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EBRITY

주름이 아름다운 배우들: 막이 오르면, 길해연

<하퍼스 바자 코리아>의 창간 28주년을 기념하며. 세월이 만들어낸 연륜이 묻어나는 배우들을 만났다.

프로필 by 안서경 2024.07.19
레이어드 셔츠, 스커트는 Eudon Choi. 귀고리는 H&M.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최근 종영한 드라마 <졸업>을 자문한 대치동 강사분이 실제 만난 상담 실장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라며 당신을 칭찬하더군요.
길해연 동네 학원에 슬쩍 들어가보고 그랬어요. 작가가 조사를 많이 하고 대본을 썼을 테니 기본적으론 대본의 내용을 익히는 데 충실하려 했어요. 정답은 아니지만 분위기를 관찰하기 위해 직업에 노출할 때도 있죠. <세계의 끝>을 할 땐 충북 질병관리청을, <풍문으로 들었소> 때는 비서실을 찾았어요.
하퍼스 바자 1986년 극단 ‘작은신화’를 창단한 이후 지금까지 무대에 서왔죠. 배우로서 연극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지만, 2005년 영화 <마파도> 이후 매체 연기를 하면서부터는 이름 없는 작은 역할부터 다양한 배역을 맡아왔습니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길해연 연극을 오래 하시던 분들은 순서를 바꿔 진행하는 촬영 시스템도 힘들어하곤 하거든요. 저는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게, 저희끼리 만든 극단에서 공동 창작 작품을 많이 한 덕분인 것 같아요. 10명의 배우가 서로 역할을 바꾸며 즉흥 연기를 참 많이 했거든요. 일상에서 장면을 끌어와서 주변을 관찰하는 일이 익숙했어요.
하퍼스 바자 문학을 전공하던 23살 무렵 만든 극단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한 건가요?
길해연 연극이 계속 가까이 있었어요. 돈은 하나도 없고, 추워서 난로 앞에 모두 모여 있는데 주전자가 끓을 때 막 소리를 내며 흔들리잖아요. 친구들과 그걸 보고도 연극 한 편을 만들고 그랬어요. “뻥 튀어 올라 네 머리에 모자처럼 딱 얹는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내면서. 앞으로 뭘 먹고 살지보다 어떤 연극을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다들 돈이 없는데 현실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고, 남들이 보기에 미쳤다고 생각할 만한 망상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지냈어요. 그게 우리를 얼마나 가슴 뛰고 행복하게 했는지 몰라요. 많은 사람들이 연극하던 시절을 가난으로만 도배하는데 아니에요. 당연히 비루했지만 행복했어요. 극장 혹은 연습실에 있을 때만큼은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했어요.
하퍼스 바자 마치 완전한 안식처처럼 말이죠. 그렇게 연극만 하는 생활을 20년 가까이 이어오신 거죠?
길해연 그 안에서 마음껏 상상하고, 마음껏 망가지고, 마음껏 울고…. 23살에 딱 10년만 하자고 했거든요. 10년 해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관두자고 했어요. 그런데 10년이 딱 지나도 아무 일 안 일어나더라고요. 우리는 그대로고 몇몇 사람들이 조금씩 알아주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10년만 더 할까?’ 했어요. 20년이 지나고 난 다음엔 아무도 그런 얘기 안 했어요. 10년만 더 하자는 얘기. 그때 그 연출가는 상을 여러 번 받고 누구는 여기저기 알려졌지만, 그게 우리가 바라던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고요. “어릴 때 우린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랐던 거지?” 자문했어요. 결국 그냥 하고 싶으면, 계속 하는 것이더라고요.
레이스 톱은 Ermanno Scervino. 스커트는 Lehho.

하퍼스 바자 생계를 위해서는 어떤 일을 했나요?
길해연 연극 관련된 아르바이트도 하고, 강의도 나가고, 시 낭독을 하거나 사회를 보러 가기도 하고. 시 낭독 일이 들어오면 신나서 시집 전체를 다 보고 가요. 생활이 곤궁해서 하던 일도 진심으로 임하면 파생되어 좋은 일이 들어오는 걸 배웠어요.
하퍼스 바자 첫 드라마 <아내의 자격>의 가사도우미 하섬진 역할 이후 <졸업>까지 일곱 차례 빠짐없이 안판석 연출가의 드라마에 출연해온 이력이 이례적이에요.
길해연 처음엔 감독님께 못하겠다고 고사했어요. 저도 모르게 드라마에서 첫 역할을 이 역할로 맡으면 앞으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싶은 선입견이나 걱정이 있었나 봐요. 감독님께서 “그동안 해연 씨가 연극해왔듯 좋은 작품을 같이 만들어보고 싶어 그래요”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에 제가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연극할 때는 작품에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 SOS를 받으면, 아무렇지 않게 참여하곤 했거든요. 감독님은 내 연극할 때의 모습을 알기에 같이 하자고 제안한 건데, 난 왜 못하겠다고 했을까.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어요. 왜 나는 같은 연기인데 다르게 생각했지? 그 뒤로 그 마음을 잊지 않고 계속 가져가고 있어요.
하퍼스 바자 막상 드라마 현장에서 연기하게 되었을 땐 어땠어요?
길해연 제가 맡은 역할이 조선족이라는 것 빼곤 인물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설명이 전혀 없었거든요. 실제 일하는 분들을 만나 뵙고 나니 굉장히 자존감 높은 분들이 많다는 걸 알았고 그걸 연기로 보여주려 했어요. ‘저 캐릭터가 허드렛일을 하지만 뚝심이 장난 아니구나, 뭔가를 배운 여자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하는 거죠. 누가 연기하는 것 같지 않다고, 진짜 조선족 같다는 말을 했을 때 기뻤어요. 그 뒤로 가사도우미, 점술가, 비서실장, 아줌마, 실장, 전업주부…. 저 직업도 되게 많았어요.
하퍼스 바자 안판석 연출가에게 함께하는 이유에 대해 물은 적 없나요?
길해연 없어요. 그런 추측은 해봤어요. 전 연기할 때 막 욕심을 내는 편이 아니거든요. 자신이 가장 중요한 배우들이 있는데, 전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그냥 흘러가는 장면도, 어떤 배우는 쓱 빠져줘야 할 때도 필요해요. 물론 지금 맡고 있는 햄릿처럼 에너지를 한참 올려서 해야 하는 연기도 있죠. 에너지를 서로 맞부딪혀야 할 때 하지 않는 건 직무유기이지만, 그렇지 않을 땐 등장인물들이 다 유기적으로 움직였으면 좋겠거든요. 창작극을 할 때 연출가나 작가들과 같이 대본을 고치던 습관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취향이 그런 거죠.
셔츠는 Eudon Choi. 귀고리는 H&M. 목걸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워낙 볼 게 많은 세상이잖아요. 극장이 어려워진 요즘 같은 시대에 연극계는 어떤가요?
길해연 젊은 관객이 꽤 많아요. 탄탄한 마니아 층이 존재하죠. 처음 <미저리>를 할 때 온 고등학생 팬들을 재작년 공연에서 다시 만났어요. 폭우와 폭염을 뚫고 극장에 온 관객들을 커튼콜 때 보면 진짜 눈물이 나요. 연극계가 어렵다, 절망이다, 라는 말은 늘 존재해왔거든요. 맨날 끝났다고 그랬어요. 하지만 여전히 사랑해주시는 분들과 저희가 잘 만들어낸다면 연극이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분들이 늘어날 거라 믿어요.
하퍼스 바자 제 막연한 생각으로는 인생에 대한 통찰과 부조리를 말하는 연극을 오래 해왔으니, 한편에 씁쓸하거나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전히 희망을 보는 거네요.
길해연 회의감은 계속 들죠. 20대에는 연극이 이 세상에 뭘 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어떨 땐 너무 근사한데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인생사랑 똑같아요. 그러다 좋은 연극 한 편 보면 일주일 내내 기쁘고, 안 좋은 연극 보면 한 달 내내 기분 나쁘고.(웃음) 저는 그걸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인 거죠. 제작비가 부족해도 좋은 작품은 늘 존재해요. 연극의 대중화도 필요하지만 좀 다른 작품도 다양하게 존재하길 바라요. 사색과 고민을 극장에서 하고 싶어서 찾는 관객들도 분명 존재해요.
하퍼스 바자 힘든 시기 <미저리>란 작품을 만났다고 들었어요.
길해연 이해랑연극상을 받고 이제 연극을 안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할 만큼 한 것 같았거든요. 항상 더 많이 나누어주고 돈을 받기보다 써가면서 후배들을 챙겼고. 연극과의 관계를 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하는 사이지만 저를 자꾸 물고 늘어지니 싫어하게 될까 무서웠던 것 같아요. 3년 정도 무대를 쉬다가 <미저리>를 만났을 때, 집착하는 인물인 애니를 보고 연출가가 ‘외로움’에서 시작한 것이라서 그 이야기를 외로움으로 풀겠다고 해서 하겠다고 했어요. 저 잘 웃고 다니거든요. 단단하게 보이지만 속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쉽게 겪지 않을, 사별이란 일도 겪었고요. 내 안의 무언가를 봐줬다는 마음에, 무대에서 드러내고 싶다는 마음에 참여했는데 큰 위로를 받았어요. 다시 극단 사람들과 섞이고 변해가면서, 연기가 저를 그렇게 변화시켰어요.
셔츠, 베스트, 팬츠는 모두 Tod's.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지금 박정자, 손숙 등의 배우와 함께 <햄릿> 무대에 서고 있죠. 어떤 경험인가요?
길해연 10대 때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보고 “와, 잘 쓴다. 막장드라마네” 했었는데, 이젠 곱씹을수록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와장창 깨져요. 무대 위에는 경이로운 순간들이 있어요. 요즘 막이 오르기 전, 캄캄한 무대에서 혼자 앉아 있곤 해요. 누군가는 구석에서 몸을 풀고, 누구는 눈을 감고 명상하기도 하죠. 샤막 안에 관객들이 들어오는 게 보이거든요. 그분들께 마음의 인사를 건네요. 저를 못 보지만 사실 마주보고 있는 거잖아요. 분명 무대에는 경이로운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이 저를 채워주죠. 나를 옭아매면 어쩌지, 걱정하다가도 또 다시 만나면 좋고요.
하퍼스 바자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 역할을 맡았죠.
길해연 생략된 버전이 많아서 욕망이 급변해야 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 부분을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뒀어요. 유약한 모성이 아니라 강인한 모성을 가져야겠다고 해석했고요. 운명은 누구에게든 어쩔 수 없이 주어지잖아요. 선택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아들을 위해 죽겠다,는 결정은 거트루드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거니까요. 마치 맥베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마지막 장면처럼. 혼란 속에서 운명에 마지막 도장을 스스로 찍는 사람. 거트루드라는 인물을 저는 그렇게 해석했어요.
하퍼스 바자 좋은 연기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길해연 조각을 맞추는 일, 아닐까. 색이 짙어야 할 땐 짙어야 하고. 큰 덩어리를 맡으면 그만큼 채워야 하고. 작품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조각인지 알고 해내는 거에요. 아주 작은 조각 하나가 빠져도 작품이 완성되지 않으니까.
하퍼스 바자 배우여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길해연 천상병이 인생을 소풍에 비유했듯, 우리가 태어날 때 배역을 맡는다고 가정해보면 배우들은 수많은 소풍을 다니는 거예요. 인간은 원치 않는 배역을 맡고 태어나잖아요. 얼굴, 기질, 선택하지 못하는 운명이죠. 그런데 우리는 많은 삶을 살아볼 수 있으니 행복하지요.
하퍼스 바자 너무 많은 삶을 살아서 힘에 부칠 때는 없나요?
길해연 잘 털어내요. 속풀이하듯이 살고 있지 않나. 죽도록 슬퍼해야 하는 작품을 만나도 그게 진짜 삶이라면 끔찍할 테지만, 연극이나 드라마에선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 괜찮아요. 오히려 연기를 하며 풀어내는 수많은 감정이 저에게 다시 털고 일어날 힘을 줘요.
하퍼스 바자 마지막으로 40여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배우로 살아가는 게 인간 길해연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길해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찬바람이 확 부는 것처럼 두려울 때가 있죠. 드라마나 영화에 더 이상 엄마 캐릭터가 많이 안 나와요. 나만 열심히 해서 될 일이 아니니까. 저는 제 인생을 ‘점 인생’이라 하거든요. “오늘 한 점 열심히 찍자”는 생각만 하려 해요.

Credit

  • 헤어/ 안미연
  • 메이크업/ 유혜수
  • 스타일리스트/ 김지원
  • 프롭 스타일리스트/ 권도형
  • 어시스턴트/ 허지수, 정지윤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