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EBRITY
홍진경의 데뷔 30주년을 축하하며!
모델로, 예능인으로, 사업가로, 유튜버로. 똑똑한 진화를 거듭해온 홍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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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코더로 셀피를 찍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늘 화보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거창하게 말하면 30년 동안 그렇게 TV 안에서 우리 옆에 함께했다. 이렇게 오래 활동할 줄 알았나?
누가 내일의 일을 장담할 수 있겠나. 그냥 하루하루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바빴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데 올해 들어 불쑥불쑥 실감하긴 했다. 30년이나 걸어왔구나. 운이 참 좋았구나.
재작년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사랑이든 삶이든 다 태우지 못했을 때 미련이 남고 그런 미련이 사람을 좀먹는다. 해볼 만큼 해봤다면 이별에서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30년의 활동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후련한가?
30년간 매 순간을 치열하게 연소시키며 살았다. 그래서 어떤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았다. 요즘은 조금 다른 것도 같다. 젊었을 땐 열심히 산다는 이유로 내 감정을 돌보지 않고 몰아붙였다면 이제는 나를 더 생각한다. 남들이 봤을 땐 덜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건 열심히의 문제가 아니다. 40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나를 아끼게 됐다.

돌아보면 일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나? 책임감 때문이었나?
그보단 나에게 일을 주는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서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면 몸 사리지 않고 웃기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홍진경이 나오는 예능은 다 재미있다는 얘기가 나오더라. 시청자가 그렇게 느끼게 하고 싶은 거다. 일 욕심과는 조금 다르다.
모든 걸 연소하고야 마는 삶의 자세가 방송, 육아, 사업 모든 분야에 적중했다고 생각하나?
엄마 역할은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애를 잡는다. 알아서 하라고 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아이의 성적이 오르더라. 연애도 마찬가지다. 애인에게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연예계 생활도 그렇다. 여기는 대중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 세계다. 노력한다고 사랑을 주는 건 아니더라.

그렇다면 본인이 3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 뭐라고 진단하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지 않나. 굵지 않고 가늘어서 길게 활동할 수 있었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적이 없다. 정을 맞지 않을 낮은 위치에서 잔잔하게 버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나 웃기지 않나?(웃음) 주우재가 그러더라. “누나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웃잖아. 나는 누나가 제일 부러워.” 나에게는 웃음이라는 무기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울게 하는 사람보다 웃게 하는 사람에게 훨씬 점수를 후하게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일을 해올 수 있지 않았을까.
모델 시절을 떠올리자면, 데뷔부터 센세이션이었다. 한국인 최초 베네통 화보 모델로 일간지에 대서특필되며 주목을 받았던 것도 기억난다. 그런데 어느 인터뷰에서 ‘그 시절이 너무 치열했기 때문에 하루만 지나도 기억에서 지워졌다’고 말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슬프다. 나는 모델계와 맞지 않는 외모였다. 키만 컸지. 어떤 걸 입든 천부적으로 소화하는 모델들 사이에서 그러지 못했고 스스로를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능에선 달랐다. 예능을 하면 확실히 마음이 편했다.

그 어린 나이에 웃음에 대한 철학이 있었던 건 아닐 텐데.
그때만 해도 망가지고 웃긴 이야기를 하는 걸 창피해하고 즐기지 못했다. 억지로 했지. 그러다 삼십대에 난소암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무한도전>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병실 여기저기 곡소리가 나는데 나는 <무한도전> 덕분에 웃으면서 치료받았다. 그때 알았다. 웃음을 준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지금은 어떤 분장을 하든 창피하지 않다. 남을 웃긴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이제는 본인보다 딸 라엘이 열일곱 살에 더 가깝다. 그때의 홍진경 에게 엄마의 마음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너는 30년 후에도 <바자> 화보 촬영을 하게 될 거야. 그 말 한마디면 될 것 같다. 30년 후에도 내 몸과 마음 커리어 모든 게 괜찮은 상태라는 의미일 테니까. 누군가 잠결에라도 그렇게 귀띔해줬다면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었을 텐데!

2013년엔 난소암 판정을 받고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투병으로 인한 삭발 머리를 그대로 드러낸 흑백 화보가 기억에 남는다. 그 맨 얼굴이 참 예뻤어서 이번 화보에도 그런 담백한 얼굴이 보이는 장면이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어떤 시기였나?
아파서 흔들린 적은 없었다. 죽음을 생각한다고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죽으면 죽는 거지 어차피 다 죽는 건데 조금 더 살면 뭐. 불행하게 삶을 연장하는 것보다 행복하게 죽는 게 더 낫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암 선고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 당신을 두렵게 하는 존재는 역시 사춘기 딸 라엘인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자식이다. 사람은 원래 자기 주머니 안에 귀한 걸 넣어두면 잃어버릴까 다칠까 불안하기 마련이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그 반짝이는 돌멩이가 없는 사람은 무서울 게 없다. 젊은 날의 내가 그랬던 것 같고. 두번째로 두려운 건 김치 사업이다.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다루지 않나. 옷이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진 않는다. 그런데 식품은 잘못되면 정말 큰일 나는 거니까 항상 노이로제 상태다. 우스갯소리로 엄마한테 그랬다. 우리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절대 식품 사업 하지 말자고.

사업가로는 미국 진출에 집중하고 있다고 들었다. 마침, 좋은 소식이 있다던데.
오랫동안 미국 진출을 타진해왔고 얼마 전 첫 번째 발주를 받았다. 미국의 대형마트에서 내 김치가 팔린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하다. 김치와 관계없이 계획 중인 다른 사업도 있어서 법인회사를 하나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다.
계속 사업을 확장하는 이유는? ‘장사의 맛’이란 원래 그런 걸까?
나는 책도 그런 식으로 읽는데 어떤 책을 보면 그 다음 책이 궁금하고 또 그 다음 책이 궁금하다. 김치 사업으로 미국에 갔더니 외국인들이 한국 음식에 열광적이고 기본적으로 한국 문화를 아주 사랑하더라. 그 모습을 보니까 불쑥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 회사는 상장사가 아니다. 투자자도 없고 목표 매출도 없다. 남의 돈은 원래 10원 한 장 마음 편히 쓸 수 없는 법이지 않나. 그래서 나는 속 편하다. 장사가 되면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하고 싶은 거 한다.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언가를 팔아보고 사봐야 한다고 하더라. 누군가의 지갑을 열게 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지 않나.
나는 내가 일종의 프로듀싱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가 아니라 PD라고 불렸으면 좋겠다. 장사는 디자인 폰트 하나부터 홍보 마케팅까지 모든 걸 아우른다. 장사는 종합예술이다.
10년 전, 싸이월드에 이런 일기를 썼다. “10년 전에는 오늘이 마치 대단한 미래사회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그때는, 10년이나 지난 오늘에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물냉면을 좋아하고 늦게 자는 습관도 그대로예요.”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지금은 어떤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나?
여전히 물냉면은 좋아하고, 이제는 일찍 잠에 든다. 아프고 나서부터 생긴 습관이다. 밤 10시쯤에 자고 아침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일어난다.

“그렇지만 달라진 것도 분명히 있어요. 그렇게 친하던 몇몇 사람들과도 소원해졌고 내 살갗과 표정도 조금은 나이를 먹네요.” 그 뒤 문장이다.
그런데 10년 전 사진 보면 그때도 애다. 어쩜 그렇게 젊었는지. 그러니까, 내 살갗과 표정은 오늘이 제일 어리다.

지난번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없으면 그게 행복’이라고 말한 건 본인이 능동적 행복을 좇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해석을 덧붙였다. 당신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을 말해달라.
젊은 날 나만의 행복의 조건을 찾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고 지금은 어느 정도 충족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내 경우엔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방송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게 싫어서 사업을 시작했다. 돈은 사업으로 벌고 내가 좋아하는 예능에선 나만의 개그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유튜브가 좋다. 내 채널인 만큼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할 수 있어서. 물론 구독자들이 많이 봐주셔야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지금은 안정세에 들어섰다. 덕분에 이제는 조급해하지 않고 진정으로 일을 즐기고 있다.
30년 동안 연예인으로 살아왔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밈이 있지 않나. 가끔 아무도 자신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톱스타나 하는 거다.(웃음) 나는 지금도 누가 나를 알아봐주면 고맙고 또 감사하다. 영국에 더들도어라는 지역이 있다. 바다만 건너면 프랑스인 땅끝마을. 여행 중에 그곳에 있는 작은 모텔에 들어갔는데 그곳 카운터에 앉아있는 백인 여성이 나를 알아보더라. <별에서 온 그대>에서 봤다며. 얼마 전 뉴욕에 갔을 때도 스테이크 가게 서버가 나를 <솔로지옥>에서 봤다고 아는 체하더라고. 얼마나 반갑던지. 누가 자기를 알아보는 게 싫다고?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연예인 하면 안 된다.

유명인 홍진경의 슬픔과 기쁨이 있다면?
운전 중에 누가 말도 안 되게 확 끼어드는 사람에 사고가 날 뻔했다. 딸의 친구의 생일 파티의 케이크를 픽업해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케이크가 죄다 망가진 거다. 내 딸이면 괜찮은데 내 딸의 친구가 잔뜩 기대하던 케이크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창문을 슥 내렸더니 상대방이 첫 마디로 이렇게 얘기하더라. “홍진경 씨, 팬이에요.” 팬이라는데 더 이상 뭘 어쩌겠나. 그 말이 너무 비겁하게 느껴져서 살짝 눈물이 났다. 하지만 이건 특수한 상황이고. 가식이 아니라 김치, 예능, 유튜브 이렇게 세 가지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어떤 분은 김치 고객일 수도 있고, 어떤 분은 내가 나오는 예능의 시청자일 수도 있고, 어떤 분은 ‘만재’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대중이 나의 먼 친척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 잘 살고 싶다. 그분들에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말 한마디, 눈 인사 한 번만이라도.

어떻게 늙고 싶은가?
언제나 이렇게 기억되고 싶다. 같이 놀고 싶은 언니, 누나. 아니, 그냥 같이 놀고 싶은 ‘사람’.
Credit
- 에디터/ 손안나
- 프리랜스 에디터 & 스타일리스트/ 김숙원(SWV)
- 사진/ 장덕화
- 헤어/ 신가베
- 메이크업/ 이솔
- 스타일리스트/ 조유정,김민주(SWV)
- 세트 스타일리스트/ 최서윤(다락)
- 어시스턴트/ 허지수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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