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녀'의 벽을 허문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김경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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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녀'의 벽을 허문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김경오

두꺼운 유리 장벽을 깨고 묵묵히 자기 일을 일궈온 사람들의 이야기. 부드럽게 질기고, 뜨겁게 용감했던 언니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BAZAAR BY BAZAAR 2021.01.07
 

여자의 일

비행사 김경오
비행 전 두 딸에게 쓰는 유서에는 이런 말을 적곤 했다. ‘누가 뭐래도 네 인생은 네가 컨트롤해야 한다’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은 너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오늘 같이 촬영한 비행기를 직접 조종했었다고.
전쟁 때 내가 탔던 비행기다. 청춘과 인생을 비행기에 담아서일까, 지금도 우리 집 안방에 온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의 제안으로 얼떨결에 공군 입대 시험을 치렀다고 알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까지는 비행기를 볼 일이 없었다.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1948년에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려야 하는데, 그때는 매스컴이 없지 않았나. 당시 초대 대통령이 이 사실을 비행기를 통해 알리고자 공군사관학교 1기생을 모집하며 여생도 또한 15명을 모집했다. 모집 시험 전날 교장선생님이 갑자기 부르더니 다음 날 아침 백화점 앞에 가서 시험을 보라고 하더라. 영문도 모르고 시험을 보러 갔는데 수천 명의 여고생이 와 있었다. 그중 나를 포함한 3백여 명만이 시험을 보았고, 다음 날 아침 신문 정중앙에 기사가 났다. 거기에 내 이름도 있었다.
그 시절에 여생도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버지가 호적에서 파버려야 한다고 하더라. 남자도 잘 못 모는 비행기를 여자가 몬다는 게 집안의 망신이지 뭐냐고. 합격자 소집 날, 아버지가 방문을 잠가 방 창문을 열고 맨발로 탈출했다. 건너편에 사는 친구 신발을 빌려서 갔더니 사관 생도들과 같이 트럭에 타라고 하더라. 그렇게 간 곳이 지금의 김포비행장, 공군 기지였다. 가서도 영문을 잘 몰랐다. 그런데 이발사가 와서 머리를 남생도들과 똑같이 자르고는 그날부터 석 달 동안 군사 훈련을 시키더라. 석 달 후엔 정식 군번을 받으며 “우리는 이 나라의 영공을 지키는 용감한 조종사가 되겠다”고 대통령 앞에서 경례를 했다. 그렇게 조종을 위한 공부를 시작한 지 2년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군에서는 전쟁에 필요한 조종사를 속성으로 양성해서 내보내는데, 우리는 여자라고 기회조차 주질 않더라. 잊혀진 군인이 된 것이다. 여생도 15명 중 14명이 포기하고 나 혼자 남게 되었다.
혼자만 남았을 때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나가라는 압력이 있었지만 “조종사가 되기 전에 못 나간다”며 맞섰다. 살려면 내가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다. 어느 날 공군 행사에 대통령이 왔는데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형무소까지 갈 각오를 하고 대통령을 붙들었다. “저는 아직도 조종사가 못 되었습니다.”라고 하니 참모총장한테 이 젊은 장교가 조종을 못한다는 게 무슨 말이냐 묻더라. ‘난 이제 죽었다’ 하는 마음으로 잠을 못 이루었는데 다음 날 아침 “공군 김경오. 비행단.” 이랬다. 감격스러웠다. 그처럼 하고 싶었던 조종인데 막상 하늘에 올라가니 무섭더라. 두 번째 비행까지는 선생님 뒤에 앉아 정신없이 탔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여기서 실패하면 내 후배는 다시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부터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훈련을 잘 해냈다.
첫 단독 비행은 언제였나?
1952년 5월 12일 아침 10시, 50시간의 첫 단독 비행 임무가 주어졌다. 비행 전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싸서 유서와 함께 어머니께 건넸다. 단독 비행 하다 죽는 경우가 많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긴장 속에서 무사히 비행을 하자 이제 내려와도 된다고 교관이 그러더라. 비행기에서 내리고 처음으로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 최초 여자비행사’라는 말이 대명사처럼 붙어다니고 있다.
비행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전쟁 중 기밀 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폭풍우가 오고 태풍이 불어도 뚫고 올라가면 또 하나의 하늘이 있고 하얀 장미꽃 같은 구름이 깔려 있다. 파란 하늘에 빨간 선이 그어진 광경은 얼마나 예쁘던지. 그걸 보면 ‘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 나이가 20살, 청춘이지 않았나. 땅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는데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모든 아름다움을 접할 때마다 나는 시인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의 행보가 궁금하다.
대통령이 이제는 군복을 벗고 미국에 가서 항공 기술을 배워 오라고 하더라. 공군 대위에서 군을 떠나 미국에 갔다. 민간 항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배우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돈을 아끼려고 식사를 제대로 안 했더니 영양실조에 걸려 두 달 동안 비행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우선 내가 있어야 비행기도 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인생의 두 번째 변곡점은 두 달 후 찾아왔다. 한국전쟁 때 비행기를 탄 김경오라는 사람이 미국 어느 대학에 와 있다 그러니까 삽시간에 유명해진 것이다. 〈뉴욕 타임스〉  〈라이프 매거진〉, 나중엔 ABC TV에까지 나갔다. 1958년에 한국을 떠나 1963년에 성공을 하고 보니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공부가 끝나면 미국에 머물지 말고 조국에 돌아와서 후학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나. 기왕 돌아가는 거 비행기도 한 대 구해서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민간 항공을 국내에 전파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건가?
그렇다. 기자들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결국 해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여자비행사 1만 명이 ‘We Help Captain Kim’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직접 나서서 강연도 하며 돈을 모았다. 원래는 3년을 계획했는데 3개월 17일 만에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비행기를 한 대 구했더니 경비행기 회사에서도 내 노력을 보고 경비행기 ‘파이퍼 콜드’를 하나 주더라. 그렇게 1963년 10월, 한국으로 금의환향을 하고 2년 동안 항공 강연을 했다.
이제는 수많은 여성 후배들이 뒤따르고 있다.
살면서 항상 ‘어느 나라 어느 하늘에서 갈지 모르는 것이 내 운명이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후배 한 사람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후보였을 당시 그 앞에서 “내 평생 이북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를 안 빼놓고 다 가봤는데 사관학교에 여자가 없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가 대통령이 되면 공군사관학교에 여자를 뽑겠다고 했다. 그 공약이 다 속기되어 남아 있다. 그가 당선되자 제일 먼저 공군참모총장한테 공군사관학교에 여자를 뽑으라 하더라. 1997년, 20명을 뽑은 것을 시작으로 지금도 뽑고 있다. 그 여성들이 지금은 당당하게 1등을 하고, 내일모레 대령이 된다. 이렇게 든든한 후배들이 있어서 이제는 여한 없이 산다.
비행 전에 작성한 유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유서를 썼는데 비행을 마치고 와서는 슬그머니 태웠다. 두 딸이 결혼하기 전까지 그랬다. 엄마가 없어도 너희는 씩씩하게 살라고. 누가 뭐라 해도 네 인생은 네가 컨트롤해야 한다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은 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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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손안나
    컨트리뷰팅 에디터/ 문혜준
    사진/ 김진용
    어시스턴트/ 김형욱
    웹디자이너/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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