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한 염혜란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그는 자신을 ‘흔들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깊고 푸른 바다에선 어디든 출렁거림이 있다고. 어떤 이의 마음은 수면 위에서 넘실대고 어떤 이의 마음은 심연에서 파동할 뿐이라고. 염혜란은 그런 마음으로 홍자영을 연기했다.

DEEP INSIDE

2019년은 당신에게도 특별한 한 해였을 것 같습니다. 아주 바빴고 그만큼 큰 사랑을 받았죠.
연초엔 놀았어요.(웃음) 연말부터 갑자기 바빠졌죠. 전과 다르게 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다른 색으로 다가와서 저도 새로웠어요. 그런 낯선 시선들이 좋아요. 오늘 화보 촬영 같은 경험도 그렇고요. 살면서 이런 콘셉트의 화보를 찍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수년 전 인터뷰에서 “내가 연기를 하면서 진심이라고 느끼지 못했는데 관객의 반응이 좋으면 조금 덜 기쁠 것 같다. 내가 무대에서 진심으로 다가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관객의 반응까지 맞아떨어지면 그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어요. 최근에 <동백꽃 필 무렵>을 통해서도 비슷한 종류의 행복감을 느꼈을 것 같은데요.
초반엔 두려움이 컸는데 뒤로 갈수록 애쓴 것만큼, 아니 애쓴 것보다 훨씬 더 호응해주셨어요. 작품은 나 혼자 애쓴다고 완성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사람의 노력이 모여서 좋은 결과물로 돌아온 거니까 더 행복했죠.
요즘처럼 TV 안 보는 시대에 최고 시청률 23.8%를 기록했으니 체감 온도는 더 뜨거웠을 테고요.
예전에는 저를 보시고 서로 쿡쿡 찌르면서 “맞다니까” “아니라니까” 속삭이셨다면 요즘엔 “잘 봤어요” 하시며 인사해주세요. 감기에 걸려서 민낯에 마스크를 쓰고 마트에 갔는데도 알아보시더라고요. 목소리가 ‘홍자영’이라서 아셨다고요. 아, 우리 드라마를 정말 많이 보셨구나, 깜짝 놀랐어요.

시스루 톱은 Zara. 귀고리는 Hei. 반지는 모두 Clever 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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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변호사 홍자영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진주댁이나 <증인>의 미란 등 지금까지 맡아온 역할과는 사뭇 다른 결의 인물이잖아요. 그래서 “초반엔 두려웠다”고 표현하는 건가요?
처음엔 저절로 몸과 마음이 경직되더라고요. 지금까지 해온 역할이 아니니까 두려웠어요. 그런데 그걸 누군가와 의논할 상황도 못 되었어요. 옹산 사람들과 달리 자영이는 항상 혼자 있거나 둘이서 대립되는 장면에 나오잖아요. 홍자영만 나오면 채널을 돌리고 싶으면 어떡하지? 내가 이 작품에 누가 되는 건 아닐까? 다행히 방송이 시작되고 전체적인 그림을 보니까 제가 가져가야 할 지점이 보이더라고요. 상대역인 규태(오정세)와 편해지면서 대화도 많이 나눴고요. 좋은 파트너를 만난다는 건 정말 행운인데, 그걸 느끼게 해준 친구였죠.
실제 모습은 홍자영보다 노규태에 가깝다고 말했던데.
노규태의 근원에는 외로움이 있잖아요. 일희일비의 아이콘이기도 하고요. 저도 그렇거든요. 이런 촬영을 하면 갑자기 멋있는 여자가 된 것 같다가 또 금방 찌그러지고.(웃음) 사람들의 반응에 업됐다가 다운됐다가. 결국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 같은 것들이 있죠.

시스루 톱은 Zara. 귀고리는 Hei. 반지는 모두 Clever 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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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자영은 노규태와 정반대의 인물인데 어디서 인간적인 면을 발견했나요?
한 끗 차이인 것 같아요. 바다에선 어디든 출렁거림이 있어요. 위치가 다를 뿐이죠. 어떤 사람은 수면 위로 찰랑거리고, 어떤 사람은 심연에 가라앉아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자영이도 파동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다만 그걸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죠. 그런 모습을 작가님이 풍성하게 써주셨어요. “그렇지 않아, 이 사람도 흔들림이 있고 외로움이 있어. 옹산에서 같이 술 마실 사람 하나 없어서 뒤돌아가는 뒷모습이 있어. 친구를, 동백이를 만나고 싶어서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외로운 사람이야.”
<아이 캔 스피크> <증인> <라이브> <라이프> <동백꽃 필 무렵>까지. 굵직한 출연작만 살펴봐도 어느 하나 좋은 평가를 받지 않은 작품이 없어요. 단순히 ‘작품운’으로만 설명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매체에 온 지 3년짼데 이 모든 게 인연이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아요. 좋은 작품을 만나서 그 기운으로 또 다른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고. 첫 작품인 <디어 마이 프렌즈>는 존경하던 노희경 작가님과 함께해서 감동적이었고, 그 후에 <도깨비>로 대중한테 처음으로 저를 알렸고, <무법 변호사>는 제게 처음으로 큰 롤이 주어진 드라마였어요. <라이프>에서 강경아 비서실장으로 한번 새로운 도전을 해봤기 때문에 <동백꽃 필 무렵>에서 홍자영을 연기하기가 덜 버거웠다고도 생각해요.

블라우스는 Dint. 귀고리는 Clever 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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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도 빼놓을 수 없죠. 학교에서 지우(김향기)를 마주치고 나서 눈빛이 무섭게 변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어떤 이들은 미란이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빌런이라고 평가하더군요.
사실 저는 더 세게 가고 싶었어요. 이한 감독님이 수위를 낮춰주셨죠. 미란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녀에겐 뚜렷한 목적과 정당성이 있잖아요. 자식을 지키고 싶은 마음. 그래서 반드시 지우의 입단속을 시켜야 하는 상황. 인물로서 접근해야 하는데 내가 신의 목적과 효과에 대해서만 생각했구나. 아, 이건 인간 염혜란의 욕심이구나. 반성이 확 되면서 정신 차리고 다시 해보자, 했던 기억이 나요.
<82년생 김지영>에 ‘스카프를 맨 여자’로 잠깐 등장했어요. 고등학생 김지영에게 그녀는 그래도 세상엔 이렇게 내가 의지하고, 나를 케어해주는 어른 여자가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인물이었을 거예요. 이런 특별 출연은 배우 본인이 좋은 마음으로 나서지 않으면 성사되지 않는 일이잖아요.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건가요?
김도영 감독님은 <82년생 김지영>으로 상업영화에 입성한 분이지만 원래 배우이기도 하세요. 제가 좋아하는 선배님이죠. 당연히 어떤 역할이든 무조건 하겠다고 했는데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나는 책에서 이 장면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네가 꼭 맡아줬으면 좋겠다. 네가 가진 따뜻함으로 연기해줘.” 저도 그 장면이 참 좋았거든요. 이 험한 세상에 여자로서 겪는 많은 고통이 있잖아요. 그럴 때 옆에 의지가 되는 여자가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어요.

블라우스는 Dint. 팬츠는 Uns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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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프렌즈> <아이 캔 스피크> <걸캅스> 등 여성 서사로 여성 관객과 여성 시청자가 위로받는 작품에 꾸준히 출연해온 것도 인상적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도 제 주변엔 여자가 참 많았어요. 같은 여자가 멋지다고 해주면 좋고 나도 멋있는 여자를 보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여자들의 이야기가 참 부족했잖아요. 그만큼 다들 목말라 있었고요. 시대적인 흐름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점점 여자들의 캐릭터가 다양해지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지면서 저한테도 그런 기회들이 오게 된 거죠.
여성 배우로서 당신도 그런 작품들에 더 눈길이 갈 테고요.
그럼요. 남자들만 잔뜩 나오는 영화도 그렇고. 전 사람이 둘 이상 죽어나가는 영화가 싫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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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태리는 존경하는 선배로 여러 번 당신을 꼽았어요.
그저 처음 만난 선배가 저라서 그런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극단에 처음 와서 만난 게 저였고 고민거리나 이야기는 많이 나눴지만 큰 도움을 주진 못했어요. 원래 처음 기억이 오래 남잖아요. 혼자서 큰 아이예요. 그 아이는.(웃음)
고민을 나누는 것 자체가 이미 도움이고 위안이죠. <동백꽃 필 무렵>의 홍자영도, <82년생 김지영>의 스카프 여자도, ‘김태리의 선배’ 염혜란도 의지하고픈 멋진 여자 선배의 모습인 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야기하면 할수록 책임감이 들긴 하지만, 저는 아직 그런 선배가 못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선배들은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자기 길을 가는 분들이었어요. 저는 말만 선배이지 어찌 보면 사회초년생이에요. 연극만 하다가 매체 일을 시작했을 때 어른들의 세계에 처음 발을 디딘 느낌이었어요. 우리끼리 해변가에 울타리 치고 살다가 나 홀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고요. 여전히 흔들리고 잘 모르겠죠. 인터뷰에서 어떤 말은 조심해야 할 것 같고, 어떤 말은 아예 하면 안 될 것 같고요. 그러니까, 매체에 솔직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태도들은 지금껏 모르다가 이제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거든요. 제가 해왔던 연기 경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뒤늦게 입사한 후배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제 3년 차. 부담스러운 경력직 후배.(웃음)
그것도 무려 20년 경력직이죠.(웃음)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웃음) 누구에겐 많고 누구에겐 적은 숫자일 텐데 별 의미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연말연시도 싫어하거든요. 늘 있는 하루인데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게 싫어서요. 그냥 어떤 하루는 버텼고 어떤 하루는 힘들었고 오늘 같은 하루는 즐거웠는데 그런 날들이 쌓여서 20년이 됐구나. 그렇구나. 초반에 참 실수도 많고 시행착오도 많았는데 조금 나아졌을까? 그 정도 물음표예요. 그 나아짐도 연기에 대한 건 아닌 걸요. 연기는 정말이지 하면 할수록 어려우니까요.
그는 자신을 ‘흔들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깊고 푸른 바다에선 어디든 출렁거림이 있다고. 어떤 이의 마음은 수면 위에서 넘실대고 어떤 이의 마음은 심연에서 파동할 뿐이라고. 염혜란은 그런 마음으로 홍자영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