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Y

겔랑의 인생 향수는 누가 만들까?

마스터 조향사 티에리 바세와 나눈 이야기

프로필 by BAZAAR 2023.11.01
 
 

Thierry Wasser,

Guerlain Master Perfumer 

차가워진 바람에 익숙해질 무렵, 겔랑의 마스터 조향사 티에리 바세가 한국을 찾았다. 세계적 조향사인 그는 2007년 겔랑 향수와 인연을 맺은 후 장 폴 겔랑(Jean-Paul Guerlain)에게 원료 조달과 기획, 생산에 이르기까지 향수 명가의 노하우를 전수받는다. 그리고 2008년 겔랑 하우스의 다섯 번째 마스터 조향사로 임명된다. 기존 마스터 퍼퓨머가 모두 겔랑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유의미한 일이다. 그렇게 그는 몽 겔랑, 아쿠아 알레고리아, 겔랑의 프리미엄 컬렉션인 라르 & 라 마티에르 컬렉션 등 겔랑 하우스의 향을 탄생시킨다.
티에리는 여전히 희귀하고 귀한 소재들을 찾기 위해 온 세상을 여행한다. 그래서인지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에는 탐험가로서의 예리함과 섬세함이 담겨있으며, 유머러스하고 위트 있는 대화에서는 예술가다운 기발함을 엿볼 수 있었다. 삼청동의 한옥을 배경으로 선 그의 모습은 생경하면서도 여유로웠다.
 
 
Guerlain 토바코 허니 100ml 49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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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혹자는 비행기에서 내리면 그 나라 특유의 향이 느껴진다고 하던데, 어떤 향을 마주했나요?
공항에서 나는 등유 냄새요.(웃음)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케로신 냄새는 저에게 큰 반가움이에요. 당시 제네바공항은 테라스로 나가 비행기를 감상할 수 있었고, 일요일이면 할머니와 공항에서 비행기를 구경하곤 했어요. 그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래서 공항에 오면 매번 어린 시절로 여행을 떠나게 돼요. 아, 죄송합니다. 질문에서 벗어난 답변이었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향은 경험이자 기억입니다. 스위스에서 보낸 유년기를 추억하게 하는 또 다른 향이 있다면?
요리사를 꿈꿀 만큼 요리와 베이킹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살구파이를 즐겨 만들었어요. 살구를 오븐에 데우거나 팬에 두면 향이 더 강하게 올라와요. 지금도 살구를 구울 때면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하고요.
허벌리스트를 꿈꾸기도 했다고요. 조향사가 된 건 운명이었나요?
네, 분명한 것 같아요. 우연한 계기로 조향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제가 향수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향수가 저에게 찾아왔다고요.
최고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악기 연주자는 손을 관리하고 운동선수는 몸을 단련합니다. 당신은 예민한 후각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나요?
저 역시 훈련을 받습니다. 파리에 있을 때 루틴이 있었어요. 매일 아침, 실험실 조수가 생원료를 적신 스트립을 가져와 퀴즈를 내곤 했죠. 기억력을 단련하기 위해서요. 마치 피아니스트가 음계를 연습하는 것과 같아요.
조향에 쓰이는 기본 원료만 3천 개 이상이라고 알고 있어요. 향을 외우는 방법은요?
단계별로 원료를 배워야 합니다. 알파벳을 배우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다음 단어를 익히고 문장을 만들면 비로소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최근 향료와 노트 조합 등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향을 추천해주는 AI가 향수 업계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기사가 났어요.
향수는 단순한 화학적 결합체가 아닙니다. 매우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소비 영역이죠. 인공 지능이 선택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어떻게 그 감정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상상력을 키우거나 영감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있다면?
특별할 건 없습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균형을 지키는 습관은 있습니다. 여덟 살 때인가 집에 있는 수많은 레코드 중 샴 고양이 사진에 매료되어 한 LP 판을 듣게 되었어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는데 어린 저에겐 놀라움이자 경이로움이었죠. 그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매일 앉아서 그 한 곡만을 오롯이 감상했습니다. 그렇게 제 가슴속에 각인된 수많은 작품들이 있어요. 이는 명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음악에 완벽히 집중하고 기억하기 때문이죠. 오케스트라 음악은 매우 추상적입니다. 향수처럼 말이죠. 또 음악과 향은 모두 보이지 않아요. 둘 다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도 하고요.
그럼 향을 창조하는 일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그것과는 달라요. 지휘자는 악보를 해석해야만 하죠.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썼으니까요. 향수 디자이너는 악보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그 향수를 자신만의 공식으로 해석해 뿌리는 당신이 곧 지휘자가 되죠.
지금도 인디아나 존스처럼 원료를 구하러 다닌다고요.
맞아요. 일 년의 시간 중 35%는 원료를 구하는 데 쓰고 있어요. 원료를 찾는 것에서 엄청난 기쁨을 느낍니다. 또 농부나 수확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경험이에요.
그렇다면 일하면서 가장 어려운 과정은 무엇인가요?
조향사로서 작업할 때 자주 혼자 있어야만 합니다. 이 외로움이 종종 무겁게 느껴지지만 결국 도전적인 순간들이에요.
 
 

“조향사는 마치 오페라의 악곡을 쓰는 작곡가와 같아요. 오페라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조화롭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죠.”

 
 
마스터 조향사로서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전통과 혁신의 균형을 이루는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은 일이죠.
그건 어렵지 않아요. 2008년 겔랑에 합류했을 때 스승이자 전임자인 장 폴 겔랑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향을 디자인할 뿐만 아니라 원료를 소싱하고 제조하는 모든 과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조향사가 이 모든 단계를 책임지는 곳은 아주 드물어요. 2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독특하고 특별한 작업이죠. 또 가끔은 상징적인 향수들을 재해석해야 합니다. 겔랑에서 제조한 가장 오래된 향수는 1853년 출시되었으며 그 다음은 1889년에 선보인 지키(Jicky) 오 드 코롱이에요. 그 이후에도 1912년 뢰흐 블루, 1919년 미츠코, 1925년 샬리마, 1989년 삼사라 등 굉장한 작품들이 탄생했죠. 현재는 이를 위한 팀이 따로 구성됐으며 그 중심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델핀 젤크가 있습니다. 델핀은 현대적이며 매력적으로 향을 재창조해냅니다.  
조향사 델핀 젤크의 감정이 담긴 ‘토바코 허니’가 라르 & 라 마티에르 컬렉션에 새 식구가 되었어요.
‘토바코 허니’는 이탈리아 아르테 포베라 아트를 떠올리게 해요. 이는 1960년대 성행한 아방가르드 예술양식으로 식물, 광물, 폐기물 등 원시 상태의 재료를 한데 모아 하나의 작품 그 이상을 창조합니다. 우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재료로 창조한 대조적인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꿀과 담뱃잎, 상상이 안 가는 조합이에요. 향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주세요.
달콤한 꿀과 터프한 토바코가 독특하고 중독적인 향을 선보입니다. 여기에 바닐라, 통카빈, 세사미가 따스함을 더하죠. 베이스에 다다르면 달콤하고 크리미한 샌들우드와 강렬한 오드가 혼합된 우디 노트가 향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 후 탄생했나요?
완벽한 조화를 찾는 데 몇 달이 걸렸습니다.
향수 보틀은 물론 성분을 채취하는 과정에서도 지속가능성을 실천했겠죠.
원료를 조달하는 방식은 늘 윤리적입니다. 2019년부터 UEBT(연합 생물다양성 전문기관)의 회원이 되어 지속가능성 상태를 진단받고 필요한 경우 개선 계획을 수립하죠. 보틀은 아쿠아 알레고리아처럼 리필 가능하도록 고안되었으며 일부 재활용 유리를 사용하였습니다.
향수를 만들고 구상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균형이요. 토바코 허니를 예로 들어보죠. 여기에는 다른 두 가지 원료가 있으며 이들의 목소리는 매우 다릅니다. 조향사는 마치 오페라의 악곡을 쓰는 작곡가와 같아요. 오페라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조화롭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죠. 여러 사람이 한 방에 모여 각각 다른 대화를 나눈다고 상상해보세요. 이건 곧 소음이 됩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에선 반열 이상의 역할이 각각의 대사를 하지만 소음이 아닌 조화가 되죠. 스크립트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곧 악보이자 공식입니다.
균형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이러한 이유로 완벽한 화음을 이루는 향수를 레이어링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향수의 최종 목표는 사용하는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래서 무언가를 금지하거나 지시한다면 그건 마치 어떤 독재자가 “여러분은 이제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죠. 향기에 규칙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레이어링을 하고 싶다면 하세요. 사람들은 가끔 자유를 두려워합니다. 스스로의 기쁨과 행복에 온전히 집중하세요.
캡 상단의 플레이트 등을 직접 고른 후 메시지를 각인할 수 있는 것이 라르 & 라 마티에르 컬렉션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죠. ‘토바코 허니’에 각인을 한다면?
With Love, Thierry!
주목하는 향수 트렌드가 있나요?
지속가능성, 자연성, 유니크.
마지막으로 향에 대한, 향수에 관한 상상력을 펼쳐주세요.
최근에는 오렌지 꽃과 같은 화이트 플라워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어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시겠죠? 멀지 않은 미래에 알게 되실 겁니다.(웃음)
 

Credit

  • 에디터/ 정혜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