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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빠져들' 배우 한해인,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그녀를 만나다.
ACTOR'S CHAIR #2 배우 한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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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링 디테일 시퀸 드레스는 Self-portrait.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 홍보를 위해 바쁘게 지내고 있잖아요. 어때요, 요즘?
예전에는 이런 행사들이 있으면 좀 긴장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요새는 최대한 편안하게 즐기려고 해요. 어떤 반응이 올지 기대하고 상상하면 불안해지기도 하는데 걱정하는 데 힘을 쓰기보다는 지금에 감사하고 이 모든 상황을 그냥 제 자신으로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집중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변한 것 같아요?
날이 서고 예민해지는 것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아요.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쓰며 사는 게 좀 피곤하더라고요. 즐겁고 소중한 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커졌다고 할까요.
현재에 머물고 있네요.
네, 맞아요. 그게 쉽지는 않은데 계속 의식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마음과 감정에 끌려가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은 거기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려고 해요. 이 길을 익숙하게 터놓으면 앞으로 더 큰 상황을 마주했을 때도 삶을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믿음을 가지고요.
어쩌면 <나의 피투성이 연인>도 그런 이야기잖아요. 내가 가고자 하는 길 위에서 방해받고 싶지 않은 투쟁적인 마음요. 여성 예술가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몰입도가 높았을 것 같아요.
역할을 준비할 때 혼자만의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졌어요. 이 현장에서만큼은 ‘대사가 뭐였지?’ 같은 생각이 안 들기를 바랐어요. 인물에 체화되어서 현장에서는 오직 감정에만 몰입할 수 있는 상태 말이에요. 당시에 제가 개인적으로 마주해야 했던 불안감이라든지 창작자로서 겪어야 되는 외로움이나 고민 같은 것들을 캐릭터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죠. 이번만큼은 내가 마음 놓고 온전히 불안해하고 힘들어해도 괜찮겠다, 지독하게 여기 빠져보자,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캐릭터라는 안전지대인 거군요.
맞아요. 더불어 나 자신이 연기적으로 변화의 시기에 섰다는 감각은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만큼은 여태껏 부딪혔던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보고 싶다, 내가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하는 마음요. 지금껏 쌓아온 연기적인 테크닉이나 관습을 버리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창작자의 외로움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고, 영화 촬영 당시 외로웠다는 감정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 외로움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요?
촬영 때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이기도 했고 그 스산함이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맞닿아있기도 해요. 항상 뜨거운 감정을 연기하고 있음에도 어디선가 찬바람이 스며드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롯이 혼자가 되어 자기 감정을 마주해야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댈 곳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슬프게도 인생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요? 실은 혼자일 뿐이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순간들이 찾아오잖아요. 배우로서는 어떻게 느끼나요?
평가에 예민해지기도 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엄청 커지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나 자신을 한 구석으로 몰게 되죠. 다른 사람들보다 나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기지 못하게 되는 시간들을 오래 보냈던 것 같아요. 그러면 연기를 할 힘이 고갈되고요. 나르시시즘적인 말이 아니라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계속 귀 기울여줘야 한다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어요. 그건 정말 아무도 해줄 수 없는 거니까.
십대 때부터 연기를 했잖아요. 그 시작이 언제인가요?
중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시작하게 됐어요. 오디션 보고 그냥 별생각 없이 하게 됐는데 엄청 열정이 넘치는 연극반이었어요. 그래서 학창시절의 기억이 거의 연극부 생활뿐이에요. 그때는 다같이 모여서 어떤 마음을 나눈다는 것에 끌렸던 것 같아요. 이후로 예고에 가고 대학도 연극영화과로 진학하면서 계속 연기만 생각하고 살았죠.
연기의 길을 계속 걷겠다는 자의식은 언제 확고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요?
당시에는 연기를 통해 제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수행자 같아요.
(웃음) 그런가요? 전 연기를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고, 제가 작품에서 만나는 허구적 인물의 삶에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허구의 인물에 기댔다, 라는 표현 때문에 궁금해졌어요. 어린 시절부터 진지한 사람이었나요?
늘 삶에 대한 갈증이 컸던 것 같아요. 결핍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네요. 그걸 어떻게든 채우고 싶어서 발버둥치며 자라났죠.
그게 연기로 채워졌나요?
어느 정도는요. 그런데 거기 너무 의지하다 보니 작품이 없거나 쉬게 되면 불안하고 공허해지는 거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연기를 왜 해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스팽글 드레스는 Zara.
‘배우’로 등장했던 <폭설>이 떠오르네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도 그렇지만, 작품 속 인물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핵심 감정이 불만족이라고 여겨졌어요. 불안 이전에 불만족. 현실에 불만족해서 미칠 것 같은 그런 여성들을 봤거든요.
저도 계속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유롭고 싶어서 연기를 시작했는데 그게 오히려 나를 얽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저를 마냥 차분하고 평온한 사람으로 생각해주시는데 사실 저는 늘 전쟁터에 있거든요. 이제는 허구적 인물에 기대어 느끼는 자유로움이 아니라 진정한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앞으로 만나게 될 감정들이 내 몸을 통과해갔으면 좋겠다, 통로로서의 자유로움을 경험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건 굉장히 큰 변화네요. 중심이 완전히 달라진 거잖아요. 연기에 어떤 신성을 부여하는 발언이기도 하고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제목은 인물의 내면을 은유하는 표현이잖아요. 스스로 그렇게 피투성이 같았다고 느꼈던 시절이 있나요?
이십대 후반쯤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방황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그런 시기였어요. 당시에 꽂혀있던 시가 있었는데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하늘에 마구 총을 쏴대는….(웃음)
분노가 있었군요.(웃음)
네, 원망하고 싶은데, 특정 대상도 없고. 길거리에 바람이 부는데 버려진 캔 하나가 탕탕거리면서 막 굴러다니는 것처럼 살았던 것 같아요.
내면을 닦는 수행자 같은 느낌인데, 요즘 가장 치열하게 생각하는 건 뭐죠?
예전에는 나를 사랑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그 사랑이 어떤 건지 잘 몰랐고 그거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게 좋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죠. 지금은 그냥 나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판단하지 않는 것, 그걸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게 자기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런 방법을 체화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지금 이 순간에도 오만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데 어떻게 내 모든 감정을 캐치하고 사랑할 수 있겠어요. 다만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기 위해 새로운 마음의 길을 내고 그 길을 닦고 있다는 것을 응원할 뿐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도 나 자신을 보여주려고 계속 덧붙이고 꾸며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거든요. 사회적 기준으로는 그게 성공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
생각이 거기까지 가기 이전에 어떤 내려놓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라면 이런 고찰도 하지 않았겠죠.
그렇죠. 저도 어린 나이에 성공하고 싶었고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고도 싶었고, 그런데 그렇게 안 됐거든요. 그게 저한테 너무나 아팠고, 큰 좌절과 공허함도 느꼈고, 그러니 하늘에 총을 쏘는 시도 읽고.(웃음) 그러다 보니 이제는 외부보다 나한테 의식을 두는 게 조금 더 현명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원하는 만큼 도달하지 못할 때, 뭐가 문제인지 도저히 모르겠는 때, 나 자신이나 세상에 화도 나고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사실 엄청 때려치우고 싶었죠. 사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왜 때려치우지 않는 걸까요?
그러게요.(웃음) 현실적으로 내가 이만큼 마음을 두고 있는 일도 없을뿐더러 일단은 끝까지 가보고 싶다, 아직 끝이 아닌 것 같다, 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인 것 같아요. 더 해봐야 될 것 같은 기분. 그것 때문에 계속 가는 힘이 생기는 것 같고, 어차피 이왕 갈 거면 이전과는 달리 조금 더 건강한 방식으로 가보려는 의지가 드는 것 같아요.

셔링 디테일 시퀸 드레스는 Self-Portrait. 부츠는 Givenchy.
지난 7월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카를로비바리 영화제(프록시마 그랑프리 수상)에 초대되어서 해외 관객들도 만났잖아요. 환기되는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정말 좋았어요. 극장에 장애인 관객도 많았고, 그들을 위한 편의 시설도 잘 되어 있었어요. 그런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 일단 좋았고,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의 관객들이 우리 영화에 솔직하게 반응해주셨던 게 흥미로웠어요. 마냥 심각하지만은 않은 방식으로요.
자유로웠을 것 같아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의외로 우리는 한결 가벼워지잖아요. 요즘 그렇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잠영하는 것도 새로운 한해인의 작동 방식을 얻기 위해서이지 않을까요?
그런 것 같아요. 연기하면서 느끼는 어떤 최대치의 자유를 흠뻑 느껴보고 싶은 동시에 인간으로서 그런 상태를 잠시잠깐이라도 경험하고 싶다는 갈망이 저를 계속 변화시키는 것 같아요. 사람들한테는 제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배우라는 일의 기쁨과 슬픔이 뭘까요?
일단 기쁨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죠. 이야기나 미술이나 촬영이나 모든 요소가 형상화된 것임에도 결국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잖아요. 작품과 관객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공유됐다면 그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것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정말 아름다운 일이에요. 그 시도만으로도 충분히요. 그런데 슬픔은, 작품 하나로 내가 판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죠. 촬영 상황이 안 좋았을 수도 있고, 그때 나의 한계였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으로 오래 기억된다는 데서 오는 불안과 괴로움이 있어요.
배우가 되고 난 후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나요?
이게 참 어려운데요.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저를 더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 같기도 해요. 빠뜨렸다가 꺼내줬다가 빠뜨렸다가 꺼내줬다가의 연속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밑바닥에 가봐야만, 내 안의 지옥을 경험해봐야만, 천국을 느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니까. 그 힘으로 또 내 삶을 돌보게 되었으니까 결론적으로는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Credit
- 프리랜스 에디터/ 김현민
- 사진/ 김영준
- 헤어/ 한지선
- 메이크업/ 홍현정
- 스타일리스트/ 김경선
- 어시스턴트/ 허지수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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