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자의 여자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지난 1백50년동안 <하퍼스 바자>에서 자신만의 미학적 비전을 펼치며 눈부신 혁신을 이뤄낸 여자들을 만나보자. | 하퍼스 바자,150주년

의 창립 에디터였던 메리 루이즈 부스(Mary Louise Booth)에서 얘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뛰어난 작가였을 뿐 아니라 당대를 이끌어간 지식인으로 미국 남북전쟁 당시 유니언(링컨 대통령 하에 결집한 북부연방으로 노예제도의 반대를 주장했다)을 지지하는 프랑스 작가들의 글을 번역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노예제도 폐지와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던 그녀는 1869년 기사에 이렇게 썼다. “예성의 참정권은 진실과 정의의 기반 위에 지어진 것이다.” 문학적 가치를 향한 헌신에도 못지않은 열정을 보인 그녀는 찰스 디킨스, 헨리 제임스, 토머스 하디를 위시한 동시대를 이끈 작가들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힘을 다했다.1867년부터 1889년, 57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에디터로 일했던 메리 부스에 이어 자리를 물려받은 또 다른 뛰어난 문장가는 마거릿 생스터(Margaret Sangster)다. 시인이자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녀는 잡지의 목적이 ‘우울함의 소멸, 고통의 완화, 지루함의 박멸’에 있다는 믿음에서 영감을 받았다. 에디터에게는 ‘집중, 헌신, 그리고 지치지 않는 힘’이 요구된다고 말하며 착실하게 커리어를 지속한 생스터는 자전거를 주제로 여성의 독립을 장려한 1896년 3월호 기사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당시 미국 사회는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을 부당한 눈초리를 바라보았다.)1900년, 생스터의 뒤를 이은 후계자, 진취적인 성향의 엘리자베스 조던(Elizabeth Jordan)은 왕성하게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가한 ‘서프러제트’였으며, 기자인 동시에 다작을 발표한 소설가였다. 위스콘신의 지역 신문에서 일하던 조던은 20대 중반에 뉴욕에 온 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유명 살인 사건들의 취재와 더불어 빈민가 공동주택에서의 삶에 대한 기사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녀가 13년간 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동안 잡지는 주간지에서 월간지로 탈바꿈했고, 아르누보 스타일의 표지와 문학적 탁월함으로 널리 사랑 받았다. 헨리 제임스와 오랜 우정을 나눈 조던은 런던 여행 중 훗날 마크 트웨인과 함께 19세기 후반 최고의 미국 작가로 손꼽히게 될 이 위대한 작가와 처음 대면하게 된다. 요즘 에디터들과는 달리 비교적 느긋한 출장이 주어지던 시절, 두 달 남짓한 기간을 파리에서 보낸 그녀는 영국해협을 건너 런던의 전설적인 호텔인 클래리지(Claridge’s)에 6주간 머물 예정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첫날 저녁, 우연한 기회에 조우하게 된 제임스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돌아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나는 그 순간 헨리 제임스의 눈이 가지는 그 이상한 마력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 나로 하여금 그가 마치 내 영혼까지 읽었다는 착각이 일게 했다. 아니, 읽었음이 분명하다.”에서 일한 제임스 로드니 부인(photo by Francis Kollar)"/> 미국판 편집장이었던 리즈 틸버리스 "/>의 아트 디렉터 베아 파이틀러(Bea Feitler)와 루스 안셀 "/> 미국판 에디터였던 낸시 화이트"/>1913년, 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에 매각되자 조던은 를 떠났다.(잡지의 창립자인 하퍼 형제들은 아직까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출판 왕국을 세웠다.) 뒤이은 20년은 가 일련의 남자들에 의해 편집된 시기였다. 그들은 유명 작가들에게 칼럼을 의뢰하는 전통을 유지했는데, 그중에는 도로시 파커와 비타 색빌-웨스트도 있었다. 이 시대는 우아하고 예술적인 표지가 균일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 기간이었고, 그중 유독 높은 비율로 디자인을 전담한 예술가는 ‘에르테(Erté)’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진 러시아 출신의 로맹 드 티르토프(Romain de Tirtoff)였다.하지만 가 진정 새로운 높이로 비상한 것은 1934년 새 에디터로 카멜 스노(Carmel Snow)가 선임된 이후부터였다. 1887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였다.(그녀의 남동생 톰 화이트는 훗날 허스트 매거진을 이끄는 경영 인사가 된다.) 에서 긴 견습 기간을 마친 그녀는 1932년 말 무렵 로 옮겼고, 그 효과는 거의 즉각적이었다. 살바도르 달리의 대담한 표지, 장 콕토의 초현실주의적인 일러스트레이션, 혁명적이라 할만큼 새로운 스타일의 패션 사진들까지 스노의 시대를 초월한 미적 감각은 현재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1934년 스노에 의해 아트 디렉터로 임명된 알렉세이 브로도비치는 전설적인 모더니스트 디자인으로 의 룩을 변화시켰다. 또한 스노는 1936년 다이애나 브릴랜드(Diana Vreeland)를 발굴하여 패션 에디터로 소개했는데 이후 브릴랜드의 ‘Why don’t you?’ 기획 칼럼은 잡지에 새로운 특별함을 더했다. 스노, 브로도비치, 그리고 브릴랜드의 삼두체제는 리처드 애버던, 루이즈 달-울프, 릴리언 바스만(바스만은 사진으로 방향을 틀기 전, 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바 있다)을 비롯한 위대한 사진작가들에게 발판을 제공했다.스노의 장려에 힘입어 앤디 워홀은 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카슨 맥컬러스와 트루먼 카포티는 단편을 기고했다. 또한 스노는 크리스찬 디올의 열렬한 지지자로 그의 1947년 데뷔 컬렉션에서 ‘뉴 룩(New Look)’이 신조어로 자리 잡는 데 공헌했고, 샤넬, 스키아파렐리, 발렌시아가를 칭송하며 “우아함이란 훌륭한 취향에 가미된 대담함”이라는 자신의 모토에 언제나 충실했다. 브릴랜드 역시 스스로 발굴한 인재를 잡지에 소개했는데, 훗날 유명 할리우드 배우가 된 로렌 바콜은 루이즈 달-울프가 촬영한 1943년 1월호 패션 페이지에 등장, 같은 해 3월 표지에 실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바콜은 브릴랜드의 노력과 스타일을 향한 본능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재능, 그녀에게 주어진 창의력이라는 선물이 끝이 아니었어요. 투지, 인내, 결단. 바로 이것이야말로 차이점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어떻게 를 오래도록 기릴 만한 잡지로 만들었는지는 다음 기사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유명세를 떠나 의 발전에 제 몫을 다한 공헌가들은 많다. 그리고 그들 전부가 뉴욕에서 일한 것은 아니었다. 1929년에는 의 영국 에디션이 론칭되었고(물론 영국에서도 미국 버전의 를 구매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의 과거 인물들 역시 영국에 본거지를 두게 되었다. 여기엔 독자들에게 ‘명예로운 제임스 로드니 부인(Hon Mrs James Rodney)’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칼럼니스트도 포함되는데, 1932년 2월호에 칼럼을 쓰며 등장했던 그녀는 2년 뒤 패션 에디터로 선임된다. 화재사고로 남편을 잃은 -그는 불타는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다 사망했으며 그녀도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바로 다음 해였다.에 실린 앤디 워홀의 일러스트레이션"/> 영국판"/>프랜시스 스트릭랜드 러벨 올덤(Frances Strickland Lovell Oldham)이란 이름으로 시애틀의 부유한 변호사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런던으로 이주해 로드니 대위와 결혼하기 전까지 파리와 로마에서 살고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녀가 영국판의 에디터로 일하기 시작한 시절을 기점으로 잡지는 에벌린 워(Evelyn Waugh), 버지니아 울프 같은 조력자들과 함께 문학적인 성과를 자랑하게 되었다. 로드니 부인은 오랜 친구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함께 노먼 하트넬(Norman Hartnell)을 비롯한 영국 디자이너들을 향해 충직한 지지를 보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는 영국 대공습이 만연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공습지와 농가에서 전쟁물자 지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은 패션 화보로 사기 증진을 위한 활동에 전념, 자신만의 애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녀의 검은색 푸들은 사무실 바닥의 검정 카펫에 올라오는 순간 투명하게 변신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적어도 그 개에 자주 걸려 넘어진 디자이너 딕비 모턴(Digby Morton)의 주장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다. 이 용감무쌍한 패션 에디터는 파리 컬렉션, 카우즈 세일링 리가타 대회(Cowes Sailing Regatta), 스코티시 무어(Scotish Moor)를 뛰어다녔고, 1935년 1월에는 독자들을 위한 위트 있는 새해 목표를 제시했다. “절대 꽃과 깃털을 함께 입지 마세요. 어민(Ermine, 하얀 털)은 언제나 새것처럼 새하얗게 관리하고, 보드카에는 캐비아, 샴페인에는 오이스터를 곁들이세요. 그리고 스스로의 문제는 혼자 해결할 것!” 로드니 부인이 영국 섬유 수출 지원을 위해 위험천만한 해외 원정을 떠난 사이, 카멜 스노는 프랑스에서 칼럼을 통해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음을 알렸다. “한 주 동안, 거의 하룻밤 사이에 도시가 버려졌다.” 그녀는 15 뤼드라페에 위치한 사무실에 앉아 적어 내려갔다. “택시는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모든 전화는 끊어졌다. 긴장감이 감도는 이 괴로운 시절을 파리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이 도시의 침묵도, 프랑스 여성들의 용기도 결코 잊지 못하리라. 남자들이 한명 한명 동원되어 떠나는 가운데 프랑스 여자들은 일말의 흥분 증세도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일상의 일들을 헤쳐 나갔다. 이것은 집단 용기가 아닌, 개인의 영웅적 행동이다.”스노는 전쟁이 터진 후 파리로 향한 마지막 미국 잡지 에디터이자, 1944년 독일에서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돌아온 사람이 되었다. 멀고도 길게 돌아야 했던 그 여정은 매우 위험했는데, 서아프리카에서 리스본을 거쳐 마드리드에 도착한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디자이너,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를 만나기도 했다. 이후 스노는 인파로 미어터지는 기차를 타고 국경을 횡단하여 프랑스에 입성했다. 머지않아 다시 길을 떠나면서 그녀는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함께 전쟁으로 찢겨나간 동 프랑스를 기록, 끔찍한 흔적들을 담았다. 마을을 지나며 그녀는 적었다. “집, 마구간, 교회는 원자 단위로 부서져내려 삶의 숨결조차 남지 않았다.”카르티에 브레송과 스노는 곧 런던으로 발길을 돌린 후, 지속되는 폭격으로 깊이 상처 입은 도시에서 애정을 담아 영국의 희생정신과 인내심에 대해, 그리고 긴 전쟁의 시대가 감내하도록 강요한 고통과 결핍에 대해 발표했다. 한편 런던의 팀은 근무 외에도 방화 관리를 돕거나 적십자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며 전시 근로에 기여했다.1945년부터 6년간 영국 의 에디터였던 앤 스콧 제임스(Anne Scott-James)는 피처 섹션의 위상을 패션에 버금갈 만큼 상승시킨 장본인이었다. 18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장신에 늘 양성적이면서도 우아한 스타일을 자랑했던 스콧 제임스는 모든 피처 칼럼에 새로운 시각을 담아낼 것을 주장했다. 그녀는 예술 분야로 취재를 넓히고 높은 연령대의 여성들을 겨냥한 칼럼과 남성 패션 특집까지 주제를 폭넓게 확장하며 피처 기사의 질을 높였다. 작가 부부 밑에서 자라 작가인 자매를 가족 구성원으로 둔 스콧 제임스는 친구인 존 배처먼의 시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기사를 잡지에 실으며 훌륭한 인재 발굴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했다. 커버"/> 커버"/> 창간호"/> 커버"/> 커버"/> 커버"/> 커버"/> 커버"/> 커버"/> 영국판 커버"/>낸시 화이트(Nancy White)는 카멜 스노가 1957년 말 은퇴했을 때 에디터가 되었다. 그녀는 에서 일했으며 허스트 사 제너럴 매니저의 딸이기도 했다. 스노는 화이트를 인정하지 않았고 패션 역사에서도 화이트는 무시돼왔다. 그러나 화이트는 1958년 1971년까지 에서 일하는 동안 새로운 시대를 용감히 받아들였으며 리처드 애버던과의 스페이스 에이지 촬영부터 앙드레 쿠레주의 초현실주의 패션까지 격동의 1960년대를 패션 스토리에 잘 담아내었다. 화이트는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과는 별개로 우아함과 섬세함을 표방하는 의 모토를 지켜나갔다. 하면 누구나 알렉세이 브로도비치를 떠올리지만 1963년부터 6년간 미국판의 아트 디렉터를 맡았던 루스 안셀(Ruth Ansel) 역시 에서 최상의 커리어를 펼쳤다. 1961년 그래픽 디자이너로 입사한 그녀는 2년 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아트 디렉터가 되었으며 당시 24살의 나이로 업계 최연소 기록 역시 갱신, 페이지마다 젊음과 혁신을 불어넣었다. 1965년에는 여성 잡지 최초로 남자 -스티브 매퀸- 를 표지에 내세웠고 1965년 4월호 ‘팝(Pop)’ 이슈에서는 리처드 애버던과의 특별한 콜라보레이션으로 나사 우주복을 갖춰 입은 진 시림튼의 화보를 탄생시켰다. 이 이미지는 ‘Swinging Sixties’로 회자되는 1960년대와, 그 활기찬 시대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바치는 예찬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가장 아이코닉한 패션 화보로 일컬어진다. 그녀는 말한다. “잡지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비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잡지는 그것을 도발적으로 반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그리고 20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했던(1992~1999) 미국 의 리즈 틸버리스(Liz Tillberis)가 있다. 영국 에서 일하다 편집장이 되어 뉴욕에 오면서 틸버리스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야심을 품었다. 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잡지로 만드는 것. 틸버리스는 자신이 방향키를 쥔 7년 동안 마리오 테스티노, 피터 린드버그, 케이트 모스는 물론 다이애나 황태자비에 이르기까지 특출난 재능을 자랑하는 인물들을 섭외해 자신의 비전을 구현해나갔다. 임기 동안 난소암으로 고통 받았음에도 그것이 자신의 낙관적인 사고와 추진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녀의 정신은 자신이 이룬 모든 업적과 더불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망을 불과 며칠 앞두고 만난 사진가 패트릭 드마셸리에는 페이지 레이아웃에 대해 상의하던 그녀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웃고 있었어요.” 힐러리 클린턴은 리즈의 사망 이후 1999년 7월호에 실린 추모 기사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리즈 틸버리스가 인터뷰를 위해 백악관을 찾았던 것은 난소암 진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절망적인 소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매력적이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그녀는 스케치 패드를 손에 들고 백악관을 배회하다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을 발견하면 걸음을 멈추고 그림을 그렸다. 장미 정원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끔찍한 질병에 짓밟힌 여성이 아니라 인생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여성을 보았다. 그 평화로움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