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 피카디의 1960년대 탐험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빅토리아 앨버트(V&A) 박물관에서는 1960년대 말의 오래된 유산을 기념하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전시 오프닝에 앞서 저스틴 피카디는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은 혁명적인 시대를 직접 경험한 그녀의 유년 시절을 탐험했다. | 빅토리아앨버트,1960,존레넌,믹재거,저스틴피카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메릴본 하이 스트리트(Marylebone High Street)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당시 내가 사는 곳이 스윙잉 런던의 한복판임을, 훗날 불후의 이름을 남긴 시대와 장소의 중심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최신 전시 를 기획한 큐레이터들과 그 시대의 역사를 논하면서 잊고 있던 과거가 마치 아침 햇살처럼 뚜렷하고 본능적이며 밝게 눈앞에 되살아났다. 전시를 기획한 빅토리아 브록스(Victoria Broackes)와 제프리 마시(Geoffrey Marsh)는 한 번 들으면 단순하게 느껴지지만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낸, 혁명적이었던 5년간의 패션, 음악, 급진주의, 시위, 마약과 반문화 사이의 관계를 탐험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전시회 도록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관찰을 남겼다. “1965년도 말, 동성애자라는 것 자체가 범죄였고 낙태가 불법이었다. 교수형이 살인에 대한 처벌 중 하나였고, 여자들은 피임약을 구입하기 위해 불법 결혼을 해야 했다. 이혼은 드물었고 법적으로 인정받기 힘들었으며, 연극 공연은 모두 정부의 검열을 받았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시대였지만 LSD(환각제)는 합법적으로 유통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가 열릴 즈음에는 이 모두가 변해 있었다.”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듯, 나는 운동가이셨던 부모님보다 훨씬 보수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부모님이 기득권층 배경에 반항했듯, 내게는 그들의 아방가르드한 원칙을 거부하는 것이 곧 반항이었다.(부모님은 방과 후 집에 와서 부엌을 정리하는 내 모습을 보고 “부르주아처럼 굴지 말라”며 한숨을 쉬시곤 했다.) 그러나 나는 브록스, 마시(그들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큰 성공을 거둔 전을 기획한 바 있다)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 5년이 패션은 물론 문화 전반에 대한 내 주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깨닫게 됐다. 그리고 예전에는 생각 없이 사신다고 여겼던 부모님의 라이프 스타일(시끌벅적한 파티, 환각제, 혁명적인 정치관)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큐레이터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세대는 낙관적인 이상주의에 촉매 작용을 미치며 모두 함께 사회 전 분야에 자리 잡은 권력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했다.”어머니의 정치적 헌신이 핵무기 반대 운동(어머니는 그린햄 커먼(Greenham Common) 여성평화캠프의 주요 인물이셨다),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통해 표현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때때로 나는 동생 루스(Ruth)와 함께 어머니를 따라갔다. 경찰들이 탄 말을 보고 한동안 조랑말을 갖고 싶어 했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1969년 7월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롤링 스톤스의 무료 공연에 간 적도 있다. 루스와 나는 ‘Jumpin’ Jack Flash’, ‘Sympathy for the Devil’, ‘Street Fighting Man’ 같은 노래를 마치 동요처럼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집에서 음반을 수백 번씩 들었기 때문이다. 믹 재거는 길고 헐렁한 화이트 셔츠를 입었고, 롤링 스톤스의 예전 기타리스트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브라이언 존스를 기리고자 시인 셸리(Shelley)의 엘레지(“평화, 평화! 그는 죽지 않았고 자지 않는다. 그는 삶이라는 꿈에서 깨어났다.”)를 읽으며 수많은 나비를 공중에 날렸다. 한편 공연장의 보안요원으로 온 무서운 헬스 앤젤스(Hells Angels, 오토바이 갱 클럽) 일원은 만자(卍字)가 그려진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순수함과 위협, 이 이상한 조합은 당시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 조합은 롤링스톤스와 비틀스의 음악을 통해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말의 나의 일상(삶이 제안하는 모든 것을 실험했던, 젊고 아방가르드한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난)에서도 드러났다. 불안정한 자유 속에서 사랑하는 동생은 내게 정신적 지주였다.(나는 루스를 책임졌다고 느꼈고, 루스와 모든 것을 나눴다.) 우리가 입은 옷(그중 일부는 어머니가 손수 만드셨던) 또한 앞을 예측하기 힘들었던 삶에서의 안정된 요소였다. 어머니가 쓰시던 재봉틀의 소음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레이트 말보로 스트리트(G r e a t M a r l -borough Street)에 위치한 리버티에 가서 드레스용으로 플라워 프린트 원단을 고르곤 했다. 리버티 건물 바로 뒤는 스윙잉 런던의 심장부였던 카너비 스트리트(Carnaby Street), 사이키델릭 패션을 선보이는 부티크로 가득했다. 근처에는 어머니께서 즐겨 찾으시던 매장이 위치해 있었는데, 장 뮈르(Jean Muir)의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운 디자인을 판매했었다.(짙은 자주색 시프트 드레스와 반항적인 붉은 컬러의 팬츠가 기억난다.) 당시 우리가 입은 옷은 삶의 지표였다. 리젠트 파크(Regent’s Park)에서 열린 여름 피크닉에 맨발로 참석했던 어머니가 입은 면 소재 에메랄드 카프탄, 히피들의 결혼식 참석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나와 동생을 위해 만들어준 작은 은색 종 장식 드레스, 어머니가 우리 아파트를 반짝이는 메탈릭 스프레이 페인트로 장식한 다음 나를 위해 짜주신 실버 루렉스 미니스커트, 집 근처 베이커 스트리트(BakerStreet)에 위치한 비틀스의 매장 애플(Apple)에서 산 오렌지카프탄(거울 조각으로 수가 놓인) 등등….나는 그 오렌지 드레스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었다. 우리가 반복해서 들었던 비틀스의 앨범 노래처럼 내 기억 속에 깊게 남아 있는 옷이다. 당시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TV는 레코드플레이어와 마룻바닥에 줄지어 놓여 있던 LP와 함께 삶의 중심적인 요소였다. 나는 커버의 정교한 팝아트 콜라주를 공부하듯 관찰했고, 안에 포함된 가사를 외울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는 어린 시절 내게 피터팬보다 더 마법 같은 존재였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어두운 런던 하늘에 떠오른 캐릭터는 루시, 만화경 눈을 가진 소녀였다.당시 나는 이 노래는 물론 다양한 곡들의 가사가 마약을 다뤘다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밤늦게까지 춤을 추던 어른들이 살아 있다는 기쁨과 행복에만 취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와 사랑이라는 이상이 1960년대 말에 이르러 흐려지고 헝클어진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중 가장 악명 높은 예가 알타몬트(Altamont),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북부에서 롤링 스톤스가 주 공연자로 나선 무료 음악축제. 믹 재거는 축제를 앞두고 기자회견에서 공연이 “일종의 사회 축소판을 구성해 큰 모임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미국인 모두에게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았다. 하이드 파크에서처럼 헬스 앤젤스 일원이 경비요원으로 왔는데, 그들의 위협은 난동과 폭력으로 확대되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믹재거가 붉은 오렌지색과 블랙 새틴 망토를 걸치고 ‘Under My Thumb’을 부르며 춤을 추던 무대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여덟 살의 소년이 칼에 찔리고 맞아 죽은 사건도 일어났다.다른 곳에서도 스윙잉 1960년대의 황금빛은 방탕, 환멸, 그리고 마약중독의 그늘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롤링 스톤스는 알타몬트에서 신곡 ‘Brown Sugar’로 등장했는데, 키스 리처드는 그 후 이 노래가 헤로인을 주제로 했다고 설명했다.(그는 물론 그 주변 사람들이 이미 헤로인을 복용하고 있었다.) 일명 뷰티풀 피플의 스타일 아이콘이던 탈리사 게티(Talitha Getty)는 1971년 헤로인 과잉 투여로 사망했다. 그 후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이디 세즈윅, 짐 모리슨 등이 마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에서는 애플 부티크가 잦은 들치기 때문에 문을 닫았고, 매장 외벽의 사이키델릭 벽화에는 1969년 말, 비틀스가 해체될 즈음 하얀 페인트가 덧칠되었다. 그해 3월 존 레넌과 오노 요코가 결혼식을 올렸으며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에서 신혼을 보내며 세계 평화를 위한 ‘침대 시위’를 벌였다. 레넌은 “두 명의 천사처럼 침대에 누운 우리 주변에는 꽃이 뿌려져 있었고, 머리 위에 평화와 사랑을 쓰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폴 매카트니와의 불화는 레넌이 오노 요코와 함께 1971년 뉴욕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비틀스 공식 해체와 관련된 법적 논쟁도 계속되었다.(1980년 레넌이 살해될 즈음에야 타협을 봤다.)두 명의 천사처럼침대에 누운 우리 주변에는꽃이 뿌려져 있었고,머리 위에 평화와 사랑을쓰고 있었다.존 레넌되돌아보았을 때 평화와 사랑이라는 이상은 급진적 정치관, 실험적 약물과 이상하게 어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알타몬트의 혼돈과 폭력은 헬스 엔젤스 일원은 물론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 다수가 암페타민, LSD와 레드 와인을 섞은 것에 취해 있었기에 더욱 악화되었다. 존 레넌을 살해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기독교에 깊게 관련되기 전 고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에 마약을 많이 했다는 설이 있다.(채프먼은 레넌을 살해하기 위해 맨해튼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성경, J.D. 샐린저의 소설 , 열 네 시간 길이의 비틀스 노래 테이프, 그리고 권총을 휴대했다.)내 가족의 경우 아버지께서는 수차례의 신경쇠약을 겪으셨고, 부모님께서는 이혼하셨으며, 동생은 너무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얼룩진 햇살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나는 사무실 출근길에 리버티와 카너비 스트리트를 지나친다. 사이키델릭 매장들은 오래전에 문을 닫았지만, 아직도 신세대들의 들뜬 분위기가 느껴진다. 바깥 길거리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열린 창을 통해 사무실 안에 들리면 새삼 내가 나이 들었음을 상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나의 낙관주의가 냉소주의를 압도한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1960년대의 아이다. 희망으로 가득했던 당시의 창조적인 약속은 절대로 바래지 않았다. ※리바이스, 센하이저와 함께 주관한 Rebels 1966-1970>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2017년 2월 26일까지 열린다.(www.vam.ac.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