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로니 혼의 드로잉이 의미하는 것

“전시는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일 뿐, 전체를 알지는 못해도 괜찮지만 전체를 알아가는 과정이면 좋겠다”고 말하는 로니 혼. 그의 드로잉은 작업세계와 삶을 공히 관통하는 가장 내밀한 작업이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4.01.09
로니 혼(b. 1955), <Frick and Fracks>, 2018-2023, Gouache, and/or watercolor on Arches paper 8 units, each 38.1x2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로니 혼(b. 1955), <Frick and Fracks>, 2018-2023, Gouache, and/or watercolor on Arches paper 8 units, each 38.1x2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숱하게 받지만, 나는 명확하게 답한 적이 없다. 어떤 미술가든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믿고, 그래서 모든 미술가를 각자의 이유로 좋아한다고 말한다. 진심이다. 하지만 질문을 바꾸어 늘 마음 한편에 두고 있는 작가가 누구냐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다. 아마도 로니 혼 같은 미술가가 가장 먼저 등장할 것이다. 요즘도 국제갤러리 2관 뒤편의 작은 정원을 지날 때면 무시로 그가 떠오른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대작가와 대단한 친분이라도 있는 양 싶지만, 일종의 ‘그리움’은 그저 두 번의 봄, 이곳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얽힌 기억에서 비롯된다. 그날의 햇빛, 바람, 냄새와 함께 나의 질문과 그의 대답, 나의 반응과 그의 제스처, 나와 그의 솔직한 감탄사가 뒤섞이던 순간. 내가 바로 이곳에 실재한다는 생생한 감각. 내가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있다는 각성이 다른 인터뷰에 비해 유독 뚜렷한 이유는, 로니 혼이 스스로를 소개한 바 “실재의 복합성을 다루는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모종의 사물이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곳에 현실이 존재한다”던 그의 말은 이렇게 바꿔진다. “서로 다른 우리가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곳에 현실이 존재했다”.
물 웅덩이 같은 투명한 유리 조각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현대미술가 로니 혼은 그러나 단순한 조각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조각을 전공한 까닭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어떤 재료든 쓸 수 있으며, 3차원이라 실제적이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시각예술가로도, 전업 작가로도 규정하지 않는데, 이런 태도를 통해 그는 시각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얻고 직업인의 딜레마를 잊는다. 그래서 내가 보는 로니 혼은 오히려 개념미술가에 가깝다. 자연, 정체성, 감각, 시간, 변화 등의 주제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세계의 본질, 그리고 이를 감각하고 경험한다는 것에 대해 탐구하는 작가. 난해하고 추상적인 내용을 철학적이고도 감각적으로, 더욱이 미술적으로 정제해 표현하는 그에게 조각, 사진, 퍼포먼스, 출판 등은 모두 좋은 수단이 된다. 그 중에서도 로니 혼이 특히 헌신적으로 대하는 작업은 바로 드로잉이다. “드로잉하기 좋은 환경으로 스튜디오를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에는 뉴욕 외곽에서 메인주 시골로 옮겼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드로잉하기 좋은 공간’이란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영감을 받을 수 있고, 동시에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곳, 즉 작가와 인간으로서의 삶 모두를 품어내는 장소를 의미한다.
로니 혼(b. 1955), <Frick and Fracks>, 2018-2022, Gouache, and/or watercolor on Arches paper 8 units, each 38.1x28.6cm. 사진: Ron Amstutz,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로니 혼(b. 1955), <Frick and Fracks>, 2018-2022, Gouache, and/or watercolor on Arches paper 8 units, each 38.1x28.6cm. 사진: Ron Amstutz,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그리는 사람이다. 드로잉이 주된 활동이고, 내가 하는 작업의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로니 혼에게 드로잉은 “숨 쉬는 것처럼 일상적인 활동”이자 “나와의 관계”다.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광범위한 작업 세계 중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작업이기도 하다. 많은 미술가들이, 예컨대 코로나19의 비자발적인 고립 상황에서 스튜디오에 머물며 드로잉에 매진했다지만, 초창기부터 시작된 그의 드로잉 역사는 한결 깊다. 그는 작가로서 꼭 해야 할 일을 다름 아닌 드로잉으로 충실히 수행한다. 스스로를 가늠하거나, 다른 대상에 거리감을 갖거나, 색다른 관점 혹은 시각을 갖추거나, 휴식을 갖거나, 또 다른 종류의 세상으로 가거나. 물론 드로잉 작업이 로니 혼이라는 작가가 매일 무엇을 하는지 표현하진 않지만, 이 모든 걸 더하면 그의 감성과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현재 국제갤러리에서 보여지는 드로잉 연작 <프릭 앤 프랙스(Frick and Fracks)> 역시 지난 2018년부터 2023년 최근까지 꾸준히 작업해온 결과물이다. 로니 혼의 드로잉은 전형적인 그것과는 달리 서술이나 요약 대신 추상의 문법을 택한다. 하나의 작품이 8장의 수채화 및 과슈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화면에는 무엇인지 모를 도형들이 자리한다. 암석, 바위 내지는 세포 같아 보이지만 실상 무엇인지 모르겠는, 혹은 작가의 다른 작업처럼 “매번 새로운 생각이나 예상치 못한 통찰, 오해, 우연, 실수, 전작에서 분리되는 순간 등 매번 다른 발견을 통해 시작되는” 추상적 형태다. 문제의 추상성은 어떤 모양을 통해 의미를 읽어내려는 본능을 발동시키는 대신 낯선 대상을 마주할 때의 감각을 증폭시킨다. 희한한 형태들이 종이에서 퐁 솟아나거나 사뿐 내려앉은 듯, 공기처럼 부유하는 듯한 생생함이 이 작업들을 한결 비물질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너무 심플한 나머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듯한 이 작업들은 실은 시간의 얼룩이고, 작업과 삶이 생동하는 증거이며, 작가로서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바를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자처한다.
특히 이 작품은 제목부터 로니 혼 특유의 유머 감각과 함께 작업 방향을 시사하는 중요한 단서다. ‘프릭 앤 프랙’은 한 시대를 풍미한 코미디 아이스스케이팅 듀오의 이름이다.(참고로 작가는 어떤 드로잉에서 코미디언 마리아 뱀포드의 말을 적어두기도 했다.) 스위스 바젤 출신 스케이터인 베르너 그뢰블리와 한스 마후흐라는 두 남자가 있었다. 이들은 스위스 어느 작은 마을 이름에서 딴 ‘프릭’과 스케이트 공연에서 입던 프록 코트를 뜻하는 ‘프랙’을 조합해 ‘프릭 앤 프랙’이라는 예명을 만들었다. 실없는 농담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고 관계도 없는 단어를 조합한 이름 아래, 이들은 1930년대부터 50년 넘게 줄곧 듀오로 함께 활동했다.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곡예를 능가하는 퍼포먼스와 코미디 연기를 겸비한 아이스 쇼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둘의 예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혹은 구분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관계를 칭하는 은어로 통용되었다.
로니 혼은 드로잉 작업을 통해 언어의 본래 의미를 해체하고 재조합하길 즐기지만, <프릭 앤 프랙스>는 언어가 등장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연작이다. 관용구와 시적 문장 등을 자주 활용하는 그의 드로잉은 “인식에서 몰이해로의 변화, 가독성에서 불가독성으로의 전환을 표현함으로써 문자화된 혹은 구두 커뮤니케이션의 모호함을 시각적으로 조명”한다. 반면 이번에는 프릭 앤 프랙의 존재 자체가 언어 이상의 방법론으로 작용한다. 그의 드로잉은 부드럽게, 보는 이로 하여금 작업 앞에 오래 머물기를 종용하는데, 작가가 제안하는 교묘한 이미지(기억력) 게임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형의 뜻을 파악하기도 전, 우리는 이 8장의 그림이 모두 짝 혹은 쌍으로 이뤄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똑같은 게 아니라 모양, 크기, 색상, 물감 농도, 붓질 형태 등이 모두 미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릴 것이다. 어느덧 우리는 도형을 짝짓고, 무엇이 같고 다른지를 찾기 위해 유심히 관찰하기에 이른다. 이들을 비교, 대조하는 과정에서 뜻이 모호했던 도형들은 기호가 되고, 결국 기호의 변주와 관계성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 도형들은, 엄연히 다른 두 사람이 짝을 이뤄 하나의 개체로 존재했던 ‘프릭 앤 프랙’이 된다.
1980년대부터 로니 혼은 짝을 이루는 페어링(pairing), 이중화인 더블링(doubling)을 매우 중요한 미학적, 개념적 전략으로 삼아왔다. 실제의 복합성을 다루고자 하는 그가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이곳에서 감각하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관람객들이 전시장에서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련의 활동 말이다. 그는 늘 관객과 작품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한다고 말해왔다. “대상, 물질 또는 생산된 사물이 작품의 종착점이 아니다. 나는 경험에 항상 열망을 가진다. 즉 관객 하나하나가 내 작품의 가치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보통의 이들은 작품에 깊이 개입하지 않게 되거나 혹은 개입이 힘들다는 사실을 로니 혼은 깨달았고, 그래서 더블링과 페어링의 기법을 도입했다. 도무지 그 차이를 알 수 없는 두 장의 부엉이 사진(<데드 아울>, 구겐하임 소장작)을 나란히 놓거나, 본인의 앞모습과 뒷모습 사진 두 장을 연속 배치한다든가, 닮은꼴의 조각 두 점을 각기 다른 공간에, 혹은 같은 공간에 따로 둔다든가 하는 식이다. 페어링과 더블링의 역학 이면에는 “두 개의 오브제가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 세계를 통합적으로 지각할 수 있게 된다”는 진실이 자리하고 있다.
작가의 예측, 즉 이러한 방식이 보는 사람의 주의 깊은 관찰과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적중했다. 관람객들이 그의 작품을 흘려 보내지 않고, 집요하게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두 점은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왜 나란히 걸어두었으며, 다르다면 어떤 부분이 다른 건가. 설사 같다 해도, 경험하는 시간대와 상황은 미세하게 달라질 텐데, 그렇다면 아까 본 작품과 지금 보고 있는 작품은 과연 같은 것일까. 그리하여 같은 대상을 두 번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실제 많은 이들이 작가에게 진위를 물었지만, 그는 한 번도 속 시원히 답을 말해준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혼란함, 모호함이 바로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같거나 다른 대상의 더블링 혹은 페어링은 정체성, 의미, 인식은 늘 변화하기 마련이라는 본질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로니 혼의 작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불확실성을 만들어내는 행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현재 용인의 호암미술관 소장품전에서도 우직스레 놓인 작가의 그 유명한 유리 주조 조각을 만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는 국제갤러리의 드로잉 작품들과 의미적으로, 장소적으로 오묘한 페어링을 이루고 있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두 작업이 같고 다름의 미묘한 풍경으로 읽히는 건, 그가 드로잉을 통해 의도한 지각 경험의 균열이 사실상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업이 바로 유리 주조 조각이기 때문이다. 어마한 밀도의 물을 장력으로 가두어둔 듯, 눈을 베어낼 정도로 투명한 이 조각은 유리의 형태와 물의 재질을 마주하는 인식의 혼돈을 야기한다. 실제 유리라는 것 자체가 액체와 고체의 중간 어디쯤 위치하는, 매우 가변적인 재료다. 게다가 조각을 마주하는 시간대, 설치된 장소, 보는 각도 등에 따라 미세하게 느낌이 달라지고, 이런 감각의 변화가 조각 자체에 가변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하는 감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유리 주조 조각은 인간의 경험, 즉 무언가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활동 자체가 매우 불완전함을, 그 가변성을 인정하는 작가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유리 주조 조각과 드로잉 조각의 공통적인 가변성의 출발점에는 바로 물이 있다. 매우 통합적이고, 가변적이며, 양성적인 물. 물은 무엇으로든 변할 수도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으며,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다. 침투를 당하기도 하고, 침범을 하기도 한다. 작가에게 물은 궁극적인 통합의 상징, 즉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모든 것이다. 유리 조각은 물론이고 아이슬랜드 온천에 몸을 담근 여자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담은 100장의 사진 작업 <유 아 더 웨더 2>, 아이슬란드 빙하 물로 수십 개의 기둥을 만든 <라이브러리 오브 워터>, 시시각각 달라지는 템스강의 수면을 찍은 작업 <스틸 워터> 등 매체 종류를 불문한 작업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하기에 본질적으로 취약한 물의 존재는 로니 혼에게 그 자체로 영감의 대상이다.
<프릭 앤 프랙스>를 보다 보면 유리 액자 너머로 여전히 물기 촉촉한 촉감이 느껴지고 물감이 자르륵 스며드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 드로잉을 보는 공감각적 즐거움 역시 수채물감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데서 맨 먼저 온다고 믿는다. 로니 혼이 드로잉 작업에서 물을 기반으로 한 수채물감을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이 하찮은 도구가 가진 현실적, 상징적인 취약성 때문이다. 수채물감은 물리적으로 아크릴 물감보다 취약하고, 그래서 보통 수채화는 유화보다 높게 평가받지 못하며, 이는 곧 시장에서도 취약하다는 얘기다. 중요하게는 수채물감은 학생들, 비전문가들이 쓰는 아마추어적인 재료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수채물감과 드로잉의 태생적인 취약함은, 그렇기에 로니 혼에게는 그 이상이다. 수채물감으로 그린 드로잉 역시 미술시장에서나 미술현장에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드로잉을 둘러싼 이러한 세간의 평가나 미술계의 기준에 절대 동의할 수 없고, 적어도 나만큼은 드로잉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겠다는 선언. 더 나아가, 취약한 드로잉을 심오한 매체로 간주함으로써 “(세상이 바라는 것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작가의 순진무구한 다짐이다. 평소 불면증이 있다는 로니 혼은 쉽게 잠들지 못하는 각성의 상태를 즐기며 거의 매일 드로잉을 한다.
세계 미술계에서 굳건한 위치를 점한 로니 혼은 역설적으로 취약한 대상에 무한한 애정을 품은 작가다. 실로 가변적인 물에, 시적인 문장에, 불완전한 인간의 감각에, 그리고 규정할 수 없는 작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마음. 그렇게 그가 보낸 숱한 불면의 밤에 힘입어 불과 몇 달 전, 현대적 숭고미를 포효하는 거대하고도 압도적인 조각으로 꽉 차 있던 K3 전시장 역시 놀라운 가변성을 발휘하고 있다. 작고도 고요한 드로잉은 같음과 다름의 기준을 통찰하고 현실에서 무언가를 실제로 감각하는 순간을 일깨움으로써 이곳에 들르는 모든 이들을 살아있도록 한다. 로니 혼이라는 작가의 실체를 가장 내밀하게 완성하는 드로잉 덕분인지, 보스락 소리가 날 듯한 초겨울의 날씨 때문인지, 지금 이 공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산뜻하고 해사하다.

Credit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인생, 예술> 저자>)
  •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Belén de Benito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