 처음부터 CF를 했고, 패션 쪽에서 돈을 조금씩 벌었거든요. 매달 잡지에서 재밌는 옷 입고 사진 찍고. 처음 4년은 그걸로 밥벌이를 했죠. 그래서 이 작업이 편하고 재미있어요.
하퍼스 바자 촬영하면서도 “몸을 더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죠.
조민수 이렇게 저렇게, 몸을 더 과격하게 썼을 때 사진에 담긴 내 모습을 보는 게 흥미로워요. 근데 찍다 보니까 알겠더라고. 오늘은 잘 웃고 힘을 빼야 하는구나. 이 방식도 재밌었어요.
하퍼스 바자 요즘은 독립영화 관련한 스케줄로 자주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어른 김장하>, <생츄어리>의 상영회를 개최했죠. 독립예술영화관 인디스페이스의 상영관 전석을 사비로 구매해 각종 독립영화 상영회를 개최하는 작업은 2018년부터 꾸준히 해오고 있고요.
조민수 <30일>이라고, 작년 10월에 개봉한 영화가 있는데 그게 돈을 조금 벌었대서 받았거든요. 돈 떨어지기 전에 해야겠다 그랬지.(웃음) ‘영화로 번 돈 내 주머니에서 없어지기 전에, 좋은 영화 만났을 때 하자’ 이러면서 재밌게 한 거예요.
하퍼스 바자 독립영화 상영회는 2017년 출연한 단편영화 <미행>이 단초가 되었다고요. 그땐 어쩌다 불쑥 독립영화에 얼굴을 비출 생각을 한 건가요?
조민수 이게 왜 자꾸 정치적인 얘기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월호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아주 아팠었어요. 근데 왜 이걸 다루는 사람은 없을까. 사람들은 왜 아픈 얘기에 선뜻 손을 못 내밀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단편영화 <미행>의 대본을 받았어요. 단편영화를 전혀 몰랐을 땐데 <미행>은 세월호에 관한 얘기여서 무조건 하고 싶더라고요. 해보니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더라는 거죠. 이런 곳이 있구나. 내가 있었던 곳이랑은 전혀 다른데, 가끔씩 몸 담고 있다 오면 너무 좋은 거예요.
하퍼스 바자 독립영화 신을 전혀 다른 곳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요인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단순히 규모의 차이는 아닐 듯한데요.
조민수 사실 전 출연료부터 이해가 안 돼요. 그 여건 안에서도 하고 마는 사람들의 에너지. 이쪽에서는 느낄 수 없는 뭐가 있는 거예요. 상업영화는 관객들한테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던져준다면 독립영화는 자기들만의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다 오픈하지 않고 ‘너도 한번 생각해봐’ 하고 던져주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가끔 이쪽 사람들한테 “관객들한테 친절 좀 하면 안 돼?” 그러지만 사실 친절하지 않아서 재미있는 거겠죠. 이야깃거리가 다양하다는 것도 좋아요. 상업영화 신에서 오래 밥 먹고 산 사람들은 이제 할 얘기가 없어요.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가 많아지려면 영화 신이 함께 잘 굴러가야 하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상영회를 할 때마다 GV에 꼬박꼬박 참석하죠. 출연하지 않은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는 건 색다른 경험일 것 같습니다.
조민수 보통 GV를 가면 어려운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방식은 별로라고 생각했어요. 지식인들끼리 모여서 영화의 문법 얘기 하는 거. 그게 무슨 소용이야. 영화는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할 뿐이고, 보는 사람은 각자 느낀 대로 결론을 낼 뿐이에요. 그거 이외에는 별다른 거 없어요. 그래서 상영회 GV 처음 시작할 때, 우린 다른 얘기 하자고 했어요. 영화 보고 느낀 감정들 쉽게 얘기하면 좋잖아요. 그리고 독립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업영화도 많이 보는 사람들이에요. 다시 말해 영화 고관여층이죠. 그 사람들의 눈빛은 좀 달라요. 앞에 앉아서 그 눈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오늘 내가 여기서 뭘 가져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영회로 내가 뭘 주는 게 아니라 가져가는 게 더 많아요.
하퍼스 바자 그렇다기엔 뭘 많이 주던데요? 직접 뜬 목도리나 손수 만든 달고나처럼 손때 묻은 선물을 꼬박꼬박 챙겨 가잖아요. GV 후기를 보면 조민수 배우를 두고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하는 관객이 많은 거 아나요?
조민수 난 내 욕 할까봐 그런 걸 아예 안 봐요. 상처받거든요. 주변에서 내가 이러는 걸 아니까 좋은 댓글 올라온 거 있으면 막 알려줘요. 그럼 그것만 봐요.(웃음) 가끔씩 대뜸 이유 없는 쌍욕을 퍼붓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런 걸 들으면 일하기가 싫어져요. 한번은 욱해서 얘 끝까지 쫓아간다 그럴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안 보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는 저를 알아요.
슬리브리스 톱, 시스루 스커트, 스타킹, 팔찌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그간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강한 인상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조민수 배우를 두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요. 외면이든 내면이든요.
조민수 그런 얘기 많이 듣죠. 사람들은 일하는 나만 보니까요. 일할 땐 많이 예민해요. 저는 이미 끝난 연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언제고 최선을 다해서 그래요. 누가 뭐라 그래도 이거 이상은 못한다는 마음으로 하거든요. 내가 선택해서 했으니 칭찬도 비난도 내 몫. 이럴 땐 괜찮은데 무턱대고 이유 없는 욕을 들을 때는 얘기가 다르죠.
하퍼스 바자 요즘 촬영 중인 작품이 있나요?
조민수 없어요. 우리가 하는 일은 기다림의 작업인데, 이 본질 때문에 가끔은 ‘나 연기 왜 하지?’라는 생각도 했어요.
하퍼스 바자 선택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 생각은 계속 따라다니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민수 계속 짜증 나죠.(웃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의 은퇴는 대중이 나를 찾지 않을 때다” 그래요. 그거 말고는 답이 없는 거죠. 어릴 땐 쉴 때 도태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었어요. 근데 그게 뭐라 해야 할까.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요즘은 그냥 이렇게 쉴 때 잘 놀자 하고 말아요.
하퍼스 바자 1986년 데뷔, 올해로 38년 차 배우지만 다작을 한 편은 아니에요.
조민수 제가 그렇게 잘하는 애가 아니어서요. 작품 좀 자주 하라는 얘기도 듣는데 저는 저답게, 내 체력이 되는 만큼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좋다고 느끼는 작품에 최선을 다하고, 에너지를 쏟은 다음 쉬고.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저한테는 이런 게 맞더라고요. 그래야 좀 행복하고요.
하퍼스 바자 그 마음은 데뷔 초에도 유효했나요? 어떤 직업이든 이제 막 일을 하기 시작한 사람은 조바심이 나기 마련이잖아요.
조민수 나는 막 쫓기듯 뭔가를 하는 게 너무 힘든 사람이에요. 대본을 그렇게 닳도록 보고서 연기를 하는데도 끝나고 나면 놓친 게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지금도. 그럼 그러죠. ‘나 아직도 많이 부족하구나.’ 연기하는 걸 즐기라고들 하는데 난 잘해야 즐거워요. 잘할 때 이 일이 좋다고도 느끼고.
하퍼스 바자 놓친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 대신 순전히 즐거움만 남았던 건 언제부터였나요?
조민수 마흔이 넘어서? 그때부터는 그나마 재밌다고 느끼더라고요. 끊임없이 저를 학대했다가 반성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이 일이 얼마나 고맙니! 감사하지 않니? 하면서.
하퍼스 바자 무조건 하고 싶은 작품과 고민하게 되는 작품의 차이가 있나요?
조민수 난 작품이 들어왔을 때 하고 싶다고 느꼈던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다 ‘싫어’로 시작했어요. 무서워서요. 막 흠집을 잡는 거예요.
하퍼스 바자 시간이 지날수록 연륜이 쌓이면 여유가 생기잖아요. 여유는 노력으로는 안 되는, 최소한의 시간이 쌓여야 기대해볼 수 있는 영역이고요.
조민수 그게 나쁜 거예요. 어느 정도는 현장을 몰라야 된다고 봐요. 아까도 사진 찍는데 어느 쪽 얼굴이 더 좋냐고 묻더라고. 연기를 할 때도 어떻게 했을 때 내가 더 예쁘게 나오는지 잘 알잖아요. 저는 이런 걸 버리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의도치 않은 컷이 나와도 된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래야 진짜가 보이거든요.
하퍼스 바자 버리는 일에도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알면서 부러 외면하는 게 더 어려우니까요.
조민수 연기를 하면서 행복한 건,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뭔가를 발견할 때거든요. 대사 외우고 상황도 그려보면서 세팅해서 들어갔는데도 예상치 못한 걸 대면할 때. 거기서 나오는 내 안의 무언가에 나도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다 계산돼서 들어가면 그 행복은 느낄 수 없겠죠. 어릴 때는 인터뷰할 때도 좋은 말만 해야지, 그랬어요. 그 마음도 이해돼. 지금은 뭘 해야지, 그런 거 없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것 같아요. 물 흐르듯 하는 진짜 대화가 좋지.
하퍼스 바자 이런 인터뷰에서 늘 <피에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왔을 텐데, 이제는 영화 <마녀>가 그 자리를 꿰찬 것도 같아요. <마녀>에 관해서라면 박훈정 감독이 조민수 배우의 합류로 남성 캐릭터였던 ‘닥터 백’의 성별을 바뀌었다는 일화가 유명하죠. 남성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쓴 대사의 톤도 수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요. 이러한 선택으로는 어떤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요?
조민수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아직도 액션 같은 특정 장르에서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은 약해요. 더 열렸으면 좋겠어요. 역할이나 직업군에 성별을 제한하는 일이 없길 바라요. <마녀> 하면서는 진짜 잘하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이게 잘돼야, 여자들 얘기가 좀 잘돼야 나도 내 밥벌이를 하지 않겠나.(웃음) 나도 밥 먹고 살아야지!
하퍼스 바자 작품의 수는 많지 않을지언정, 그 안에서 다양한 얼굴로 분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관능의 법칙>의 이해영처럼 도회적인 얼굴을 했다가도 순식간에 <마녀>의 닥터 백처럼 극한의 악인이 되었으니까요. 이왕이면 전작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나요?
조민수 같은 거 계속하면 재미가 없어요. 나는 어떤 역할을 받았을 때 그 인물을 연구하는 과정이 좋은 거거든요. 대본에 쓰여 있는 요만큼으로 인생의 서사를 그려보는 일이요. 이 사람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색을 좋아할까까지 생각해보는 거. 그래서 이왕이면 전혀 다른 캐릭터를 하는 게 좋죠.
팬츠는 Dew E Dew E. 셔츠 드레스, 귀고리, 반지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단히 의미를 찾고 기계적으로 작품을 하지 않으려는 의중은 아니었을까 짐작했습니다. 바삐 가다 보면 생각하는 대신 그저 눈앞의 흐름에 편승하게 되니까요.
조민수 흐름에 편승한다는 말씀을 하니 든 생각인데요. 한창 바쁠 땐 내 삶이 급류에 쓸려가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왜 가는지도 모르고 스케줄을 다닐 때가 많았거든요. 특히 우리 일 하는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사람을 참 많이 만나잖아요. 영화 하나만 찍어도 몇 십 명씩 돌아가면서 라운딩 인터뷰를 해야 해요. 근데 <마녀 Part2> 할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여기 온 사람들도 똑같겠지. 회사에서 가라고 하니까 왔겠구나. 그런 마음으로 기자님들을 보니까 다 같은 편 같은 거야.(웃음) 그래서 그날 나 되게 재밌게 했잖아요 인터뷰. 그때부터는 오늘 내가 어디 가서 뭘 해야 할 지 10분 정도 생각하고 집을 나서요. 오늘 여기 올 때도 그랬어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부터 시작해서 좋은 사람 만나고 싶다 하는 생각까지. 이걸 하고 안 하고가 다르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일하며 만나는 관계에서도 사람 대 사람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일 너머 사람 자체를 궁금해하는 거죠.
조민수 슬퍼서 그래요. 다들 너무 뾰족하고 날카로워진 게 슬퍼서. 한 작품 만들 때 못해도 70~80명씩은 모이잖아요. 거기 다 욕망 덩어리들이에요. 뭐 저라고 다르겠나요. 잘해보고 싶어서 이글이글거리는 사람들 몇 십 명이 모여 있는 자린데 서로 경계하고 까칠하게 구는 거… 이젠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왜 6개월씩 그렇게 보내야 되나 싶어요. 그냥 사회생활 한다 생각하면 쉬울 수 있어요. 사무적으로 하는 거지. 근데 그게 나한테는 행복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 나도 아직 멀었어요. 사람, 관계에 대해서는요.
하퍼스 바자 아직도 멀었구나, 하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조민수 지금도 저는 ‘죽기 전에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은 걸요. 근데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완성된 사람으로는 못 죽겠구나 해요. 노력은 늘 하죠. 근데 안 될 것 같아. 여전히 가끔씩 욱해서 화도 내고 촌스러운 짓 하고 그러거든요. 미쳤지, 하면서 후회하고 반성하고.
하퍼스 바자 죽을 때까지 완성형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조민수 기자님은 오늘 나 만나고 내일 또 다른 사람이랑 인터뷰하고. 그렇게 매달 끝없는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하면 헛헛하겠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도 분명히 집에 가면 뭐 실수한 건 없나 생각하다가도, 다시 돌아가도 또 그럴 나니까 하면서 흘려 보낼 거란 말이에요. 그냥 이렇게 해나가는 수밖에 없더라고. 어쩔 수 없이 우린 죽을 때까지 잘 모르고 힘들 거예요. 다 비슷하지 않겠어요? 나중에 나이 더 들어 보면 내 말을 더 이해하게 될지도 몰라요. 마흔 훌쩍 넘겨서도 아이 씨 나 아직도 힘드네, 이러고 있을 거라고.(웃음)
하퍼스 바자 약 10년 전쯤이에요. 어떻게 나이 들고 싶냐는 질문에 “배우의 얼굴 위에 늘어가는 주름과 검버섯, 깊어진 눈빛이 주는 감동이 있다고 믿는다”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번 화보를 관통하는 말이기도 할 텐데요.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싶나요?
조민수 내가 아까 그랬잖아요. 이 기획은 내가 70 먹었을 때쯤 하면 참 멋있었겠다고. 아직은 너무 어리지 내가.(웃음) 그래도 돌아보면 많이 거칠어졌어요. 다 욕망의 결과겠죠? 잘하고 싶으니까. 20대 때는 다 잘하고 싶었어. 가장 열정적이고, 세상이 예쁘게만 보일 때인데 슬프게도 매일 깎이잖아요. 많이 울고, 상처나고, 거칠어지죠. 나는 배우 일을 하면서 목소리를 좀 더 터프하게 바꿔보려고 소리도 엄청 질렀어요. 당연히 실수도 했고, 누군가에게 상처도 줬을 것이고. 결국 그 시간이 지나 내가 됐죠. 가끔은 ‘지금 하는 생각을 그 때도 할 수 있었더라면…’ 싶을 때도 있지만 그땐 이 생각을 할 수 없었다는 걸 이젠 알아요. 그걸 모르는 그때가 있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괜찮아요. 우리는 늘 과정 안에 있구나. 잡생각 말고 잘 죽기나 하자. 태어난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죽음의 모양은 내가 만들 수 있으니까.
하퍼스 바자 한 살씩 먹을수록 시간이 빠르게 간단 말을 습관처럼 내뱉게 돼요.
조민수 아유, 더 빨리 가요. 20대 때는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갈까 했는데, 30대 되면서 빨라지는가 싶더니 어머, 그 다음부터는 너무 빨리 가는 거 있지. 가는 길은 점점 빨라지는구나.
하퍼스 바자 빠르게 가는 중에도 잠깐 멈춰 서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있었나요? 환기하게 되는 순간들요.
조민수 나는 자주 멈춰 서요. 마흔 전의 나는 안 그랬죠. 지난 시간을 돌아보지 않은 거예요. 미국 원주민들은요,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도 영혼이 쫓아오지 못할까봐 가끔 멈춰 섰다가 간대요. 저도 해보니까 잠깐만 멈춰도 불만이 줄던데요. 돌아보면 환기가 돼요. 얼마 전에 길에서 어떤 사람을 보고 너무 감동했었는데… 잘 기억이 안나네요. 적어놓을걸. 저는 길 지나다니면서 사람들 걸음걸이나 아웃핏 같은 거 관찰 많이 하거든요. 그게 내 연기 수업이라고도 생각해서요. 그렇게 빤히 보다가 눈 마주치면 싱긋 인사해주시는 분도 있어요. 길에서 청소하시는 분들도 엄청 친절하세요. 고된 노동 중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수고하십니다” 건네주시는 게 얼마나 감사해요. 그럴 때도 멈춰 서는 거죠. 환기하고.
하퍼스 바자 한참 얕은 경험치를 가지고 각자의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걸어오고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요?
조민수 조금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언젠가부터 우리 사이에 스킨십이 없어졌어요. 허그할 때 마음과 마음이 닿으면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있거든요. 왜 이렇게 세상은 늘 극단적으로 갈까요? 어디서 문제가 생기면 좋은 것까지 싹 가져가버리는 게 막 화가 나요. 나는 너무 힘들 때 누군가가 안아줘서 위로받고 왈칵 터졌던 적이 많아요. 그냥 꼭 안았을 뿐인데 다음 날 좀 개운해. 지금은 이게 없어진 세대가 된 것 같아서 속상하더라고. 너무 잘하려 하지 말고 자기답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 말 하면서 꼭 안아주고 싶어요. 너무 힘주고 있으면 지쳐요.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도 다 잊어버린다고. 내가 뭘 할 때 행복한지, 어떤 공간에 있을 때 좋은지를 들여다봐서 그 환경, 공간에 많이 있으려고 노력해봤으면 좋겠어요. 남들 다 하니까 하는 거 말고요.

Credit

  • 헤어/ 최은영
  • 메이크업/ 이아영
  • 스타일리스트/ 김지원
  • 프롭 스타일리스트/ 권도형
  • 어시스턴트/ 허지수, 정지윤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