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전 세계 가구 산업계의 트렌드가 탄생하는 밀라노의 일주일은 온 도시의 브랜드 매장 쇼윈도와 광장, 폐공장, 대학교, 갤러리, 레스토랑, 카페가 한껏 ‘드레스업’ 하는 시기다. 위키피디아 속 인물 사진으로만 접했던 스타 건축가와 디자이너, 명품 브랜드 CEO들을 거리에서 맞닥뜨리는 일도 흔하다.
두오모 대성당역에서 지하철로 30분 남짓, 밀라노에서 15km 떨어진 북서부 외곽의 로 피에라(Rho Fiera)는 1961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모태이자 이탈리아 디자인의 위상을 뒷받침하는 국제가구박람회, 살로네 델 모빌레(Salone Internazionale del Mobile di Milano)가 열리는 대형 컨벤션 홀이다. 5일간의 전시 중 마지막 주말 이틀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B2B 관계자들 위주로 ‘진짜 비즈니스’가 오간다. 20개에 달하는 전시 홀은 흔히 한국 코엑스의 10배 규모라고 일컬어진다. 애초에 이탈리아 가구를 해외에 소개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지만, 57회를 맞이한 이번 행사는 33개국에서 온 1천841개의 가구 브랜드가 전시장을 채웠다. 그런가 하면, 가구 브랜드만 들어갈 수 있는 로 피에라 밖 밀라노 거리에서 펼쳐지는 1천367개 장외 전시 푸오리 살로네(Fuori Salone)야말로 디자인 위크를 가장 밀라노답게 만드는,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다. 두오모 대성당 주위의 시내를 일컫는 첸트로, 247년 전통의 브레라 예술대학이 있는 브레라 디자인 디스트릭트, 가장 먼저 자생적 전시장이 생겨나 이제는 명예의전당과도 같은 조나 토르토나, 5년 전쯤 힙스터들의 성지로 급부상한 벤투라 람브라테 등을 중심으로 한 건물 건너 또 다른 건물 가득 밀도 높은 전시가 이어진다.
올해 50만 명의 관람객이 휩쓸고 간 푸오리 살로네에서는 디자인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입김이 세진 패션계의 존재감이 부각되는 한편, 최대한 테크놀로지를 숨긴 IT 브랜드의 세련된 접근법이 두드러졌다. 지난해 스튜디오 스와인의 소위 ‘물방울 나무’ 인스톨레이션으로 크게 주목받은 코스(COS)는 이제 글로벌 전자 브랜드나 유수의 명품 브랜드와 견줘도 모자라지 않을 스타성을 확보한 듯했다. 2011년 코스는 당시 신진 디자이너들의 자유분방한 전시 장소로 떠오르던 벤투라 람브라테 한편에서, 네모난 상자를 형상화한 리빙 스페이스에 걸어둔 코스의 컬렉션으로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데뷔했다. 이후 스나키텍처, 넨도, 수 후지모토 등 스타 디자이너와의 꾸준한 전시 끝에 올해 코스는 16세기 이탈리아 건축을 고스란히 머금은 팔라초 이심바르디(Palazzo Isimbardi)에 입성했고, 빛을 재료로 작업하는 아티스트 필립 케이 스미스 3세(Phillip K. Smith lll)의 초대형 거울 인스톨레이션 ‘오픈 스카이’로 찬사를 이어갔다. 하늘을 향해 활짝 벌어진 거울 패널은 또 하나의 디자인을 창조해내기보다 오래된 건물 상단부와 눈부신 오늘의 하늘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했다. 화사한 고급스러움의 레토릭을 정립한 루이 비통은 기존의 ‘오브제 노마드(Objets Nomades)’ 가구 컬렉션에 이어 홈 컬렉션인 ‘레 프티 노마드(Les Petits Nomades)’를 선보였고 에르메스와 로에베, 마르니 등 대표적인 럭셔리 패션 브랜드는 하나같이 세계 곳곳의 지역성과 전통 수공예에서 영감받아 풀어낸 홈 컬렉션으로 ‘로컬’이 가장 글로벌한 트렌드임을 확인시켰다. 제품뿐 아니라 리더십의 이동 면에서도 패션과 디자인계의 경계는 무색해졌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구 회사 B&B 이탈리아는 디자인 위크를 한 달쯤 앞둔 시점에서 리바이스와 타미 힐피거, 디젤, 에스프리 등의 패션 하우스를 두루 거친 경영자 출신의 아르민 브로거(Armin Broger)를 CEO로 전격 영입해 일찍이 주목을 끌었고, 그의 리더십 아래 선보인 B&B 이탈리아의 첫 밀라노 전시는 2016년 작고한 이탈리아 디자인의 거장 루이지 카시아 도미니오니(Luigi Caccia Dominioni) 의 오리지널 피스를 재생산한 컬렉션으로 하나의 경향성을 이끌었다. 이견 없는 클래식을 동시대에 무드로 재조명하는 방식은 이번 위크를 통틀어 두드러지는 흐름이기도 했으니, 몰테니 & 코는 지오 폰티를, 카시나는 르 코르뷔지에를, 플로스는 카스틸리오니 형제(Castiglioni Brothers)를 각각 오마주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한편, 디자인과 기술의 경계를 없앨수록 강렬한 브랜드 경험을 전달할 수 있음을 간파한 똑똑한 IT 브랜드들은 한껏 부드러운 방식으로 디자인에 스며들었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처음으로 참여한 구글은 ‘Software’가 아닌 ‘Softwear’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었다. 누군가의 거실과 방을 재현한 듯한 세 개의 방에는 핑크, 그레이, 베이지 등 부드러운 파스텔 톤 일색의 직조물이 역시 같은 색감의 소파, 테이블과 어우러져 태피스트리처럼 벽에 걸려 있었고, 파스텔톤 에디션의 구글 홈, 데이드림 뷰, 픽셀이 곳곳에 어우러졌다. 명색이 구글인데, 데이터를 담은 광섬유로 짠 태피스트리일지도 모른다는 빈곤한 상상력이 민망하리만큼 구글은 홈 오피스가 대두되는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그저 부드러운 촉감의 패브릭으로 그려냈다. 최첨단 과학놀이 체험관을 방불케 한 소니의 ‘히든 센스’ 는 한층 은근했다. 물병이나 쟁반, 창문, 벤치 등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터랙티브 전시를 통해 관객은 독보적인 기술력에 직관적으로 감탄했다. 빈 물병을 습관처럼 기울였을 뿐인데 마치 실제 물을 따를 때 나는 소리와 손목에 감지되는 무게가 그대로 전해지는 놀라운 경험이란! 밀라노 시청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열린 폐회식이자 살로네 델 모빌레 어워드 시상식에서 소니는 당당히 ‘베스트 플레이풀니스 상’을 거머쥐었다.
밀라노는 3년 전 ‘2015 엑스포’의 호스트 시티로 나서며 밀라노가 속한 롬바르디아 지역의 관광산업 개발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2015년 엑스포 당시 기술과 예술이 어우러진 푸드 & 엔터테인먼트를 다룬 시의적절한 테마로 패션의 중심으로만 여겨지던 밀라노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시 차원에서의 대대적인 바이크 레일 재정비는 물론 리네이트 공항에서 도심을 연결할 지하철 5호선을 준공하는 인프라 개선도 진행형이다. 밀라노 패션 위크가 초대에 기반한 폐쇄적 행사인 데 반해, 디자인 위크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 더욱 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행사의 확장성에 한몫한다. 밀라노 시의 부시장 크리스티나 타자니(Christina Tajani)는 영국 <모노클>과의 인터뷰에서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목표는 이탈리아 디자인의 중심지뿐 아니라 전 세계 디자인의 중심 허브가 되는 것”이라 강조했다. 타자니의 야심이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조나 토르토나에서 열린 넨도의 개인전 앞 꼬불꼬불 장사진을 친 ‘디자인 피플’이 문득 피렌체와 로마, 베네치아의 오래된 유적을 보려 긴긴 줄을 늘어선 전 세계 인파들과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