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여배우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올 한 해, 영화와 드라마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의 길을 내고 그 길에 조명을 비추고 싶게 만든 여배우들, 최유화, 신현빈, 스테파니 리. | 여배우,최유화,신현빈,스테파니 리

최유화는 두 번 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다. 이경미 감독의 말마따나 ‘파편적이고 분열적이고 신경질적인 과잉의 영화’는 다시 볼 때 풍성하고 몽환적인 한 편의 서사시가 된다. 짧게 등장하는 인물의 미세한 표정, 잠깐 스치는 소품, 얼버무리는 대사 한 마디에서도 영화적 의미와 단서를 유추하게끔 하고, 불규칙적인 리듬과 불협화음의 기묘한 아름다움이 중독적이다. “제가 나온 작품을 네 번이나 본 건 처음이었어요. 맨 처음 볼 때는 제 연기에 집중하느라 전체적인 이야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요. 두 번, 세 번 계속 보니까 정말이지 불필요한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고 배우들의 리액션이 새롭게 발견되더라고요. 모든 캐릭터가 다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구나. 진짜 좋은 영화구나. 감독님한테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에서 손예진은 지난 15년간 내보인 적 없는 섬뜩한 얼굴로 재평가 받았고, ‘이상한 여자들의 영화’에서 김주혁은 딱 제 몫의 존재감을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돋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손예진의 ‘연홍’보다도 각인된 그 이름 ‘손소라’ 역을 맡은 최유화는 관객은 물론 이경미의 동료 감독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김지운, 김종관 감독은 편집 과정의 를 보다가 최유화를 발견하고는 오디션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곱게 빗어 묶은 머리, 왼쪽 뺨의 점, 살뜰함을 가장한 경상도 말씨로 연홍을 기만하던 손소라가 이 모든 비극적 사건의 결말을 알게 된 연홍과 단둘이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그녀는 끝내 사투리가 개입되지 않은 평서문으로 이렇게 말한다. “둘 다 혼났으면 바랐다.”(이 장면은 극장 개봉 시 편집되었고 IPTV에서만 볼 수 있다.) 최유화는 뭉크의 그림을 보며 손소라를 그려나갔고 ‘항상 울음을 참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디션을 보러가는 길에는 임산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궁금해 배에 뭘 집어넣은 채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노출 신도 있고 사투리도 배워야 했던 보다도 김종관 감독의 에서 맡은 잡지사 기자 역이 연기하기에 더 어려웠다. 북 토크를 위해 서울을 찾은 일본 소설가 이와세 료를 최유화가 인터뷰하는 시퀀스는 시종일관 픽픽 웃게 만드는 영화 전반의 분위기에서 유독 모호하고 차분하게 그려져 있다. “편집된 신 없이 딱 촬영한 만큼이 그대로 영화에 쓰였는데 길지 않은 촬영이었음에도 너무나 어려웠어요. 한국말로 해도 어려운 환상과 현실의 경계, 문학 등의 얘기를 일본어로 하려니.... 게다가 다른 장면들은 빵빵 터지는데 제가 나오는 장면은 그와 정반대의 분위기라서 감독님께 너무 어렵다고, 보다 어렵다고 그랬었죠.(웃음)”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감독은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제가 연기한 ‘현경’은 실제 인물일 수도 있고 상상 속 인물일 수도 있어요. 우리 삶의 비일상적 순간들을 말하기도 하고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되짚어보게 하기도 하고요.”는 네 번 봤어요. 모든 캐릭터가 다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구나. 진짜 좋은, 좋은 영화구나. 감독님한테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어요. VIP 시사회 때 극장을 찾은 김지운 감독, ‘연계순’ 역의 한지민과 함께 찍은 은 올해 최유화를 알린 3부작 가운데 가장 늦게 개봉한 작품이다. 그녀는 송강호의 비서 역으로 출연해 종국에는 소신 있는 행동을 하고 마는 송강호를 돕는다.(돈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봉투가 건네지는 장면으로 추측하건대 신념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익 때문에 돕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김지운 감독님, 송강호 선배님과 함께 촬영할 수 있어서 한없이 행복했다”는 그녀에게 나는 번지수 틀린 불만을 제기했다. 영화에서 보여준 것 너머의 삶에 대해 상상해볼 여지를 주는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말이다. “그런 불만을 갖게 만드는 영화들이 많이 있잖아요. 이 그에 해당되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테죠.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이야기의 특색, 감독의 성향 등 각 영화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여자가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는 영화는 투자가 잘 되지 않는 산업 시스템의 문제도 있겠죠. 실제로 오디션을 볼 때 여자 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지 않다는 걸 확실히 느껴요. 그래서 제게는 더욱 소비되지 않는 캐릭터라는 게 작품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돼요. 분량이 많지 않아도 상관없어요.”고등학교 때까지 피아니스트가 꿈이었고 요즘엔 힙합 뮤지션들의 음악을 즐겨 들으며(송강호에게 드레이크를 들려주고 김광석 노래를 받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휴대폰을 찾기보다 기도를 하거나 시선이 닿는 곳에 놓아둔 화분의 초록색을 눈에 담으려고 한다는 최유화. 조금만 기다리면 ‘소비되지 않는 캐릭터’로 분한 최유화를 기대해도 좋을 만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헤어/ 채수훈(O’Hair), 메이크업/ 오가영신현빈마스카라만 슥슥 바른 신현빈을 카메라 앞에 세우고 사진가, 스타일리스트, 헤어, 메이크업 스태프가 하나같이 예쁘다고 아우성이다. 하얀 종이 위에 세필로 그린 것 같은 신현빈의 섬세한 얼굴과 우아한 제스처는 딱 패션계 사람들 취향이다. “데뷔하기 전에는 성형을 하면 어떻겠냐는 말을 들었는데 요즘에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 분들이 많아요.(웃음)”예정대로라면 올해 말 우리는 영화 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신현빈을 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개봉은 또 다른 작품인 과 함께 내년으로 밀렸다. 두 영화에서 신현빈은 적은 분량 속에서 인물에 대한 풍부한 암시를 연기에 녹여내야 했다. “몇 장면 안 나오거든요. 굉장히 일상적인 장면에서 상대 배우와의 관계나 감정 상태를 보여줘야 해서 지극히 평범한 장면인데도 연기하기가 어려웠어요. 아무래도 여자 캐릭터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영화가 많지 않다 보니 아쉬운 점이 있죠. 회사 남자 선배들이랑 얘기를 하다가도 자주 나오는 얘기예요. 확률적으로 남자 4~5명 나올 때 여자 1명 나오는 거 같다고.”이런 현실 속에서 지난해 신현빈은 복수심을 품고 사는 두 여자의 이야기인 의 주인공 ‘지은’을 연기하는 ‘행운’을 누렸다. 촉망 받는 사격선수 지망생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는 사고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 일로 실어증에 걸린 지은에게 더 큰 불행이 닥쳐오고 총 한 자루를 얻게 되면서 참담한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 신현빈은 기이할 정도로 이어지는 불행 속에서도 실낱 같은 존엄을 잃지 않는다. 영화 자체보다도 신현빈의 그 기운에서 감동을 받을 정도였다. “은 단순히 유린 당한 여자의 복수를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아픔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도한 또 다른 여자와의 연대도 있고, 여자친구와의 우정을 향한 의리도 있고. 여자들끼리 나눌 수 있는 삶에 대한 얘기라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배우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는 결국 연기에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뭔가를 표현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것을 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빽빽한 숲 한가운데 사람의 얼굴을 한 사슴이 여러 대의 화살을 맞아 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슬퍼 보이지만 투명하고 강한 시선의 눈빛에서 생의 의지가 엿보이는 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사슴.’ 예술대학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한 신현빈이 을 연기하면서 떠올린 그림이다. “학교에서 제일 많이 한 게 그림을 보고 설명을 하ᄌ거나 글을 쓰는 거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림과 글의 호환이 잘 되는 거 같아요. 시나리오 볼 때도 장면으로 전환하는 게 빠르고요. 언젠가 문득 미술을 공부한 게 연기에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전시, 공연, 영화, 책 같은 영혼을 살찌우는 즐겨 찾기가 많은 것 역시 다른 이의 삶을 대리 체험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된다고 신현빈은 말한다.대학 졸업 후 신현빈은 “작업이 너무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그리는 걸 너무 좋아해서 결국에는 그 열정에 힘입어 작업에 밀도가 생기는 타입도 아니어서” 미술을 그만두었다. 오랫동안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던 연기에의 꿈을 위해 간단히 찍은 프로필 사진으로 오디션을 보고 베트남 여자 ‘장미’ 역으로 덜컥 주연을 맡았다. “부랴부랴 어떤 선배님께 연기를 배우고 영화에 들어갔어요. 그때는 베트남 여자라니, 일생에 단 한 번 해볼 수 있는 역할일 거야, 하면서 촬영했는데 나중에 또 비슷한 역할이 들어오더라고요.(웃음)” 겁 없이 연기한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받으면서 배우가 된 지 6~7년차. 신현빈은 제시카 차스테인을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꼽는다. “제시카 차스테인이 사람들의 가시적인 영역에 들어온 건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줄리어드에서 연기를 공부했지만 별거 아닌 역할들을 맡다가 4년여 걸쳐 찍은 5~6개의 영화가 한 해에 개봉했고 그 중에 와 와 가 있었죠. 차스테인에게는 그 시간을 견뎌온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연기 내지는 애티튜드가 있어요.” 불운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담금질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은은한 위엄이랄까, 그런 사람이 조용히 부상할 때 주는 감동이 있는데 여배우일 때는 특히 그렇다. “배우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는 결국 연기에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제가 미술을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결국 작가도 자신의 삶이 작품에 드러나거든요. 성공한 작가가 자신의 일상을 잘 운용하지 못했을 때 나중에는 작품이 안 좋아지는 걸 많이 봤어요. 창작의 장르가 다를 뿐이지 뭔가를 표현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것을 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헤어/ 채수훈(O’Hair), 메이크업/ 최시노스테파니 리스테파니 리는 자꾸만 난데없이 등장한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에선 김희애와 곽시양이 조심스레 이어질 무렵 나타나 팽팽한 삼각 로맨스를 형성했고, 에선 저 홀로 스파크를 일으키며 주원과 김태희의 사랑에 쿨한 조력자로 나왔다. 이 드라마에서 타이트한 레이스 원피스에 플랫 슈즈, 한쪽 귀에는 블루투스를 장착하고 매끈한 갈지자 워킹을 선보이며 등장한 첫 장면의 대사는 이랬다. “영어로 신씨아요, 신씨아 파-크.” 대기업 종합병원 VIP 고객담당 실장 역에 적합한, 모델로서의 재능과 능력을 십분 살린 영리한 외양 설정이 돋보였다. “연기와 모델 일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게 ‘자기표현’에서 시작해서 귀결된다는 점에 있어서 매우 비슷해요. 모델 일이 생각하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복잡해요. 옷을 입고 런웨이를 걷거나 화보 촬영을 하는 일이 그냥 봤을 때는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배경과 컨셉트에 따라 옷 밑에 있는 제가 순간 순간 바뀌어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됐고, 연기할 때 모델로 활동했던 게 도움이 많이 돼요. 특히 신씨아를 할 땐 더욱 그랬어요. 글래머러스하고 반듯한 자세와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지극히 패셔너블한 캐릭터였거든요. 모델 경험이 없었더라면 신씨아를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꼈을 거예요.”2년 전, 우연한 기회에 드라마 오디션을 보면서 연기를 시작한 스테파니 리는 지금도 여전히 ‘뉴트로지나 걸’로서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면 CF 속 장면을 재연해야 한다. 세 작품이 전부인 출연작 가운데 두 작품에서 영어권 국가에서 살다 온 인물을 연기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태어나 16세에 한국에 온 스테파니는 의외로 한국어 발음이 좋을뿐더러 말도 글도 나무랄 데 없이 구사하는데 말이다. “CF 영향도 있을 테고 미국에서 온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그런 배역이 주어지는 것 같아요. 속상하다는 생각은 안 해요. 앞으로 제가 좋은 배우가 되려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제 모습을 연기하면서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력이 어느 정도 되면 다른 멋진 캐릭터도 맡겨질 거라고 믿어요.”연기와 모델 일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게 ‘자기표현’에서 시작해서 귀결된다는 점에 있어서 매우 비슷해요. 연기할 때 모델로 활동했던 게 도움이 많이 돼요.화보 촬영장에서 스테파니 리는 오늘의 주인공이기보다는 공동 협력자에 가까웠다. 열성적이면서 부담스럽지 않게 새로운 메이크업이나 포즈를 제안하면서 촬영의 흐름을 부드럽게 이끌고 또 따라주었다. 스트레이트한 커뮤니케이션, 애교 따위 필요 없는 눈웃음, 사사로운 디테일은 간과할 줄 아는 시원스러움. 일 잘하는 여자의 전형이었다. TV에서 을 보고서 엄마와 엘리트 모델 에이전시에 무작정 찾아갔고, 타이라 뱅크스 눈에 들어 얼떨결에 모델이 되면서 일찍이 프로페셔널이 된 스테파니 리는 성공하는 유형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조하는 마인드 컨트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비교적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고, 저 혼자 모든 걸 해야 했죠. 그럴 때마다 거울을 보며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다’ 주문을 외우곤 했어요. 이게 정말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데(웃음) 효과가 좋아요. 정말로 조금씩이지만 행복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거든요. 요즘도 종종 힘들 때마다 마법의 주문을 걸어요. 저에게 행복은 그렇게 느리게 조금씩 다가왔고 그게 쌓이고 쌓여 겨우 지금에 다다를 수 있었거든요.” 자신만의 행복론을 들려준 스테파니 리는 눈이 한 일(一) 자가 되도록 한껏 미소 지으며 스튜디오를 떠났다. “막히고 작은 제 눈이 좋아요. 저는 제 눈을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