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화보는 필름으로 촬영했어요. 디지털 촬영처럼 실시간 모니터링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연석 씨가 워낙 카메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들어서 시도할 수 있었던 콘셉트이고요.
필름카메라를 특히 좋아해요.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한 건 아니지만 기부 차원으로 두 번 정도 작은 사진전을 연 적도 있고요. 아까 그 하프 카메라가 교세라 사무라이라고 하셨죠? 실물로 처음 봐서 신기했어요. 모니터를 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되네요.
인스타그램 셀카를 보고, 사진 찍히는 것보다는 찍는 걸 즐기는 것 같다는 추측을 하긴 했어요.
SNS에 올라오는 제 사진들을 보고 팬들이 각도가 늘 똑같다고 놀려요.(웃음) 영상하고는 좀 달라요. 셀카를 찍는 건 어쩐지 좀 어색하고 불편해서. 오히려 남을 찍어주는 게 재미있어요.
휴대폰 갤러리에 들어 있는 가장 최근 사진이 뭔가요?
얼마 전에 제 데뷔 17주년이었어요. 제가 3살에 데뷔를 해서 이제 20살이거든요.(웃음) 데뷔를 기념해서 예전에 공연했던 작품을 보러 갔는데 거기서 저만의 기념 촬영을 했어요. 팬들이 보내주신 선물들도 하나하나 사진으로 남겨 놨고.
여느 때였다면 팬미팅을 열었을 텐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생략한 건가요?
드라마가 끝나면 팬들과 만나는 자리가 으레 있었는데…. 아마도 20주년에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음, 그때가 되면 제가 23살이니까….(웃음)
지난달에 영화 〈고요한 아침〉으로 내한했던 올가 쿠릴렌코가 상대 배우 유연석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특히 유창한 영어 실력을요.
유창한 건 아니고 간단한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정도예요.(웃음) 영어 공부는 틈틈이 해왔고 아무래도 〈고요한 아침〉 크랭크인 전에 따로 발음 연습도 하고 준비를 더 하긴 했죠. 영화에서 올가와 만나고 난 뒤 대부분의 대사가 영어로 진행되거든요. 간단한 불어도 구사하고요.
올가뿐만 아니고 촬영장에서 늘 상대 배우를 살뜰하게 챙기기로 유명하잖아요.
배우마다 성격이 다르잖아요. 100%는 아니겠지만 거기에 잘 맞추는 편이에요. 대화를 자주 나누고 좋아하는 게 있다면 같이 공감하고요. 먹는 취향이 비슷하면 같이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요. 상대역과 눈을 마주치고 연기를 해야 하는데 친해져야 연기할 때 제 자신도 편해지는 것 같아요. 일부러 신경을 쓰기보다는 저한테는 그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에요.
그래서 〈고요한 아침〉 마지막 촬영 날 올가에게 김 세트를 선물한 거고요?
비슷한 맥락이죠. 어떤 한국 음식이 좋았냐고 슬쩍 물어봤는데 한국 김이 너무 맛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그녀가 먹어본 김은 촬영 현장 밥차에서 나오는 도시락 김이었을 텐데,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퀄리티의 김은 따로 있으니까.(웃음) 특별히 맛있다는 김들로 선물했죠. 올가가 너무 좋아해서 저도 흐뭇하더라고요.
프랑스 연출진이 한국 로케이션에서 촬영한 할리우드 문법의 영화라는 점에서 신선한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기대가 큰데, 중간 편집본을 본 소감은 어떤가요?
영화의 톤앤매너가 색달라요. 올가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한국인이고 배경도 한국이잖아요. 그런데 주요 스태프가 프랑스 분들이라 그런지 한국 영화 같지 않아요. 게다가 말씀하신 대로 스토리텔링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스 영화들과는 사뭇 다르고요. 어떤 프랑스 영화를 보면 결말이 열려 있다거나, 스펙터클한 요소가 별로 없다거나, 클라이맥스가 심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잖아요. 주로 미세한 심리 변화를 묘사하는 경우가 많죠. 드니 감독님의 전작들도 그렇고요. 이 작품은 좀 달라요. 예를 들어 결말을 도출해내는 과정 같은 것 말이죠. 더군다나 해외를 오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즌인데 한국에서 해외 스태프들과 작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격리 기간까지 감수하면서 한국에 와준 올가와 스태프들에게 고마울 따름이고요. 코로나 이전부터 준비하던 프로젝트였지만 코로나 이후에 마음을 반쯤 내려놓고 있었거든요. 그분들의 의지로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너로 입은 반팔 니트, 패딩 베스트, 재킷, 와이드 팬츠는 모두 Bottega Veneta Wardrobe 01 Collection.
드니 데르쿠르 사단과의 작업은 한국 스태프와의 그것과 어떻게 다르던가요?
우선 감독님이 굉장히 에너지가 넘치셨어요. 보통의 영화 촬영장에는 모니터석이 있고 감독님들이 그곳에서 디렉팅을 하시는데, 이번 현장은 따로 모니터석이 없었어요. 감독님이 작은 모니터를 손에 들고 막 뛰어다니면서 바로 제 옆에서 디렉션을 주시거든요. 그래서 진행도 빠르고 현장 분위기도 에너제틱했어요. 2시간 분량의 작품을 20회차 만에 끝냈다니까요?(웃음) 정해진 콘티가 따로 없어서 현장에서 배우들과 동선 정리를 하면서 즉흥적인 요소를 반영하기도 좋았고요. 그래서 촬영 전날이면 내일 촬영에 대한 기대감이 샘솟았어요.
얼마 전에 〈올드보이〉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소년 우진의 표정이 새삼 뇌리에 박히더라고요. 당시 이 작품을 발판 삼아서 쭉 활동을 이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학업에 집중했는지 궁금하더군요.
〈올드보이〉 개봉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어요. 작품이 주목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배우로서 저한테 대단한 기회가 찾아 오진 않았어요. 소속사도 없었고. 그 작품을 기반으로 뭔가를 빨리 보여주어야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때는 그저 학교에서 연극 작업하고 연기 수업 받는 게 재미있었어요. 은연중에 지금 아니면 이런 경험을 하기 어렵다고 짐작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일단 군대를 다녀와서 소속사도 정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야겠다는 나름의 포부가 있었어요. 당시에는 연기자 표준계약서가 생기기도 전이니까요. 연예계에 그런 이슈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시기라서 더욱 더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요. 조급함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그저 내 눈 앞에 있는 생활을 해나가는 게 좋았어요.
그 후 〈응답하라 1994〉의 칠봉이 역할을 맡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죠. 없던 조급함도 생길 법한 기간이고요.
배우 말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평생의 꿈으로 생각했던 일이라면 그래도 10년 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가짐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10년 동안 생각만큼의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대단하진 않아도 작은 성과들을 보면서 버텼던 것 같아요. 다양한 배역을 시도했고요. 그렇게 연기하다가 10년 차쯤 됐을 때 대중이 유연석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해주는 작품을 만났고요.
데님 재킷은 Levi’s. 니트 팬츠는 Trunkproject.
그때의 의리로 〈슬기로운 의사생활〉 캐스팅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응했다고 들었어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출연한 신인 배우들을 보면서 데뷔 초 생각이 나지 않았나요?
인턴 역할의 20대 배우들의 풋풋한 모습을 보면 너무 사랑스러워요. 스무 살 때의 저를 떠올리면, 그런 면을 감추고 싶어서 부단히 애썼거든요. 프로답게만 보이고 싶었나 봐요. 그 자체로도 선배들이나 시청자들이 매력을 느꼈을 텐데. 굳이 왜 그랬을까요?
일단 이우정 작가님이 저를 잘 아시는 분이라서 그런지 가끔은 ‘내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게 맞나?’ ‘너무 대충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될 정도예요. 이런 고민을 하는 거 보면 그래도 싱크로율이 꽤 높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작품을 통해 제 연기가 더 좋아진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저 자신이 편하게 연기하다 보니까 보는 분들도 좀 더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 같아요.
V넥 니트, 퍼 재킷, 팬츠는 모두 Fendi.
작년 여름에 촬영한 작품이에요. 제 분량의 90%가 아르헨티나 로케이션 촬영이었어요. 일 년 전만 해도 해외 촬영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작업이 되어버렸잖아요. 최근에 후시 녹음 때문에 촬영 분을 조금 봤는데 새삼 그때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느꼈어요. 이구아수 폭포 장면을 보는데 좀 남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한국 영화에서 아르헨티나의 이구아수 폭포를 담은 건 이번이 처음으로 알고 있어요. 폭포 장면을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뮤지컬 〈베르테르〉가 막 끝난 참이죠. 코로나 시대에 공연을 올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공연이 시작되는 첫 주에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되면서 아예 무대를 선보이지 못했어요.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했는데 시작도 전에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는 공연들이 부지기수였고요. 저희 같은 경우엔 상황이 나아지면서 나중에 관객 수를 줄여서 공연을 다시 올렸는데, 첫날 복잡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관객들은 오로지 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문진표를 작성하고 내내 마스크를 끼고 계시는 거잖아요. 아시다시피 〈베르테르〉 스토리가 좀 슬픈데 마스크가 흠뻑 젖을 정도로 우시는 분들도 계셨거든요. 그런데 마스크를 벗지도 못하고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커튼콜 때 함성 대신 마스크를 쓴 채 박수를 쳐주시는데 저도 울컥하더라고요.
이너로 입은 풀오버는 Coach 1941 2021 Pre-Spring Collection. 집업 니트는 Acne Studios. 가죽 팬츠는 8 by Yoox. 워커는 So.u:lesures.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하는 와중에도 꾸준히 뮤지컬과 연극을 병행해오고 있죠. 공연계에 남다른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스케줄일 텐데.
영화나 드라마가 나중에 종합된 결과물을 볼 때의 쾌감이 있다면, 공연은 매번 다른 관객을 만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어요. 둘 다 놓치고 싶지 않다, 뭐 이런 건 아니고 두 개의 경험을 병행하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사는 즐거움이라서요. 나중에 체력이 떨어질 수 있으니 할 수 있을 때 해야죠.
요 몇 주가 딱 2년 만에 갖는 휴식기예요. 금전적인 수단으로서 이 일을 했다면 금방 지쳤겠죠. 어릴 때부터 제 꿈은 연기자였고 지금도 연기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요. 드라마 현장이 예전처럼 밤샘으로 이뤄지지도 않고 일주일에 하루이틀 쉬는 날이 생기거든요. 수면 시간이 충분하진 않아도 머리 대면 곧 잘 잠드는 편이라서.(웃음) 만약 저에게 휴식이란 무엇인지 물어보신다면 저는 취미 생활이라고 답할 것 같아요.
요즘은 캠핑에 꽂혔거든요. 저는 호캉스보단 캠핑이 체질에 맞더라고요. 편한 집 놔두고, 좋은 식당 두고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친구들과 힘을 모아서 텐트를 치고 각자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고 조금 불편해도 텐트에서 잠도 자고 술도 한 잔씩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저한테는 힐링이에요.
아까 매니저가 귀띔하기로, 유연석 씨는 보통 사람 에너지의 두 배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웃음)
가끔 “너는 대체 언제 쉬는 거야?”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그럼 의아해지는 거죠.(웃음) 보시다시피 저는 아주 잘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