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아니쉬 카푸어가 새로 쓴 숭고의 신화
예술의 초월성을 탐구하는 아니쉬 카푸어가 새로운 신화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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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ish Kapoor. All rights reserved DACS/SACK, 2023

국제갤러리 3관(K3)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 «Anish Kapoor» 설치 전경. ⓒ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3관 공간은 어떤 작품이라도 품을 수 있다는 장점을 이번 전시에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일과 시간에는 사대문 안의 도로를 이용할 수 없어 꼭두새벽에 이동해야 했을 정도로, 집채만큼 큰 크레이트에 실려온 네 점의 조각들이 이 공간을 재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조각가로 만드는 건 공간에 대한 이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작업세계에서 ‘공간을 만든다’는 개념은 중요하다. 카푸어의 공간성은 작품 안팎의 익숙한 질서를 재편하면서, 보는 이의 신체적 감각을 극대화한다. 조각들의 무게는 5백 킬로그램에서 7백 킬로그램 정도, 높이는 최대 4미터에 육박하는데, 문제는 이들이 벽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눈, 즉 신체가 지각하는 바는 확연히 달라진다. 바닥에 놓일 때는 무게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벽에 걸려있기에 어느 정도로 무거운지 새삼 생각하게 되거나, 무게의 정도를 아예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작품의 크기 같은 물리적 스케일은 비단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을 결정 짓기도 한다.
범주화하기 힘든 카푸어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이 조각들은 더욱 철저히 감각을 교란시키는 데 매진한다. 오늘도 나는 이 일그러진 물체 앞에서 ‘이게 뭔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선 이들을 목격했다. 하지만 실리콘과 파이버글라스를 섞어 만든 재료임을 알고 나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실리콘이 각종 의학적 과정을 통해 주로 몸 안에서 활약하는, 즉 신체적 재료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인지하는 순간, 운석이나 바위처럼 보였던 조각이 장기 내지는 내장으로 돌변하고, 해부학적 덩어리를 감싼 얇은 거즈는 피부로 스멀스멀 변신한다. 이 얇은 막의 위력은 대단하다. 없던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써, 조각에 내부와 외부의 개념을 부여한다. 또한 무의식적으로 보는 우리를 내부로 이끄는 제스처를 취하는 듯하나, 실은 안을 명료하게 볼 수 없기에 진입을 저어하게 된다. 게다가 얽히고 설킨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막을 뚫고 튀어나와, 마치 잠에서 깨어나보니 기괴한 벌레로 변해있던 소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다른 상태가 될 것 같은 긴장감까지 엄습한다.
보이는 동시에 보이지 않고, 볼 수 있지만 볼 수 없으며, 더욱이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 참으로 불편하고 기이한 상태다. 하지만 이건 비단 작품만이 야기하는 감정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모든 걸 알거나 통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시대를 살고 있고, 카푸어는 이토록 이해불가한 세상의 상태를 예술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이 애매한 상태야말로 우리가 살면서 겪는 불확실성을 의미한다”는 작가의 말이 자신의 악취미적 예술성을 포장하기 위한 변명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공교롭게도 이번 개인전은 온갖 물질성과 정신성으로 무장한 ‘현대미술’ 작품들이 대거 쏟아지는 시기에 맞춰 열렸다. 시공감각 이면의 세계를 펼쳐놓는 카푸어의 ‘원시적’ 조각들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시기라는 얘기다. 사실 전시라는 이벤트는 그 자체로 지극히 현대적인 산물이다. 중세 이전에는 그 역할을 사원과 교회, 그리고 귀족의 집이 맡아 했으니까. 하지만 예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의 중간쯤 되는 상태에 집중하고 알아가는 것. 카푸어가 스스로를 ‘미스터 비트윈’이라 칭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인도 태생의 영국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제갤러리 1관(K1)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 «Anish Kapoor» 설치 전경. ⓒ 국제갤러리
캔버스 위에서 덩어리 진 물질들이 포효한다.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마그마가 되었다가, 내장을 파헤친 듯 선혈이 낭자했다가, 피와 살점이 용솟음치는 광경을 드러낸다. 시뻘건 작품들 가운데, 프랜시스 베이컨을 연상시키는 으스스한 검은 덩어리 작품만이 죽음의 두려움을 암시하는데, 이 대조가 잔혹할 정도로 선명하다. 그의 회화는 인체와 폭력을 이해하고자 그림을 그렸던 르네상스 이전 시대처럼, 신성함과 잔혹함을 양손에 쥐고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생을 향한 강렬한 열망, 생명력에 대한 뜨거운 욕망, 그리고 날것이기에 띨 수밖에 없는 취약성과 불완전함으로 범벅된 채, 현존과 부재를 구현하며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쉬고 있다.
그의 회화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며, 파괴적이고, 관능적이며, 성적인 동시에 제의적이기까지 한데, 이런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카푸어는 특유의 레드를 애용한다. 그에게 붉은색은 본질적으로 보편적인 인간의 몸, 즉 피를 상징한다. 피가 아래로, 즉 대지를 향해 흐른다는 점도 주목한다. 그래서 작가에게 가장 제의적인 물질은 피와 흙이며, 이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1990년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작가였을 때도 흙으로 작업했다.) 이렇게 살과 피를 다루는 회화를 통해 그는 신체성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제시한다. 신체성이 암시하는 현존과 부재라는 건 곧 탄생과 죽음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기원과 소멸 같은 추상적 개념에까지 가닿는다.
흥미로운 건 카푸어가 피에 집착하는 이유다. 그에 따르면 남자가 피를 마주할 수 있는 계기는 살인을 하거나 사냥을 할 때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여성들은 일종의 자연적인 주기로 피를 만나고, 작가는 월경과 출산을 은유함으로써 세상의 본질적인 순환을 이야기한다. 인류학자인 크리스 나이트의 저서 <Blood Relations>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인류의 문화는 8만 년 전 월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게 요지이다. 여자들이 월경을 숨기기 위해 붉은 황토를 몸에다 발랐고, 이런 의식이 곧 예술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가설을, 카푸어는 붉은 작업을 통해 지지한다. 지금도 작가는 모든 창조 행위가 본질적으로 여성적이라 믿는다. 아마 오늘의 회화에서 여성의 특정 신체 혹은 여성성을 떠올린다면 그런 이유일 것이다. 시뻘건 혀를 내민 회화 역시 창조와 파괴, 죽음과 부활 등을 관할하는 인도 여신 칼리에게서 영감받은 작업이다. 말하자면 카푸어에게 붉은색은 안료를 넘어 여성과 대지, 아름다움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포토존으로 자리매김한 이 기괴한 형상의 작업 <Tongue>(2017)을 보면서 여신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보다 전통적인 회화 매체를 전복하고자 하는 작가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게 더 손쉬울지도 모르겠다. “회화는 무언가를 가시화하는 방식에 대한 역사이지만, 나는 정반대로 회화를 통해서 무언가를, 어떻게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천착한다”는 야심 말이다. 예술은 곧 물질의 역사이다. 조각은 말할 나위 없고, 회화 역시 물감이 발린 캔버스 표면이 처음이자 끝이다. 그러나 카푸어는, 2차원인 회화를 3차원으로 구현한 혁신적인 미술가들처럼, 늘 그 표면을 넘어서고자 열망했다. 조각 내부에 공간을 만든 그는 조각이나 진배없는 회화에도, 심지어 평면적인 드로잉을 통해서도 같은 시도를 한다. 틈새, 내장, 구멍, 상처, 창 혹은 문 등을 은유하는 모티프의 정체도, 색과 질감만으로 어딘가로 빨려들어갈 듯한 입체감을 살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작가에게 육체의 내부는 편안하면서도 무섭고, 보호받으면서 제한적이고, 창조적이면서도 파괴적인 미지의 영역이다.
보이는 표면을 통해 보이지 않는 내부를 드러내면서, 물질로서의 회화가, 회화의 물질성이, 즉 표면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는 ‘사라지다’의 본뜻이다. 그리고 표면이 사라진 이 자리에 3차원의 공간이, 더 나아가 4차원의 개념이 생겨난다. 삶의 양가적인 신비를 향한,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을 향한 관문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성스럽고도 악마적이고, 열린 동시에 닫힌 공(空)의 존재가 표면을 무화시킨다. 그렇게 회화의 이면, 내부로 상징되는 불가사의하고 초월적인 차원이 만개한다. 우리는 이것을 예술의 영적 세계라 부른다.

국제갤러리 2관(K2)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 «Anish Kapoor» 설치 전경. ⓒ 국제갤러리
나는 언젠가 무자비하고 잔혹할 정도로 기운 센 미술의 영향력을 ‘스탕달 신드롬’에 빗대어 글을 쓴 적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압도적이고도 남다른 감각은 이 블랙 덕분에 가능하다. 반타블랙으로 알려진 이 검정은 머리카락 굵기 1만 분의 1 정도인 탄소구조체가 빛을 99.96% 흡수하는 신물질이자, 블랙홀 다음으로 우주에서 가장 검은 블랙이다. 실제 안료 자체가 매우 미세한 나노 구조로 구성되어, 과학적으로도 물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극도로 정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만큼 치밀하다. 이쯤 되면 레드가 상징인 것처럼, 블랙 역시 단순한 색이 아니라 기술이자 기법이다. 카푸어는 아예 이 안료의 독점 사용권을 구입해 지탄을 받기도 했고, 그래서 반타블랙이라는 용어 대신 ‘카푸어 블랙’ 혹은 ‘울트라 블랙’이라 불린다. 하지만 이런 가십보다 중요한 건 이 블랙이 선험적인 경험을 갈망하는 그에게 중요한 조형언어이자 방법론이라는 사실이다. 물질과 비물질의 가장 첨예한 경계에서, 물질적인 것과 환영적인 것 사이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논 오브젝트’인 블랙이다.
울트라 블랙은 작가의 대표 연작인 <Non-Object Black> 조각으로 하여금 감각을 어지럽히고,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의심하게 하는 권능을 부여한다. 모든 빛을 흡수하기에, 어떤 구조의 사물이라도 그 고유한 입체성을 소멸시킨다. 보고 있는 데도 보이지 않게 만든다. 2차원을 3차원으로 만들려고 애쓰던 그가 반대로 3차원을 2차원으로 구현한 셈이다. 그리고 허공에 표표히 떠 있는 듯한 블랙 오브제는 보는 시선과 각도에 따라 입체와 평면의 영역을, 형태와 비형태의 상태를 부지불식간에 넘나들며 보는 이를 현기증의 상태에 빠뜨린다. 서서히 용해되는 듯 일순 사라져버렸다가 다시 스르륵 생겨나는 블랙의 경계는 한없이 부드러운 동시에 안구를 베어낼 정도로 날카롭다. 지금 무엇을 본 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헷갈리는 사이, 카푸어가 가장 물질적인 장르인 조각을 통해 비물질성(논 머티리얼)과 비정형성(논 오브젝트)를 탐구해온 작가라는 사실이 나의 몸에 각인된다. 혼란 없이는 각성도 없다.
과거의 어느 날, 스튜디오에 머물던 카푸어는 느닷없이 구 형태의 오브제를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만들었다. 이걸 벽에 걸어 두고는 특유의 진한 파랑색으로 칠했다. 그랬더니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 사물이 그것이 아닌 무언가로 변했다.” 물체도 아니고, 구멍도 아니며, 색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이상한 상태. 물성의 창출과 파괴를 동시에 고찰함으로써 비물질성, 비정형성의 조건을 연구하고, “보는 이를 지극히 자극적이면서도 시적인 사이(in-between)의 상태”에 두는 것이 바로 그의 전매특허다. 전시의 말미에 불현듯 떠오른 이 에피소드는 나의 사유와 감각을 어김없이 도입부로 데려다 놓았다. 카푸어의 초월적이고 상징적인 세계, 아름다움을 극복하려는 현대적 숭고에 관한 신화를 맨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을 시간이다. 언제 읽어도 새로운 신화다.
Credit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인생,예술> 저자)
- 에디터/ 손안나
- 사진/ ⓒ 국제갤러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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