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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이 아름다운 배우들: 단순한 마음, 권해효

<하퍼스 바자 코리아>의 창간 28주년을 기념하며. 주름이 아름다운 배우들을 만났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4.07.19
코트는 Paul Smith. 셔츠, 데님 팬츠,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인터뷰를 앞두고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여행자의 필요>를 뒤늦게 찾아 봤어요.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후로 홍상수 영화는 거의 놓치고 있었는데 역시나, 빠져들더군요. 무엇보다 달라진 스타일이 눈에 띄었어요. 전작들이 소설 같았다면 이번 작품은 시 같다고 할까요? 실제로 영화감독이 아닌 시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요.
권해효 지난 12년 동안 홍 감독과 10편이 넘는 작품을 같이 해왔어요. 전작 중에도 여전히 좋아하는 작품이 많지만 저 역시 지금 작업이 가장 흥미로워요. 분명히 변화가 있어요. 어떤 이들은 홍 감독 영화가 다 똑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어요. 홍 감독은 자기 영화가 어떤 영화라고 규정되기를 바라지 않아요. 기존의 문법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읽히는 것도 원치 않죠. 그저 완전히 열어놓은 상태에서 1백 명의 관객이 1백 개의 시선으로 다르게 보면 되는 거예요. 저는 특히 베를린영화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기억에 남아요. 지난 20년 동안 유럽권 전체에서 정권 교체를 겪고 있잖아요. 프랑스든 영국이든 모두 이방인에 대해 차가운 눈길을 주고 있고 한국 사회 역시 비슷하죠. 유럽의 중심으로 인식되는 프랑스의 대표 배우(이자벨 위페르)가 아시아의 한국 땅에 뚝 떨어져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흥미롭더군요. <밤의 해변에서 혼자>나 <당신얼굴 앞에서>를 보면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순간이 있는데, 이번 영화는 마지막 장면 대화가 그랬어요. 가자, 우리 집으로. 우리 집 맞아? 응 맞아. 저는 그거 하나만으로도 좋은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홍상수 영화는 출연하는 배우들도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모른다죠. 그저 자신이 연기하는 장면만 알 뿐 앞뒤 맥락에 대한 정보가 없다고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배우를 기능적으로 소비하는 거라 의심했는데 알고보니 그건 그냥 홍상수라는 창작자의 스타일인 거더라고요. 예를 들어, 제가 어느 날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를 만난다면, 저를 만나러 오기까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사정이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요.
권해효 배우가 어떤 작업에 참여할 때는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세우고 어떤 연기로서 접근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고 일종의 전통 물리학 같은 거죠. 지난 수백 년간 이어져왔던. 그런데 정작 우리의 인생과 삶은 모르는 것 투성이잖아요. 마치 양자역학처럼 이 문 밖으로 나가면 누굴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죠. 기존의 연기 작업이 ‘다 알고 있으면서 아닌 척하는’ 방식이었다면 홍 감독과의 작업은 우리의 삶처럼 닥쳐온 일을 해치우는 방식인 것 같아요. 가치 평가의 문제는 아니고요. 그걸 기능적으로 볼 것인가는 사람마다 입장이 다를 것 같아요. 아무튼 저는 전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흥미롭게 생각해요. 아주 재밌어요. 그리고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캐릭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으로서 홍 감독의 재해석이 투영된 존재예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화면 속에서 그냥 대사를 던지는 게 아니고 다채로운 색깔을 부여하는 사람이죠.
하퍼스 바자 “공감하려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레슬리 제이미슨의 말처럼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모른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면, 홍 감독의 제작 방식이 소통에 관한 가능성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권해효 언젠가부터 매체에서도 홍 감독만의 이 특별한 제작 방식에 포커스를 맞추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 제작 방식이 궁극적으로 찾아가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은 희석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홍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영화를 촬영하면서 한 번도 제 예상이 맞아떨어진 적이 없다는 점이에요. 한번 떠올려보세요. 홍 감독 영화를 볼 때 다음 장면을 예측하고 맞춘 적 있나요? 예측 가능하다는 건 관습적이란 거예요. 기본적으로 서사의 구조를 가진 영화나 소설은 인물이 목적을 이루거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 속에 분명히 정해진 단계가 있어요. 그런데 홍 감독 영화 속에서는 그런 단계가 존재하지 않아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만 봐도 그렇죠. 단지 누군가가 어느 공간에 도착할 뿐이고 그곳에서 처음 마주한 상황을 그대로 즐기면 되는 거예요.
하퍼스 바자 장률 감독이 연출한 <후쿠오카>의 영향 탓인지도 모르겠어요. 저에게 권해효라는 배우는 언제나 외로움의 이미지랄까요?
권해효 데뷔 이래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온 것 같아요. 그걸 억지로 의도한 적은 없고요. 그냥 저는 “이 배역은 권해효 씨 아니면 안 돼요.” “이건 권해효 씨를 보고 썼어요” 같은 말을 절대 믿지 않아요. 그건 대부분 전작 이미지의 차용이니까요. 그런 작품을 피해 다니다 보니까 어느 순간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고르나요?
권해효 특별히 기준을 세워본 적은 없어요. 다만 지금까지 배역의 사이즈를 보면서 작품을 고른 적은 없어요. 그냥 이 작품 재밌겠다 싶으면 하는 거죠. 어쨌든 제가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이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꽤 긴 시간 유통 가능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건 큰 행운이잖아요. 그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별게 없었던 것 같아요. 만약 저에게 작은 배역이 먼저 들어오고 한 달 뒤에 너무 크고 좋은 배역이 들어온다면 늘 그렇듯 전자를 택할 거예요.
하퍼스 바자 신의의 문제인가요?
권해효 신의 이전에 그 사람이 날 먼저 선택해줬으니까요. 지금 이 순간 나를 봐준 사람이잖아요. 큰 배역을 맡으면 인생이 바뀔 것 같고 좋을 것 같고 대단해질 것 같지만 그런 기대에는 언제나 실망이 따르게 마련이죠.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장담할 순 없지만 그런다고 제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아요.
코트는 Paul Smith.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코로나 이후에 극장 산업이 어려워졌고 OTT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죠. 이런 시대에 영화가 필요한 이유가 뭘까요?
권해효 저는 여전히 영화관에서 영화 보기를 좋아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 변화에 대해 ‘영화는’, ‘영화니까’ 같은 말을 덧붙일 수 있겠지만 솔직히 그걸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어요. 예측불가죠. 일본만 하더라도 코로나 이전의 관객 수를 회복했다고 하더라고요. 그에 비하면 한국 영화 관객 수는 현저히 적죠. 조금 뜬금없는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국 영화 관객 숫자에 대한 고민이 마치 한국의 인구 감소에 대한 걱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구 감소의 원인은 젊은 사람들이 결혼과 출산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인데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걸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가 아니라 인구 감소가 문제라고만 얘기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랄까요.
하퍼스 바자 문제 상황을 숫자로만 보는 거죠. 이를테면 사람을 인구로만 대하듯.
권해효 한국 시장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영화의 독과점적인 형태들, 인구 수에 비해 많은 극장의 수는 문화 전체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화로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이제는 영화관이 영화를 보는 사람이 가는, 여러 문화 중의 하나의 갈래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고요. 물론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계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할 테지만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정답을 모르는 것 같아요. 전주든 부산이든 영화제에선 매진 행렬인데 정작 그 영화들이 개봉하면 극장에 관객이 안 들죠.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한국 사회의 양극화 속에서 촉발한 경제적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죠. OTT로 보면 되는 걸 왜 비싼 돈을 주고 영화관에 가겠어? 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하루 동안 마음 편하게 밖으로 나가서 친구와 데이트하고 놀 수 있는 심적인 여유가 사라진 탓인지도 모르죠.
하퍼스 바자 좋은 영화의 조건은 뭘까요?
권해효 그건 너무 간단합니다. 10년 후에 봐도 촌스럽지 않은 영화요. 소위 말해서 연기자들의 의상이나 헤어조차 훗날에 종합예술로서 받아들여진다면 좋은 영화겠죠. 트렌드는 흔하지만 스타일은 귀하니까요. 특히 한국에서 스타일을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인데 그게 잘 유지되면 세월이 지나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아요. 누가 <타짜>를 보면서 촌스럽다고 생각하나요?
하퍼스 바자 한 명의 배우로서 이렇게 부침이 심한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권해효 제가 비관적인 건 아닌데 살면서 알게 된 건 내일보다는 오늘이 훨씬 낫다라는 거예요. 분명히 내일이 더 힘들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내일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없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재킷은 N_8. 셔츠는 Songzio Homme. 팬츠, 슈즈, 벨트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배우이자 사회활동가이시죠. 그런 노력들로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고 보지 않나요?
권해효 내일이 더 힘들 거라는 건 한 개인으로서 살아갈 때의 마음가짐이고요. 당연히 사회가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죠. 지금도 시민단체의 대표로 있지만 이 일을 통해서 뭔가를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져본 적은 없어요. 젊은 시절에는 알면서 눈 감고 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절 움직인 동력이었어요. 지금은 그냥 이 일이 주는 즐거움이 좋아요. 아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부침이 많은 제 일을 지금까지 견디게 해준 힘이 사회활동이기도 해요. 저는 소위 대한민국에서 연예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가지는 삶의 바운더리가 없어요. 골프도 안 치고 사교 모임도 안 나가죠. 대신 지금까지 훨씬 많은 시민들, 사람들과 만나왔어요. 그렇게 제가 발 딛고 사는 세상 속 사람들과 소통하며 가지게 된 저 나름대로의 현실 감각 같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제 배우 생활에 큰 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하퍼스 바자 조선학교를 응원하는 시민단체 ‘몽당연필’의 대표를 맡은 지 어느덧 13년이 되었습니다. 요즘 단체는 어떤 상황인가요?
권해효 몽당연필은 일본에서 78년 가까이 학교를 지켜온 이들을 응원하고, 재일동포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몰랐던 해방 이후의 역사 인식을 갱신하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한일 관계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역사 부정부터 시작해서 아직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죠. 조선학교와 재일동포들은 차별의 역사를 눈으로 보여주는 현존하는 실체들인데 이들을 지원하고 지지하는 일이다 보니까 지금이 설립 이래 가장 힘든 시기인 것 같아요. 남북 관계가 좋지 못하니 더 그렇죠.
하퍼스 바자 우리 사회에 산재한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왜 하필 재일조선학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권해효 우리 모두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갖게 된 학교에 대한 기억들이 있을 텐데요. 과연 학교에 대해 자랑스러웠던 적 있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잘 모르겠어요. 기껏해야 우리 학교는 서울대를 몇 명 보냈어요, 아니면 우리 학교가 어떤 경기에서 우승했어요, 정도겠죠. 저 역시 그렇게 살아왔건만 조선학교 학생들을 만나고, 학교를 고향이라고 부르는 그 아이들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꼈어요. 10년 전 세월호 사건으로 단식하는 분들 앞에서 폭식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은 원래 이렇게 나쁜가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는데 조선학교 학생들 혹은 동포들을 만나면 치유받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아 우리는 원래 나보다 내 옆의 사람에게 먼저 마음을 쓰던 존재였구나.’ 아이 하나를 제대로 키우려면 온 마을이 마음을 합해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마음이 무언지 알게 된 거죠. 이건 조금 이기적인 생각인데요. 모든 사람은 나이가 들면 보수화되잖아요. 내 미래에 대한 걱정부터 앞서고요. 그리고 그런 공포는 사람을 나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요. 시민단체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느끼는 건데, 이 일이 제 삶의 건강성을 지켜주는 것 같기도 해요.
하퍼스 바자 인터뷰에서 종종 “나잇값 해야지”란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나잇값이란 무엇일까요?
권해효 나잇값을 안 드러내고 사는 게 나잇값 하는 것 아닐까요?(웃음) 안타깝게도 저의 청년 시절에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같은 롤모델이 없었죠. 대부분은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였어요. 하다못해 부모가 되었을 때도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그랬죠. 그러니까 전 평생을 저런 사람으로 살아야지가 아니고 최소한 저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가 목표였던 거죠. 지키는 건 어려운데 그러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게 저한테는 나잇값 같아요.
하퍼스 바자 2002년 호주제 폐지 운동, 2008년 여성가족부 폐지 운동 등 페미니스트로서도 여러 번 목소리를 냈습니다. 호주제 폐지 운동 당시 모 기업 광고 모델이었는데 압박이 심했다죠.
권해효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광고 시장에서 완전히 탈락했죠. 성인이라는 건 자기 행위의 리스크를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잖아요. 받아들여야죠. 그런데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배우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을 하는 건 괜찮고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에는 입 닥치고 있으라는 게… 과연 맞는 건가 싶어요. 뭐, 조금씩 변화해가겠죠.
하퍼스 바자 사실 요즘이야말로 남녀 대립이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시기 같아요. 특히 온라인에서요.
권해효 어쩌면 여성이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전까지는 여성의 언어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잘해야 돼요. 저희 부부는 주기적으로 아들을 앉혀 놓고 성평등 교육을 합니다. 아들 여자친구와 함께.(웃음)
하퍼스 바자 <그 후>의 봉완(권해효)은 뭔가를 믿는 걸 비웃는 중년이죠. 그런 그에게 아름(김민희)이 자신은 세상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데, 사실은 저 역시 이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왜 사세요?"
권해효 영화에서 봉완이 거기에 제대로 답을 못하고 말을 돌리죠. 저 역시 그럴 것 같아요. 살긴 사는데 왜 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살아내고 살아가는 거죠.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의미 있는 뭔가를 남겨야겠다는 마음도 없고요. 배우로서 뭔가를 이룬다는 건 의도한다고 달성될 일이 아니에요. 제가 제 직업에서 좋아하는 점은, 이 직업은 누구하고도 경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의 것을 뺏지 않고 온전히 내 몸을 움직여서 먹고사는 직종이죠. 거기에 일종의 안도감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라는 사람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고요. 저는 그냥 배우라는 직업이 참 재미있어요. 수없이 많은 예술 영역 속에서도 이 직업이 특별한 이유는, 다른 예술에 존재하는 '허들'이 여기엔 없기 때문이죠. 재능 이전에 갖춰야 할 소양요. 성악을 하려면 하이체는 내야 될 수 있어야 하고 미술을 하려면 데생 실력이 필요하고 무용을 하려면 세 바퀴 정도 돌아야 하는데 연기에선 도통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아요.
재킷, 니트 톱, 팬츠, 벨트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연기야말로 발성부터 외모까지 타고난 자질이 중요하지 않나요?
권해효 흔히 말하는 발성, 글쎄요. 안성기가 발성이 좋나요, 송강호가 발성이 좋나요. 허들이 있다는 건 어떤 면에선 좋죠. 소위 말해서 허들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일종의 전업으로 살 수 있는 단계가 된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배우에겐 그런 허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요. 헤매기도 쉽고 반대로 그래서 견딜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죠.
하퍼스 바자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라. 연기를 한다는 건 그 불확실성 속에서 사는 일이군요. 그 어떤 확신 없이.
권해효 그렇죠. 연기야말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겁에 질릴 때가 많죠.
하퍼스 바자 <여행자의 필요>로 다시 돌아오면, “진지하게 산다는 건 열심히 산다는 것과 다른 거야. 진지하다는 건 진짜 사실에 근거해서 살려고 노력하는 거야”라는 대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삶에 관한 잠언으로만 생각했는데 연기에 대한 아포리즘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권해효 연기는 노력의 영역도 아니에요. 견뎌내는 힘 정도? 열심히 하면 도움은 되겠죠. 발성 연습을 열심히 하면은 좋은 소리가 나오겠죠. 하지만 좋은 소리가 좋은 연기일까요? 옛날 광대로 치면 거나하게 걸치고 한 판 잘 놀면 사람들이 돈도 주고 박수도 쳐주는데 이 직업은 맨 정신에 잘 놀아야 해요.
하퍼스 바자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요.
권해효 가장 최고의 연기는 단순한 연기이고 그걸 해내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기대부터 다 던져버려야 하죠. 이자벨 위페르가 그런 순간을 많이 보여줘요. 어떤 연기를 해야겠다는 의식 없이 받아들인 일을 그저 해치워버리죠. 거기서 오는 단순함의 미학이 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첫 소설을 쓰고 엉망이라고 생각해서 다 폐기했다죠. 나중에 그 글을 영어로 번역하고 그걸 다시 일본어로 재번역하면서 문장의 단순함이 갖고 있는 힘을 살렸고요. 스스로가 만족한다는 게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시간짜리 연극을 한 달 동안 하다 보면 저 자신이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몇 분 안 돼요. 그런데 몸이 안 좋을 때 하는 공연들은 대부분 정말 좋아요. 그럴 땐 목표가 확실하거든요. 이 안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짜내, 최선을 다해, 들려주는 것.

Credit

  • 헤어/ 안미연
  • 메이크업/ 유혜수
  • 스타일리스트/ 김지원
  • 프롭 스타일리스트/ 권도형
  • 어시스턴트/ 허지수, 정지윤
  • 디자인/ 이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