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첫 번째 부인, 올가의 초상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오는 4월 파리 피카소 박물관 기획 전시의 주인공은 피카소의 첫 번째 부인인 올가 피카소(Olga Picasso)다. 수많은 피카소의 작품에 등장했으나 본명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여인, 세기의 화가 피카소의 명성에 가려져 첫 번째 아내로만 알려진 그녀, 올가는 과연 어떤 여자였을까? 올가 코클로바(Olga Khokhlova)의 초상화를 피카소의 그림과 패션 화보 그리고 서사로 만나보자. | 피카소,올가

올가 코클로바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정보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러시아제국의 일부였던 현 우크라이나 니진에서 1891년 출생했으며 아버지가 대령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피카소의 부인인 올가 피카소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올가 코클로바의 가장 오래된 공식 기록은 1912년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운영하던 러시아 발레단 입단 기록이다. 디아길레프의 발레단 발레뤼스는 당시로서는 가장 혁신적인 현대발레를 선보였다. 1907년 창설 당시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전통적인 틀에 갇힌 고전발레가 아니라 20세기를 호흡하는 발레,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발레를 꿈꾼 디아길레프는 1911년 러시아 왕립 발레단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그야말로 디아길레프의 독립 극단, 그 어떤 극장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 발레단의 러시아 발레는 이렇게 태어났다.몬테카를로와 파리, 런던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러시아 발레단이 선사한 충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원색적인 색채의 의상, 간명하면서도 시대 정서에 맞는 스토리, 신세대 작곡가들이 대거 참여한 최신 음악, 무엇보다 광야를 뛰어다니는 듯 폭발적인 댄서들의 움직임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음악에는 스트라빈스키, 에릭 사티, 라벨, 무대 디자인에는 조루즈 브라크, 키리코, 앙드레 데랭, 마티스, 피카소, 의상 디자인에는 샤넬, 폴 푸아레 등이 참여했으니 러시아 발레단의 스태프 리스트가 그대로 당시 문화예술 부분의 앙팡 테리블 그 자체였다.러시아 발레단의 무용수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통적인 오페라 발레단의 무용수와는 조금 다른 자질이 필요했다. 극단은 브뤼셀, 파리, 런던, 몬테카를로, 로마, 비엔나 등의 유럽 주요 도시를 비롯해 남아프리카를 몇 개월 단위로 오가며 공연을 펼쳤다. 매일 새로 추가되는 안무를 단시간에 익혀야 함은 물론 도시를 옮겨 다니는 강행군에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이 필요했다. 매일 아침 출근해 근육을 데우는 바 수업부터 정교하게 동작을 교정하고 다듬는 리허설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 등 10개의 발레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던 올가는 극단의 메인 댄서 중 한 명이었다.올가가 피카소를 처음 만난 것은 1917년 2월 로마에서였다. 당시 발레단은 라는 작품을 공연 중이었는데 장 콕토가 시나리오를 맡고, 에릭 사티가 음악을, 피카소가 무대 디자인과 의상을 맡은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당시 피카소는 큐비즘의 시작을 알린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한 뒤 큐비즘의 선구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런 그답게 의 무대와 의상은 온갖 알록달록한 도형의 총집합체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지금 보아도 시선을 확 잡아 끌 정도로 독특하고 파격적이다. 장 콕토는 이를 두고 “이건 큐비즘도 미래주의도 아닌 다. 는 그냥 !”라고 외쳤지만 의 출연자였던 올가 코클로바에게 는 곧 피카소였을 것이다. 당시 피카소는 이미 자신의 작품 세계에 장밋빛 숨결을 불어넣은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나는 에바를 사랑하오’라는 작품을 헌정했던 에바 구엘이라는 지난 연인들은 물론, 오가다 만난 수많은 여인과의 에피소드를 자랑하는 36세의 전형적인 ‘나쁜 남자’였다. 피카소의 여성 편력을 익히 알고 있었던 디아길레프는 러시아 여인을 만나려면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이제 막 시작한 연인에게는 그마저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피카소와 올가의 러브 어페어는 당시 극단 내부의 큰 화젯거리였다. 피카소는 그 해 내내 러시아 발레단 공연을 쫓아다니며 사랑을 속삭였고 두 사람은 로마, 파리, 마드리드를 거쳐 마침내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본가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올가는 그 다음 해로 예정된 남미 공연을 펑크 내면서 자연스레 발레단을 그만두었다. 그녀의 재능을 아까워한 디아길레프와 안무가 레오니드 마신에게서 프로모션을 제의를 받았지만 무용수로서의 미래를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프로 댄서로만 살아온 26살의 올가에게 피카소의 엄마인 돈나 마리아와 여동생 로라, 여동생의 남편인 주안 빌라토까지 함께하는 스페인 대가족의 생활은 어떤 것이었을까? 1917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피카소는 만티야 모자를 쓴 올가 코클로바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 초상을 결혼의 증표로 어머니인 돈나 마리아에게 선물했다.격정적인 스페인 남자인 피카소에게 백작부인의 파티에 초대 받고 잘 꾸며진 살롱에서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는 삶이란 맞지 않는 옷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올가와 피카소는 1918년 7월 파리의 러시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피카소의 절친인 장 콕토와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제이콥스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피카소의 1918년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여름’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 해 1월과 2월에는 파리의 주요한 화상 중 하나였던 폴 기욤 갤러리에서 마티스와 함께 전시를 열었고, 이 전시의 성공 덕택에 올가-피카소 커플은 당시 인기 있던 여름 휴양지인 프랑스 남서부 비아리츠로 여행을 떠났다. 비아리츠, 코트 다쥐르, 디나르 등 이름만 들어도 바다와 태양, 올리브 냄새가 풍기는 지명이 피카소의 인생에 최초로 등장한다. 1918년 여름 비아리츠에서 그린 ‘수영하는 여자들’는 부드러운 색채의 바닷가에 있는 색색의 수영복을 입은 여인들의 즐거운 한때를 안온하게 묘사하고 있다. 피카소의 블루 시대 화폭을 가득 메웠던 어릿광대와 거리의 여인, 카바레 안 어두운 표정의 남자들 같은 몽마르트르의 슬픈 군상과는 전혀 다른 행복한 감정이 전해지는 그림이다. 이때부터 피카소는 스스로 창시한 큐비즘을 버리고 앵그르의 회화를 닮은 클래시시즘 시대를 열었다.게다가 화단의 이단아이자 스페인 이민자였던 피카소는 서서히 프랑스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천재 피카소라는 명성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던 시기다. 오갈 데가 없어 센 강에 띄워 놓은 세탁용 배 같은 옹색한 집에서 살면서 장티푸스에 걸린 연인 에바 구엘을 살리기 위해 약을 구하러 다니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그 해 가을 피카소와 올가는 유명 화상 폴 로젠베르그의 주선 아래 파리의 중심가인 보에티 가로 거처를 옮긴다. 코트 다쥐르의 작은 마을인 주앙 레 팡의 반짝이는 모래 아래에서 춤을 추는 피카소와 아름답고 섬세한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보몽 백작부인이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는 올가의 자태, 디아길레프, 마신 등 절친한 문화계 인사들, 휴가지까지 찾아올 정도로 막역한 화상이었던 로젠베그르와 폴 기욤 등 그 시절 피카소와 올가의 사진은 성공한 화가와 한때 유명 무용수였던 아름다운 부인이라는 완벽한 커플의 이미지 딱 그대로다. 그리고 1921년 2월 피카소의 첫 아이이자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딴 아들 파올로가 태어난다. 울창한 숲과 청정한 공기로 가득한 퐁텐블로에서의 그 해 여름부터 피카소는 최초로 아버지로서의 시선을 작품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모성’ ‘여인과 아기’ ‘바닷가의 엄마와 아기’ 같은 엄마와 아이의 평화로운 한때를 포착한 작품부터 어릿광대로 분장한 파올로, 그림 그리는 파올로, 하얀 모자를 쓴 파올로 등 아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개와 고양이, 당나귀에 둘러싸여 크게 웃고 있는 엄마, 아빠와 아들. 피카소 평생에 걸쳐 유일하게 가족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기다. 그렇다면 올가는 어땠을까? 디아길레프, 마신과 막역한 사이인 데다 피카소가 러시아 발레단과 콜라보레이션을 이어갔던 만큼 올가는 발레단을 떠났어도 인연이 이어졌다. 가족 사진 속에서 발견되는 발레복을 입은 올가의 모습이나 마신, 디아길레프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올가는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파티복을 입은 올가, 부르주아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보에티 가의 거실에서 모피 머플러를 두르고 실내복을 입은 올가의 모습에는 이 시기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안온함과 우아함이 그대로 묻어 있다.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 교양 있는 부인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메인 그림이기도 한 1923년 작 ‘생각하는 올가’에서 우리는 그녀의 숨겨진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에도 러시아는 혼돈과 결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폭등하는 물가와 생필품 부족, 전쟁으로 인한 인력 손실은 혁명으로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혁명 이후 장장 4년 동안 벌어진 내전 동안 권력 암투는 계속되었고, 수많은 러시아인이 실종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유럽에서 활동했으나 러시아인으로서 뿌리를 간직하고 있던 올가는 아버지의 실종, 궁핍, 망명 등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자신의 한쪽이 무너져내리는 슬픔을 느꼈다. 러시아에 머물며 올가와 서신을 나눴던 친구 니나는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춥고 모든 것이 비싸고 공포에 사로잡혔어.”라는 비명을 글자가 빽빽하게 들어찬 두 장짜리 편지에서 토로하고 있다. 일 년 뒤 니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신은 끊어진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온 암울한 소식에 지쳐갈 때쯤 올가는 피카소의 숨겨진 연인, 마리 테레즈에 대해 알게 된다. 올가가 정확히 언제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의 관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호하다. 1925년이라 하는 이도 있고 1927년이라는 설도 있다. 힌트는 피카소의 그림이다. 1924년부터 피카소의 화풍에는 서서히 변화가 보인다. 고전주의 대가와 그리스 신화 등에 탐닉했던 부드러운 피카소의 화폭에서 점점 날카로운 선과 강렬한 색채, 분노와 억압 같은 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애당초 격정적인 스페인 남자인 피카소에게 백작부인의 파티에 초대 받고 잘 꾸며진 살롱에서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는 삶이란 맞지 않는 옷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화폭 속 올가의 모습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1929년 작 ‘빨간 안락의자의 나체’에서 올가는 더 이상 부드럽고 우아한 여인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마구 선을 그은 듯한 뒤틀린 육체에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올가의 모습은 고통스러워 보인다. 비정상적으로 늘어진 팔과 뻣뻣한 머리를 한 이 여인은 바깥이 보이지 않는 노란 창과 기묘하게 반짝이는 초록 벽지로 둘러싸인 방에서 서서히 질식해 죽어갈 것만 같다.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의 관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호하다. 1925년이라 하는 이도 있고 1927년이라는 설도 있다. 힌트는 피카소의 그림이다. 1924년부터 피카소의 화풍에는 서서히 변화가 보인다. 고전주의 대가와 그리스 신화 등에 탐닉했던 부드러운 피카소의 화폭에서 점점 날카로운 선과 강렬한 색채, 분노와 억압 같은 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애당초 격정적인 스페인 남자인 피카소에게 백작부인의 파티에 초대 받고 잘 꾸며진 살롱에서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는 삶이란 맞지 않는 옷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화폭 속 올가의 모습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1929년 작 ‘빨간 안락의자의 나체’에서 올가는 더 이상 부드럽고 우아한 여인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마구 선을 그은 듯한 뒤틀린 육체에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올가의 모습은 고통스러워 보인다. 비정상적으로 늘어진 팔과 뻣뻣한 머리를 한 이 여인은 바깥이 보이지 않는 노란 창과 기묘하게 반짝이는 초록 벽지로 둘러싸인 방에서 서서히 질식해 죽어갈 것만 같다.널리 알려졌다시피 피카소는 7명의 공식 연인을 두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렸다. 1천8백85점의 회화와 1천2백28점의 조각, 7천89점의 데생 외에도 태피스트리, 세라믹, 판화 등 5만 점에 이른 작품을 남긴 정력적인 인물답게 복잡한 사생활로도 유명한 작가였다. 지금은 모두 그림으로만 남은 그의 여인들, 그중에서도 죽기 전까지 피카소의 첫 번째 부인으로 남은 올가. 피카소의 인생에 바람처럼 스쳐간 그녀들의 스토리가 애잔한 이유는 자신의 본명이 아닌 피카소의 여자로 세상에 이름을 남겼기 때문이 아닐까. ※가격이 표기되지 않은 제품은 모두 가격 미정임."모든 것은 사랑에 달려 있다.” 전을 기획한 피카소 박물관의 책임 큐레이터 에밀리아 필리포(Emilia Philippot)는 피카소에 정통한 미술사학자이기도 하다. 그녀와 나눈 세기의 커플에 관한 이야기.피카소는 여성 편력으로 유명하다. 공식적으로는 일곱 명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유독 올가를 전시 주제로 삼은 이유는? 올가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전시 주제입니다. 우선 1918년 7월 정식으로 혼인한 피카소의 첫 번째 배우자죠. 1935년 별거에 들어갔지만 올가가 사망하기 전까지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올가는 1921년 2월에 피카소의 첫 번째 아이인 파올로를 낳았죠. 피카소는 올가와 함께 인생에서 처음으로 부모가 되고 부성애를 느끼게 됩니다. 피카소처럼 올가 역시 러시아 발레단 무용수로서 예술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최초로 피카소의 손자인 베르나 뤼즈 피카소가 간직하고 있던 올가의 개인적인 서신이 공개됩니다. 이국 땅에서 모국어를 쓰지 못하고 살았던 그녀에게 서신은 가족과의 유일한 끈이었습니다. 또한 올해는 피카소가 올가와 만난 지 1백 년이 되는 해입니다. 1917년 2월에 만났죠.올가와 함께하던 시절, 피카소의 화풍은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클래시시즘으로의 회귀가 시작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올가와의 관계가 이러한 화풍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나? 흔히들 피카소의 작품을 뮤즈, 모델, 스타일, 화풍의 변화로 나누어 무슨 무슨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번 전시는 이렇게 시대를 규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습니다. 1918년부터 1923년까지 제작된 올가의 초상화들은 확실히 클래시시즘의 양상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동시에 피카소는 큐비즘을 지향하는 데생을 여러 개 제작했습니다. 사실 평생에 걸쳐 피카소는 큐비즘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클래시시즘에 대한 영감의 원천은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앵그르의 그림이라든가,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작품, 프랑스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퐁텐블로 유파 등으로 말이죠. 그리고 올가의 모습은 피카소의 클래시시즘 이외의 시대에 그려진 작품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특히 1925년부터 그녀의 모습은 초현실주의적 경향과 결합하여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1918년 제작된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올가의 초상화’가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죠. 올가와 피카소의 만남 초기에 제작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올가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두 사람이 살던 아파트 거실에 걸려 있던 것으로 당시 피카소와 올가를 방문했던 이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작품이었습니다. 또한 1932년 파리의 갤러리 조지 프디와 취리히의 쿤스트 하우스에서 열린 피카소의 첫 번째 회고전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작품입니다. 올가의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올가의 아라베스크형 우아한 포즈와 아틀리에 벽에 작품이 마구 걸려 있는 뒷배경의 대조가 흥미롭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자수에 열중하고 있는 올가의 섬세하고 우아한 모습은 종이를 붙여놓은 듯 밋밋하고 인공적인 배경 덕택에 더욱 돋보입니다. 올가의 모습에서는 앵그르에서 영향을 받은 클래시시즘을 엿볼 수 있는 반면에 뒷배경에서는 큐비즘의 언어를 읽을 수 있습니다.일반적으로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피카소의 로즈 시대, 에바 구엘과 큐비즘.... 이런 방식으로 피카소의 연인들과 피카소의 화풍 변화를 연관시켜 생각한다. 이런 방식에 동의하나? 동의하지 않습니다. 피카소는 다양하고 풍부한 영감의 원천을 가진 화가였습니다. 그리고 이 다양한 원천은 피카소 안에서 내면화되어 켜켜이 쌓인 후 작품으로 분출됩니다. 특히 피카소가 올가를 만났던 시절은 화가로서 원숙기를 거치면서 동시에 많은 문화적인 접촉을 통해 영감을 다면화했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1917년 를 준비하기 위해 이탈리아 여행을 했고 이때 그는 이탈리아의 고전미술과 더불어 후에 이탈리아 가면극 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이탈리아 민중미술도 접했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올가의 시대, 즉 1917년부터 1935년까지 피카소의 작품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클래시시즘의 영향입니다. 하지만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올가는 클래시시즘의 뮤즈가 아니라 머리를 흔들고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괴상한 모습으로 화폭에 등장합니다. 또한 피카소가 그린 모자를 쓴 큐비즘의 여인들 중에는 올가의 모습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1935년 비평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와의 인터뷰에서 피카소는 “불행이든, 기쁨이든 이 모든 것은 내 사랑이 어떻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볼 때 피카소의 개인적인 관계 즉 연인들이 화가로서의 피카소, 예술가로서의 피카소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피카소의 사적인 인생에서 연인들이 미친 영향은 결정적입니다. 피카소는 연인과의 관계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내면화시켰죠. 그의 천재성이나 감성은 상당 부분 이러한 그의 에너지에 빚지고 있습니다. 피카소의 예술에 대한 태도와 연인에 대한 태도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특유의 감성, 사물의 외형을 특유의 시각을 통해 변화시키는 데서 나오는 에너지와 힘 등이 그렇습니다. 전시 기획자로서 저는 이 전시를 통해 피카소의 연인들의 존재가 한두 작품에서 당장 드러나는 그런 영감의 원천이 아니라 다른 영감의 원천과 섞여 오래도록 피카소의 작품에서 관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