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태권V를 꿈꾸던 아이는 어떻게 현대미술가가 되었나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로봇 태권V를 꿈꾸던 아이는 어떻게 현대미술가가 되었나

인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BAZAAR BY BAZAAR 2022.12.05
 
 ‘기계생명체’의 창조자 최우람이 이번엔 작은 방주를 건조했다. 인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예술가의 질문이 방향 상실의 시대를 항해하는 우리에게 귀중한 나침반이 된다.
 
〈작은 방주〉, 2022, 폐 종이 박스, 금속 재료, 기계 장치, 전자 장치(CPU 보드, 모터), 210x230x1272cm.

〈작은 방주〉, 2022, 폐 종이 박스, 금속 재료, 기계 장치, 전자 장치(CPU 보드, 모터), 210x230x1272cm.

인터넷 밈이 될 정도로 화제를 모은 작품 〈원탁〉 얘기부터 해보자. 머리가 없는 18개의 지푸라기 몸체가 검은색의 원탁을 받치고 테이블 위로 하나의 둥근 머리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평일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람객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기꺼이 15분을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처음 시도하는 기술적 도전들 때문에 설치 당시만 해도 걱정이 많았다고 들었다. 전시장에서 이 같은 열띤 분위기를 체감한 소감이 어땠나?
평소 미술에 관심이 없던 분들이 내 작품에 관심을 갖고 앞으로 미술관에 자주 놀러와야겠다고 말하는 게 인상 깊었다. 전 세계의 이색 풍물을 소개하는 유명 인스타그램 계정이 내 작품을 소개한 것도 재미있었다. 게시물 밑에는 “또 한국이야?”라는 댓글이 달려 있더라.(웃음) 생각보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작업한 지 오래되었지만 이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한꺼번에 주신 경우는 처음이고,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솔직히 어리둥절하다. 작품이 좋아서인지 시대상의 반영인지.(웃음) 전시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위치한 삼청동이 이제는 거의 놀이동산과 다름없는 장소가 됐다. 청와대가 개방했고 팬데믹이 정돈되면서 미술관 관람객 인원 제한이 해제됐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이건희 컬렉션과 이중섭 전시를 보러 왔다가 내 전시를 보게 된 관람객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아직 준비가 덜 되었거나 용기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이번 작품을 만들지 못했을 것 같다. 작가의 일은 사람들의 관념을 부수는 것이지만 작가도 인간인지라 그걸 실제로 해내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팬데믹 동안 전시 기회가 적었기에 이번에야말로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버리자는 마음으로 저지른 측면이 있다. 여러모로 타이밍이 좋았다.
도록에도 나와 있다시피 〈원탁〉은 이미 오래전에 구상한 작업이다.
당시엔 동그란 원탁을 머리 없는 인형 셋이 짊어지는 모습이었다. 2014년 스케치로 박근혜 정권 시기였다. 2010년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치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다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런데 현실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가장 욕심쟁이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케치는 그때 불현듯 떠오른 어떤 장면에서 출발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당시 아이디어를 다시 꺼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더라. 다만 작업의 스케일이 커지면서 변화가 생겼다. 스케치가 권력에 집중한 우두머리들의 이야기였다면, 원탁의 지름이 커지고 인형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나와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된 측면이 있다.
관람객이 우리 이야기라고 느끼기 때문에 ‘스쿼트 챌린지’랄지, ‘월급쟁이의 삶’ 같은 별칭도 붙었을 것이다.
작품은 내 손에서 떠나면 관람객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인지 원탁의 지푸라기 형상을 보고 확고하게 사람을 떠올리는 반응이 많았다. 지푸라기 형상을 보고 무언가를 떠올리고 공감할 수 있구나, 작가나 관람객이나 같은 시대를 살고 있구나 새삼 느꼈다. 그 안에서 나오는 다양한 해석이 흥미로웠다. 어떤 이들은 투쟁으로 보고, 어떤 이들은 협동으로 본다.
작품이 구동될 때 간혹 예상치 못한 오류가 발생한다는 점도 재미있다. SNS를 통해서, 원탁을 구르는 사람 머리의 형상이 바닥에 툭 떨어지자 어쩔 줄 모르다가 원탁에 다시 올려다 놓는 한 관람객의 사진도 봤다. 누군가는 ‘관객참여형 예술’이라고 칭하더라.
지푸라기 머리가 본인 쪽으로 툭 떨어져서, 로또 복권을 샀다는 분도 있더라. “누군가 그들에게 머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다면 이 게임이 멈출까?”라는 댓글도 흥미로웠다.
 
〈원탁〉, 2022, 알루미늄, 인조 밀짚, 기계 장치, 동작 인식 카메라, 전자 장치, 110x450x450cm.

〈원탁〉, 2022, 알루미늄, 인조 밀짚, 기계 장치, 동작 인식 카메라, 전자 장치, 110x450x450cm.

〈원탁〉의 지푸라기, 〈검은 새〉 〈작은 방주〉 〈두 선장〉 〈제임스 웹〉의 폐 종이박스, 〈하나〉 〈빨강〉의 타이벡이라는 재료가 새롭다. ‘최우람스러운’ 작품이라 하면 금속 혹은 플라스틱같이 항구히 남는 재료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핑크 히스테리아〉부터 변화가 시작된 것 같은데,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유가 있나?
기계생명체 시리즈는 희망과 욕망이 기계로 확장되고 생명을 갖게 된다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집중한 작업이다. 기계가 생명력을 얻는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금속성의 재료가 섞여 들어갔다면 이번엔 콘셉트부터 완전히 달랐다. 내가 이번 전시에서 주력한 건 퍼포먼스였다. 전시 기간 동안 무사히 버틸 수 있다면 어떤 재료든 기꺼이 쓰겠다는 주의였다. 전통적으로 조각과에선 영구적인 재료에 대해 연구하고 나도 조각과를 졸업했다. 초반엔 나 역시 영속성의 매너리즘에 갇혀 있었던 것 같지만 작업을 계속 해나가면서 거기에서 자유로워졌다. 내 작품의 영원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지푸라기나 종이도 너무 오래 간다. 종이 한 장이 썩는 데 드는 시간을 생각해보라. 지구한테는 여전히 미안한 일이다. 반면 〈하나〉와 〈빨강〉에서 타이벡을 쓴 건 의도가 분명하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미디어에서 가장 먼저 목격한 장면이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의 모습이었다. 방호복 바깥으로 죽음이 우렁우렁 피어나고 안으로 ‘내가 살아야 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의지가 담겨 있고. 삶과 죽음이 타이벡 홑겹 사이로 왔다갔다하는 양상을 보고 순환의 꽃을 만들었다.
2014년 〈바자 아트〉에서 당신은 이미 방주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림 속 로봇들은 가족을 위한 안전한 방주인 셈”이라고 말했다. 구원으로서의 로봇 혹은 구원으로서의 방주는 당신이 오래전부터 천착한 주제일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이를테면 당신은 로보트 태권브이가 당신을 구해줄 거라 믿던 어린이였나? 내가 예닐곱 살 즈음이었는데 판문점 제3땅굴이 발견되자 서울 여의도에서는 북한의 땅굴을 규탄하는 서울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수십만 명이 구호를 외치고 혈서를 쓰고 김일성 상에 불을 지르던 장면이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은 스스로 적을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존재 같다. 오늘날에는 그 적이 조금 더 복잡하고 교묘해졌다면 당시엔 분명한 악당이 존재했다. 정부는 북한이 쳐들어온다고 공포를 조장했고 학교에선 소련이 핵미사일을 쏜다며 책걸상 아래로 대피하는 훈련을 시키곤 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흡수한 어린이로서(웃음) 무섭다, 도망가고 싶다 혹은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그린 로봇 그림을 보면 과학자가 되고 로봇을 만들어서 악당을 막아 내고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파라다이스로 탈출하겠다는 희망사항이 적혀 있다. 나중엔 수학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예술을 시작하게 됐지만(웃음) 대학 시절 스케치에 여전히 이런 말이 적혀 있더라. “내가 예술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는 과대망상이 나에게 남아 있다고 느낀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까?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작은 방주〉는 이런 나의 오래된 질문에 대한 ‘생각의 파편’이다.
 
〈빨강〉, 2021, 금속 재료, 타이벡에 아크릴릭, 모터, 전자 장치 (커스텀 CPU 보드, LED), 223x220x110cm.

〈빨강〉, 2021, 금속 재료, 타이벡에 아크릴릭, 모터, 전자 장치 (커스텀 CPU 보드, LED), 223x220x110cm.

〈작은 방주〉는 육중한 철제와 폐 종이 박스를 재료로 최첨단의 기술로 구현한 상징적 방주이다. 작품 안에 전체주의, 탈세계화, 기술격차, 전쟁과 재난 자본주의 등등 무수한 함의가 담겨 있다. 나는 특히 배의 선단 양끝에 위치한 〈두 선장〉이 〈제임스 웹〉으로 우주를 관측하고 그 아래 35개의 노가 일제히 마스게임처럼 움직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엄청난 자본을 투자해서 우주의 과거를 보는 망원경을 쏘아 올리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굶주림과 전쟁에 시달리는 아이러니가 한눈에 보인달까.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발사 소식을 듣고 기대가 컸다. 허블 우주망원경의 100배 정도 성능으로 태초의 우주 이미지를 볼 수 있다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투입된 어마어마한 인력과 비용, 그리고 턱없이 짧은 수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와, 사람들은 정말 못 말리는구나(웃음)’ 싶더라. 긍정적으로 말하면 위대한 지적 호기심이지만 이 또한 누군가에겐 부질없는 욕망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임스 웹은 지구에 산재한 수많은 갈등을 해결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 한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도 한 장보다 못한 존재인 것이다.
나사(NASA)가 광고 마케팅을 잘한다.(웃음) 나 역시 칼 세이건의 육성을 재현한 첫 번째 제임스 웹 트레일러를 보고 고무되었던 기억이 난다.
광고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새로 나온 자동차를 타고 싶고, 사진 속 저 물건을 갖고 싶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 영상을 몇 번 보고 나면 관심 없던 사람도 우주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이 차오른다. 특히 온라인은 그런 최면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가는 세계이지 않나. 초반에 언급한 대로 이번 전시에 대한 화제성도 같은 맥락에서 의심하게 된다. 사람들이 정말 나의 작업을 보고 싶어서 온 걸까? 아니면 보고 싶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영향을 미친 걸까? 온라인 안에서 무수한 작용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그게 어떤 현상인지 제대로 감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인류는 서로가 서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느낌이다.
 
〈천사〉, 2022, 레진, 24K 금박, 스테인리스 스틸, 162x133x56cm.

〈천사〉, 2022, 레진, 24K 금박, 스테인리스 스틸, 162x133x56cm.

기술과 문명을 바라보는 동시대 예술가의 시선은 복잡미묘할 수밖에 없다. 특히 당신은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조각을 해온 작가다. 과학기술에 대해 어떤 양가적 태도를 갖고 있나?
어린 시절 과학기술 신봉자였다면 이제는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과학기술은 결코 동시대적이지 않다. 점점 더 차별의 선봉에 설 것이다. 기술이란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자동차, 비행기 같은 물리적 발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술이란 나의 욕망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욕망을 조작하는 온라인 현상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일까. 자급자족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다. 결국 모든 불행은 내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맡기면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여럿이서 분업하는 것이 테크놀로지의 핵심이지 않나. 내가 나의 삶을 이끄는 것조차 분업하여 지도자를 뽑고, 그에게 운명을 걸고, 희망을 품고. 이런 시스템이 수천 년 동안 강화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여전히 정교하지 않고, 맥락도 없고, 자꾸 변하고, 꿈틀거린다. 기원전 석가모니의 고민과 오늘날 우리의 고민은 전혀 다를 게 없지 않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인공지능이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세상이다. 미래의 예술은 어떤 양상일까?
“바나나 같은 원숭이가 자동차를 잉태했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 문장을 인공지능이 그럴듯하게 해석해 일러스트로 그려내더라. 결국 창의성이라는 것도 정량적으로 분석이 가능하단 말이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다. 세상엔 다양한 예술가들이 존재하고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은 양분할 수 없다. 예술은 맥락이 불분명한 무언가의 느낌을 전달하는 어떤 행위일 뿐이다. AI가 그 행위를 흉내 내고 예술에 점점 더 가까이 가고 어마어마한 결과물을 쏟아내고 그게 인간이 만든 다양한 예술과 뒤섞이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예술과 인공지능의 예술을 구분할 수 있을까?
넓게 보자면, 당신이야말로 인간이 예술을 하는 마지막 세대의 예술가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나무가 되기까지 수십 억년 진화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무에 만족하지 못한 인간은 더 값싸고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 플라스틱을 불과 몇 백 년 만에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금은 오직 인간의 편의를 위해 우리의 환경을 한순간에 플라스틱으로 뒤덮었다. 예술이라고 다를까. 어쩌면 플라스틱보다 더 손쉬운 방식으로 순식간에 대체될 것이다. “이건 사람이 직접 생각해낸 거래.” “이게 사람의 아이디어였다고? 대단한데?” 언젠가 미술관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게 될지도 모르지.
‘움직임’은 당신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는 ‘움직임’보다는 ‘방향성’에 대해 강조한다. 결국 이 혼란한 세상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방향성을 점검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우리의 항해를 계속해나가기 위해서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픽토그램 네온 작품 〈사인〉의 유머에서 그 힌트를 얻었다.
사는 대로 사는 것 말고는 답이 없지 않을까. 언젠간 이 인류도 끝날 것이고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인〉의 ‘우리는 모두 신이다’를 작업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도 무언가 ‘반짝’했다. 기뻤던 것도 같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다 보니 정작 우리 삶의 주인이 우리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곤 한다. 아까도 말했듯 결국 내 할 일을 남에게 맡기는 순간부터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 같다. 나를 구원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일견 마음이 무거워지긴 하지만, 분명 그 안에서 발견하는 평화가 있다. 결국 방주는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것 아닐까.
이번 전시를 보고 기계가 ‘기계생명체’로 진화하는 데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가설을 세워보았다. 하나는 〈원탁〉에 내리쬐는 빛, 다른 하나는 〈작은 방주〉에서 들리는 사운드다. ‘기계음’은 당신의 작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번엔 뮤지션 이이언과 협업했다.
과거엔 기계가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소리로부터 의미를 찾았다. 기술의 발전으로 기계가 점점 조용해지다 보니까 빈 부분이 보이더라. 사실 나는 작품이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소리가 아니면 ‘반칙’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김영하 소설가의 소개로 우연히 이이언 음악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통하는 점이 많았다. 의도가 강하게 묻어나는 음악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기계음이었으면 좋겠다는 방향성을 갖고 모션 프로그래밍과 사운드 디자인 작업에 참여해주었다. 덕분에 1백40개 모터의 움직임이 사운드가 되어 아주 자연스러운 질감으로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동료 아티스트로서 이이언과 당신의 공통점을 발견했나?
이이언의 음악은 잘 만든 세공품 같다. 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정성을 다한달까. 나 역시 남들이 잘 모르는 부분까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작업하는 편이라 동질감을 느꼈다. 특히 ‘예쁘게 시들어 가고 싶어 너와’를 듣고 결국은 시들어가고 죽어가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분이구나,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졌구나 느꼈달까.(웃음) 어쩌면 이번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곡이라는 생각도 했다. 심지어 〈하나〉와 〈빨강〉은 한 세대가 시들고 다음 세대가 태어나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연결하는 작업이지 않나. 재미있는 우연이다.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난 최우람 작가.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난 최우람 작가.

〈작은 방주〉 한쪽에는 뱃머리 장식 〈천사〉가 힘없이 축 늘어진 채 매달려 있다. 인류를 구원해야 할 존재가 그저 멍하니 나약한 모습으로 인류를 방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사〉는 전작 〈허수아비〉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사인〉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이다. 세 작품의 연관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동의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 작가인 나조차도 전시에서 하나의 방향을 일관되게 밀고 간 건 아니다. 〈사인〉에서 〈천사〉로, 다시 〈천사〉에서 〈사인〉으로 나 역시 이 안에서 여전히 계속 헤매고 있는 느낌이다.
전시장 외벽에 가벽을 뜯어낸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전 전시의 흔적을 페인트칠로 덮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인데 이유가 있나?
전시 하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생긴다. 사람이 살 집을 짓는 것이면 이해하겠지만 미술관이라는 튼튼한 건물 안에서, 고작 몇 달 동안 작품을 조금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자재가 소모되고 폐기물이 발생한다. 나에겐 작품을 선보일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뿐이니까 최소한의 변형만 가져가고 싶었다. 내 전시를 위해 페인트로 벽면을 깨끗하게 칠하면 다음 전시에서 그 위에 또 페인트를 덮어야 한다. 나의 욕망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한 번이라도 그 작업을 덜할 수 있지 않나. 나는 그 비용으로 차라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거나 관람객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본다. 〈사인〉이 설치된 장소는 아예 이전 전시에서 쓰인 가벽을 그대로 사용했다. 부수면 폐기물이 되지만 작가가 환경에 맞춰서 작품을 구상하면 유의미한 공간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설계 드로잉〉 36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작은 방주〉 〈빨강〉 〈하나〉 〈등대〉를 위한 설계 드로잉의 일부를 캔버스 위에 전사한 후 손수 아크릴 물감으로 선 하나하나 공을 들여 그렸다. 설계는 기구학적으로, 기능은 생물학적으로 풀고자 하는 키네틱 조각에서의 디테일 철학은 알고 있다. 드로잉은 어떤가?
도면은 일종의 부산물이다.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들, 미처 건져내지 못한 것들, 버려지는 것들을 주워 모은다는 마음으로 설계도를 다시 뒤져보았다.  〈설계 드로잉〉은 나의 작업을 평면으로 되감아보는 일종의 필사였다. 사실 드로잉은 조각에 비해 훨씬 거칠다. 디테일이 공허하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교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부분에까지 정교함에 대한 집착이 번져 나갔던 것 같다. 어쩌면 나에 대한 신념이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다.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것에 답을 내리고 결론을 짓고 완전한 형태로서 옮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달까. 이제는 불분명한 것을 그저 불분명한 채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흔히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를 보고 나면 “책으로 읽을 때가 좋았다.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니까 흥미가 깨지더라” 같은 평을 내린다. 물질적으로 실체가 명확해지면 잃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의 작업이 머릿속에 있는 불분명한 아이디어를 분명한 결과물로 구현하는 과정이라면, 이번엔 거꾸로 접근했다. 불분명한 스케치가 분명한 작품보다 더 큰 의미를 내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작업은 이런 가설에서 출발한 실험이다.
솔직히, 세상이 나아질 거라고 믿는가?
모르겠다.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웃음) 그런데 나아진다는 것은 과연 누구 입장에서의 나아짐일까? 이 또한 철저히 인간적 관점이다.
당신은 ‘기계생명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다. 최근 〈애프터 양〉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줄곧 떠올린 질문인데, 당신이 그 대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있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
안드로이드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무엇이든 살아있게 만들 수 있다. 언제나 그래왔다. 반려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돌, 나무, 집,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나한테 사줬던 연필도 나에겐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한편으로 인간은 무엇이든 죽게 만들 수 있다. 결국 삶과 죽음은 마음에 달려 있으며 인류의 문명을 좌지우지하는 것 역시 개개인의 삶의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이니까.  
 
※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는 2023년 2월 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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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손안나
    사진/ 이우정,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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