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노포 추천 ①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노포 열풍이다. 누군가에겐 향수, 누군가에겐 색다른 경험이다. 즐거운 잔치만 같다. ‘힙지로’로 젊은 발길이 몰려든다. 도심 재개발, 재생 사업과 맞물려 새로운 활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힘찬 물결이다. | 서울,추천,포노,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분식

 노포는 많다. 사전적 의미의 노포는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 왕조가 끊기고 식민시대와 전쟁을 겪으며 문명 리셋을 겪은 한국 땅에도 이제 대를 물려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식당들이 생겼다. 개중엔 혐오스러운 끝이 보이는 곳들도 많다. 엉겁결에 노포로 뭉뚱그려 칭송받지만 다만 낡고 속절없을 뿐이다. 변하고 무너진 음식 맛, 불만에 찬 종업원들의 배려 없는 서비스, TV에 넋이 빠져 건성으로 카운터나 지키는 주인이 있는 곳에 어떤 값어치가 있을까. 인테리어 장식으로 구식을 재현한 엉성한 레플리카 식당들과 다를 바 없다. 노포라는 말은 일정 부분 오·남용되고 있다. <바자>의 시선으로 기록될 가치가 있는 노포를 가려냈다. 과거를 견고하게 잇되 미래를 약속하는 진취적인 현재성을 갖춘 곳이야말로 노포라는, 지금 시대 가장 호들갑스러운 수식어를 붙일 자격이 있다. 노동으로 평생을 산 지난 세대를 기억하고, 현재에 걸맞은 진화 드라이브로 그 생명을 생생하게 이어가는 식당들. 존경하고, 경애할 수 있는 노동자의 성의를 단 한 번도 잃은 적이 없으며 그것이 미래에도 변함없이 대물림될 것을 약속하는 진정한 노포의 오늘을 만났다.   서울 술 지도의 오랜 종착지 어머니 대성집  어머니 대성집 주변은 아파트 건축을 앞두고 폐허 상태로 방치된 채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불을 밝히고 장안에서 몰려드는 주당들의 밤과 아침을 책임진다. 할머니 대로부터 시작해 3대째인 박연웅 씨 대에서 사라질 낡은 조적식 목조 건물은 쇠퇴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서넛이 일하는 주방은 좁아 어깨가 쓸리고, 시멘트 바닥은 1967년부터 쌓인 물때를 어쩌지 못하고 있다. 똑같이 늙은 커다란 솥에서는 하루 두 시간 반을 빼고는 항상 해장국이 끓고 있다. 동대문구 용두동은 윤택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까지 찾아드는 객들 또한 원체 주변의 노동자들, 동대문의 새벽 상인들이 주였다. 노동을 마치고 온 그들을 위한 노동으로 세월을 났다. 밤사이엔 진하고 아침이 되면 다시 옅어지는 해장국에는 직접 말린 우거지에 양지와 내장의 잡다한 자투리가 다 들어간다. 매해 봄 온 가족이 매달려 담근 된장과 간장을 푼 진득한 국물에 푹 익은 우거지와 콩나물, 두툼한 선지 몇 덩어리에 고깃조각을 듬뿍 얹는 것이 어머니 대성집의 해장국이다. 또 다른 대표 메뉴인 수육에는 소의 홍창과 애기보, 양지의 가운데 토막인 양지삼겹을 쓴다. 뽀얀 등골이나, 말간 육회나 마찬가지로 재료는 모두 어머니 대성집만큼 오래된 마장동의 업체에서 가져다 쓴다. 거래처를 바꾼 적이 없다. 어머니 대성집엔 따로, 그러나 함께 노동하는 이들의 삶줄까지 매달려 있다. 삶이 달려 있으니, 광우병 파동 때도 구제역 때도 목숨 걸고 재료를 대줬던 이들이다. 박연웅 씨 어머니는 자신의 생업을 단 한 번도 자랑스러워하지 못했다. 당신 대에서 끝내리라 다짐했던 식당을 피치 못하게 대물림했던 사정이 있었다. 유학길에 주저앉아 3대째가 된 박연웅 씨 역시 아직 장사가 부끄럽다. 단골에게 숱하게 혼나가며 맛은 다 익혀 놓았지만 더 너른 시야로 자신의 대에서의 발전을 꿈꾸기 때문이다. 언제고 대학원에 진학해 체계적인 경영을 배우겠다는 다짐이다. 과거는 단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만 할까. 어머니 대성집의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테이블도, 묵직한 좌식 테이블도, 번거로운 장 담그기며 우거지 말리기도 모두 짊어지고, 3대는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70년대의 통나무 모양 테이블, 80년대의 묵직한 원목 좌식 테이블을 들고 곧 새 장소로 터전을 옮긴다. 이전을 알리기 위한 인스타그램도 진작 시작했다. 오래된 것이 썩지 않게 하며 동시에 윤을 내기 위한 새 출발이 머지않았다.     연탄불로 일으킨 가업 경상도집  “경.북. 청.송.군. 안.덕.면” 또박또박 답했다. 대구보다도 깊숙한 경상도 산골이다. “시골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경상도집 창업주인 김필례 씨는 나이 서른에 이촌향도했다. 이제 여든넷이 되었다. 2남 2녀가 모두 쉰 줄을 넘었다. 식당도 50년쯤 됐다. 새벽 5시부터 식당에 나와 찬을 마련하고 동대문 어귀의 노동자들에게 밥을 팔던 것이 시작이었다. 나름 맛으로 이름난 백반집이었다. 전태일 씨가 일하던 봉제공장도 바로 인근이었다. 시집가기 전 식당 일을 돕던 큰딸 최정희 씨가 경상도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15년 전이다. 테이블 세 개짜리 백반집은 야장 성지로 변모했다. 돼지갈비 전문점으로 탈바꿈시키고, 밤만 되면 인기척도 불빛도 사라지는 거리에 되는 대로 플라스틱 테이블을 깔았다. 연탄불을 피워 돼지갈비를 구웠다. 새벽에는 고기를 저미고, 낮동안 눈을 붙였다가 오후에 다시 나와 밤 10시반까지 돼지갈비를 굽고, 또 굽는다. 김필례 씨는 이제 힘에 부쳐 주방서 앉아 할 수 있는 잔일만 돕는다. 50대 후반의 막내아들 최임섭 씨가 집게를 잡았다. 직장 일을 마치고 경상도집으로 출근한다. 초벌로 한 번 굽고, 주문이 들어오면 마저 구워 나간다. 야장을 찾아온 들뜬 객들은 빨리 취한다. 강한 불에 터프하게 구워낸 돼지갈비 맛이 각별하니 소주며 맥주며 물처럼 넘어간다. “재료 좋은 것 쓰면 다 맛있다”는 것이 이 집 가훈일까? 맛을 따져 가격 구애 없이 재료를 골라 쓴다. 부추김치 하나도 입맛을 잡아끄는 이유다. 날씨가 선득해지면 뜨거워지고, 풀어지면 차가워지는 콩나물국을 매콤하게 한 입 넘기면 젓가락질에 가속이 붙는다. “돼지갈빗집으로 바꾸면서 젊은 사람들이 오게 됐지. 젊은 사람들이 와서 기쁘게 먹는 걸 보는 게 기뻐서 하지. 돈도 벌고 보람도 있고.” 최정희 씨는 한숨 돌리는 사이 뱉듯이 말하곤 주문을 쳐내러 뛰어가버렸다. 그에게는 특유의 억척이 있다. 고된 삶에 시달린 이들 특유의 억척이다. 그러나 이내 해사한 웃음이 드러난다. 터널을 통과한 이들만이 보여낼 수 있는 해소의 표정이다. 가족끼리 빼닮은 그 얼굴에 같은 억척과 같은 해소가 있다. 최정희 씨에겐 딸이 하나 있다. 뒤를 이어주길 바라는 눈치다. 안 그래도 2대째 남매 중 큰아들이 진작부터 경동시장서 감초식당을 차려 성업 중이다. “너무 힘드니까 내 딸은 안 시키고 싶어. 그냥 집에서 애 하나 잘 키우면 좋겠는데, 그래도 한다고 하면 번듯하게 차려줄 거야.” 돈도 벌고 성취도 얻었다. 혼자만 흘린 땀을 가을 찬바람에 말리며, 기쁘게 말했다. 저녁 내내 테이블 사이로 주방으로 잰걸음을 멈추지 못한 그였다.     순자 할머니의 평생  리어카 순대  그 시절 남자들은 어쩌면 그렇게 당당하게 나빴을까. 올해 팔순이 된 노순자 씨는 서른셋이 되던 해 남편이 집을 나갔다. “여자하고 바람 나서 제주도에 산다나 어쨌다나… 연 끊고 산 지도 하도 오래돼서.” 딸과 함께 남은 가정은 서른셋 순자 씨의 몫이었다. 당시엔 아무나 ‘다라이’라도 놓고 좌판을 벌이면 장사였고, 뭐든 팔았다. 순대 삶는 법을 배웠다. 피를 만지고, 당면을 삶고, 돼지의 오장육부를 다듬었다. 일 년 내내 ‘창신동 언니’를 쫓아다니며 뺏듯이 배웠다. 삶의 방편이라곤 순대밖에 없었던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1967년 건립한 세운상가가 내건 기치는 ‘아시아 최고’였다. 용산전자상가가 생기면서부터 쇠락해갔지만, 한때는 세운상가가 최고였다. 노순자 씨는 그 시절 세운상가 필로티 기둥 곁에서 집에서 찐 순대를 팔았다. 건너편에는 곱창볶음집이 늘어선 골목이 있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상권이 활발해 벌이가 좋은 동네였다. 순대도 그만큼 팔려나갔다. 이제 쇠 냄새와 기름 냄새만 나는 세운상가에 먹거리는 노순자 씨네 리어카 하나만 남았다. 상호도 없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단골들이 ‘리어카 순대’라고 부를 뿐이다. 요즘 순대는 거의 규격화돼 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다. 노순자 씨의 순대는 옛날 그대로다. 찹쌀이 슬쩍 들어간 순대는 틀림없이 잘 손질한 내장 안에 꽉 채웠다. 퍽퍽하고 비린 것이 대부분인 간도 촉촉하고 고소하게 잘 삶았다. 푸아그라나 아귀 간과 견줄 법하다. 부속 고기도 다채롭다. 허파는 물론 애기보, 오소리감투에 간 옆에 붙은 갈매기살(그 갈매기살과 다른데 이름만 같다) 등 아무튼 먹을 수 있는 부속 부위는 다 맛나게 삶았다. 발군은 촉촉한 비계가 아삭거릴 정도로 탱탱한 뽈살. 근자에는 되레 더 구하기 힘든 부위들이지만 40년 이상 거래한 업체가 틀림없이 구해준다. 평생 혼자 하던 일이었지만 몸이 늙어가며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조리를 맡겼다. 맛에는 변함이 없다. “물려줄 데도 없고 할 수 있는 한은 계속해야지.” 애석하게도 맥이 이어질 것 같지 않다. 사라져서는 안 될 맛이지만,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는 맛이다. “어릴 적부터 순대를 좋아해서 대여섯 번 뒤돌아봐야 갔어. 내가 원체 순대를 좋아해서 순대 좌판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 했어.” 노순자 씨, 아니 순자 할머니의 열아홉으로 돌아가, 그 좋아하는 순대를 원껏 먹도록 다 사주고 싶은 순간이었다.       고집이 지킨 6평 을지OB베어  맥주 한 잔에도 장인이 있다. 1980년 강효근 씨가 차린 을지OB베어는 당시 최고의 ‘힙’이었다. 골목에서 유난스러운 외제 냉장고에 케그를 보관해가며 효모가 살아 있는 OB생맥주를 뽑아 팔았다. 주문 제작한 냉장고 네 대에 케그를 관리하는 지금까지도, 이 집 맥주는 맛있다. 잔을 얼려주지도, 뇌가 찡해질 정도로 차갑지 않은데, 그래서 맛있다. 유행이 어찌 되거나 말거나, 을지OB베어는 창업주 강효근 씨가 찾아낸 가장 맛있는 맥주 온도를 고집스럽게 지켜낸다. 강효근 씨는 노가리를 연탄불에 구워 싼값에 팔았다. 지금도 단돈 1천원이다. 노가리 자체로는 적자인 채인데 그대로 판다. 아버지와 딸만 비밀스레 아는 고추장 소스와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 이 집 노가리는 맥주만큼이나 맛이 좋다. 지금은 2대째가 가게를 맡았다. 2대 내외는 아버지 때부터 일한 직원 원미숙 씨보다 경력이 짧다. 홀을 담당하다, 이제는 카운터 안에서 맥주를 따르는 고참 직원이다. 노련하고 날렵하다. 가게의 나이만큼 많아진 단골을 다 기억한다. 아버지의 노쇠에 갑작스레 8년여 전부터 딸 강호신 씨가 냉장고를 이어받았다. 회사생활 하던 남편 최수영 씨도 6평 작은 맥줏집으로 일터를 옮겼다. 아흔 넘은 아버지가 맥주와는 통 멀찍이 떨어져 살아온 딸에게 가게를 넘긴 것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강호신 씨는 21살 때 본 아버지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가게를 차린 후 2년 반 동안 아버지는 가게 찬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자며 기거했다. 대학생이던 딸이 들르러 오면 잠시 가게를 맡기고 건넛집에서 한 술 뜨다가도 작은 창 너머로 가게를 곁눈질하던 아버지 마음을 다 알지 못한다. 아직도 강효근 씨는 매일 딸에게 전화한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가게의 안부를 묻는다. 나이 지긋한 단골들이 주로 자리 잡는 6평 가게 내부와 별개로, 뒤뜰로 이어지는 야외에 테이블을 채운 공간이 있다. 건너편 택배 집하장 한편도 저녁에 빌려 쓴다. 언제부터인가 추레했던 야외 테이블 공간이 화사해졌다. “엄마, 우리 가게는 한 발 들이기가 어려워.” 하며 아들 최성협 씨가 온통 꼬마전구를 매달았다. 아직 학생인 3대째 아들이 가게 일을 도우러 들어왔다. 가게 티셔츠를 만들어 판매하고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을 챙긴다. 사회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 대를 이어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바람보다도 아들의 책임감은 더 커 보인다. 매일 일과를 마친 후 가게에 나와 어깨 너머로 을지OB베어의 오래된 하루를 몸에 익힌다. 몇 해 사이 요란스러운 명소가 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터줏대감인 이곳은 터전이 그대로 이어질지 불명확하다. 그러나 맥주에 담은 깔깔한 고집, 단골과 함께 지내온 역사만은 이미 영원의 영역에 보존됐다. 원치 않는 변화에 맞닥뜨린 2대째의 바람은 소박하지만 아주 거창하다. “아주 작은 가게가 있었는데, 생맥주가 정말 맛있었고 1백 년 된 가게였어.” 이렇게 기억되는 것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