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관한 산문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비정형의 일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촉수는 우리의 삶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준다. 삶의 곳곳에서 만난 아름다움에 대하여. | 산문,아름다움

꽃모든 사람들에게 ‘꽃은 아름답다’ 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같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도시에서 자란 탓인지 감수성이 없었던 건지 나는 전문적인 플로리스트 수업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꽃을 좋아하지 않았고 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만드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난 꽃을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할 때마다 사람들은 마치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인 양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한때 내가 정말 틀렸다고 생각해서 꽃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고민을 했다. 이젠 나에게 꽃은 조형적 재료다. 이 재료를 잘 조립하여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꽃을 만진다. 인위적으로 키워낸 자연의 꽃을 다시 생명력 있게 재조합하고, 그 과정에서 형태와 색채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여러 가지 꽃들의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반복한다.나의 지향점은 주어진 재료로 자연의 한 장면을 칼로 잘라낸 듯한 장면을 구현하는 것이다. 자연의 것만큼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려 하지만, 자연에 대한 도전은 무의미하고 한낱 플로리스트인 나는 매번 질 수밖에 없어서 여전히 꽃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엔, 고민을 거쳐 만들어낸 꽃도 허무하게도 시들고 만다. 이 얼마나 어렵고 섬세하고 까다로운, 신기루 같은 완벽한 존재인가. 꽃이 시들어버릴 것을 알아도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꽃을 전하고 테이블 위에 꽃을 꽂아둔다. 꽃은 사라지지만 꽃의 아름다움은 꿈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김영신(플로리스트)사람의 손이 닿은 거리일본의 도시들은 정돈된 뒷골목을 품고 있다. 그 묘하게 나른한 아름다움은 오전부터 조용히 움직이는 주부, 페인트공, 정원사와 집주인에 의해 유지된다. 아침이면 조그마한 자신의 가게 앞에, 밤새 들여놓았던 화분들을 꺼내 물을 주는 노인과 아직 인적이 드문 아케이드를 쓸어내는 아낙. 손바닥만 한 빈 터에 알뜰히 심어놓은 데이지. 다닥다닥 담장을 잇댄 작은 주택들은 저마다 모양이 조금씩 다르고, 낡은 주택의 널빤지 차양은 중간 중간 새것으로 교체된 흔적이 보인다. 새로 바꾼 판재의 밝은 갈색과 오래된 판재의 깊은 검은 빛이 경쾌한 리듬감을 선사한다.사람이 오래도록 시간과 정성을 쏟은 것들은 아름답기 마련이다. 그것은 정치가의 신년 플랜이나 거대 기업의 설계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작은 땅, 내 작은 가게에 대한 애착이 만들어낸 기품 있는 풍경. 단숨에 모조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색채의 퍼즐이다. 내년에 땅 값이 더 오른다면 이 골목을 헐어버리겠다거나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떠나겠다는 계산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퇴근하면 늘 마시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모퉁이의 가게가, 오후 다섯 시에 문을 열 뿐이다. 초로의 주인이 수십 년 된 나무 테이블을 행주로 훔치는 오후가 지나면.“많은 도시가 여전히 배우고 있는 것처럼, 과거를 싹 쓸어 없애버리는 일은 단순히 희귀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 세계에서 앗아가는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제거 과정에서 사람들을 함께 엮어주던 갖가지 기억, 이야기, 관계도 없애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장소를 천박하고 단순한 장소로 바꿔놓다 보면, 그로 인해 문화적으로 더 취약해진 인구가, 즉 뿌리 뽑힌 대중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이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가느다란 실이라고는 누군가가 위에서 부여해주는 이데올로기가 유일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과거에 이와 유사하게 대대적인 파괴를 자행한 공산주의정권들도 잘 이해한 바 있다.” 엘러스테어 보네트는 에서 이렇게 썼다.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헛간을 지을 때도, 그게 아름답기를 바란다면 공들여 짓고, 신중히 부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공들여서 가꾸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원칙이 모두 작동해야 도시는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혹은 역으로, 아름다운 도시를 가진 문명과 국가는 ‘공들여 짓고’ ‘공들여 가꾸고’ ‘신중히 부술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풍경에 공들이는 신중한 사람들이, 인간과 이웃에게 인색하거나 경솔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거리는, 그 사회가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사실의 강력한 증거일 것이다. 유호진(PD)프레츨세상에는 프레츨 말고도 미각을 현혹할 만한 음식이 너무나 많다. 프레츨은 풍미로는 마카롱에 밀리고 가볍게 집어먹기에는 팝콘을 당해낼 수 없다. 설탕이나 초콜릿이 듬뿍 발린 도넛처럼 세상의 온갖 시름을 잊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한 끼 식사 대용으로도 크루아상이나 베이글이 더 안정적이다. 게다가 전직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재임 시절 과자 형태의 프레츨을 먹다가 질식할 뻔한 사고를 겪은 적도 있다. 이쯤 되면 프레츨의 입지가 좁아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프레츨은 되려 이 지점에서 강력한 지위를 갖는다. 접시 위에 올려진 프레츨이 만만한 상대로 보이지 않는 건 맛도 경제성도 아닌 고유의 형태 때문이다.그날 처음 통성명을 한 사람에게서 프레츨 ‘한 덩이’를 대접 받았을 때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기억한다. 매듭처럼 꼬인 3개의 고리는 마치 풀어내야 할 문제처럼 보인다. 정중하게 포크를 사용하기에도, 그렇다고 손으로 집어 뜯어 먹기에도 모호하다. 주저하다가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만다. 프레츨의 형태는 ‘무한’을 상징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스스로 완결성을 갖는다. 어쩌면 프레츨은 접시 위보다 벽에 걸리는 게 더 어울리는 음식일지도 모른다. 이는 브랜드의 로고와 유사한 부분이다. 로고는 형태와 의미를 함축하는 또 하나의 언어이며 그 언어엔 영원을 향한 염원이 깃든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삼각별이나 샤넬의 CC 로고에서 우리는 그러한 종교적 속성을 읽을 수 있다. 프레츨의 탄생을 독일의 어느 주방에서 일어난 우연이라 믿을 수 없는 이유다. 기독교 삼위일체의 상징이라거나 기도하는 손의 모양이라는 탄생 비화는 프레츨의 완전한 형태에 힘을 싣는다.파스타 역시 완벽하고도 다양한 형태로 프레츨에 견줄 수 있지만 온갖 소스로 원형을 훼손한다. 프레츨은 그렇지 않다. 기껏해야 소금이나 아몬드를 뿌리는 정도다. 프레츨 위 소금은 정성을 다해 올린 가니시와 다르게 어떠한 통제도 없어 보인다. 태연한 듯 보이지만 자기 소신을 지키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힘. 프레츨의 아름다움은 거기에 있다. 박은성( 에디터)남산 산책로 도시의 하루를 담은 영화들이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시리즈나 우디 앨런의 , 오다기리 조가 나오는 ,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나 야네스 바르다의 , 게오르기 다넬리아의 모스필름 , 이만희의 등 시대와 장소를 바꿔가며 다양한 도시의 단면을 잡아내는 영화들은 꾸준히 시도되었다. 그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은 하루 종일 도시를 걸어 다니고, 배우들 너머로는 다큐멘터리처럼 생동감을 지닌 공간들이 보인다. 세월이 지난 후에 만난 관객이라 하더라도 그 영화들을 본다면 영화 속 도시의 인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나 또한 그 영화들처럼 하루 안에 펼쳐지는 도시의 단면을 묘사하고 싶었다. 라는 내 영화는 단 하루라는 시간 동안 두 개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았다. 요즘 서촌으로 불리는 경복궁 등지의 골목길과 남산 산책로가 주요 배경지로 나온다. 배우들은 그 두 장소에서만 등장하며 사건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나의 공간들은 생동감이 비껴간 공간이다. 바쁜 도시와 다른 흐름이 존재하는 공간들, 한낮의 시간에는 아이와 노인뿐인 주택가 골목과 사색과 산책을 위한 숲 사이에 난 길 위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조깅과 경보와 느린 산책이 이어지는 곳, 시력을 잃은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숲을 느끼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 계절의 변화가 가장 먼저 찾아오고 휴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길고 긴 남산길, 도시를 가장 쉽게 떠날 수 있는 도시의 곁에 카메라를 놓았다.내 영화의 중요한 로케이션지인 남산 산책로를 아름답게 찍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객의 낯선 시선으로, 때로는 미화된 프레임으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게 공간들의 모습을 재구성해보려 했다. 관객의 눈에는 일상적인 길이 아름다움을 지나 비일상적인 도시의 틈으로 변화할 수 있기를, 그 길들이 결국에 낭만성을 가지기를 바랐다. 영화는 때로 실제의 공간에 가상의 역사를 만들어준다. 나 또한 ‘분주한 도시의 곁에서 조용히 흐르는 이 길들에 또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길 위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도시의 새로운 설계자가 된 듯 만들어진 기억으로 길의 인상을 덧대어보는 일이다. 이미 우리 옆에 있었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를, 그 장소에서 배우들이 걷고 연기하는 그 순간에 가졌던 바람이다. 김종관(영화감독)미완성의 작품 미완성은 때때로 완성이라는 말보다 더 아름답고, 더 섬세하며, 더 가능성 있는 말처럼 들린다. 특히 미완성된 하나의 그림이, 때론 그 어떤 유명한 마스터피스보다 더욱 아름답고 섬세하게 보일 때가 있다. 캔버스 위를 듬성듬성 메운 붓 터치 사이로 드문드문 존재를 드러내는 연필 스케치 자국, 주인공의 얼굴과 손이 완성되지 못해 마치 얼굴 없는 유령 같은 자태로 남아 있는 고전적인 초상화, 캔버스의 아이보리 직물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빈 여백처럼, 미완성의 흔적은 분명 그림 속의 어떤 ‘빈틈’처럼 보인다. 그런데 때로는 그 빈틈이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게 하는 이상한 힘을 가지기도 한다. 마침표로 끝맺지 못한 말들이 더 큰 여운을 남기기도 하듯, 창작자가 완성하지 못해 생겨버린 빈틈을 더 많은 생각과 감상, 상념으로 채우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 된다.많은 이유로 미술가들은 ‘미완성’의 작품을 남겨왔다. 특히 먼 옛날에는 이랬을 것이다. 패트런이 자신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결국 주문을 취소해서, 모델이 갑작스럽게 사망해서, 화가가 슬럼프에 빠져 더 이상 붓을 들 수가 없어서, 혹은 아무 이유 없이도.... 일례로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1800)은 미술사 속의 유명한 미완성작이다.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레카미에 부인은 자신의 초상화를 다른 화가에게 맡겨버렸다. 때문에 그 그림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모습 그대로 남아버렸다. 하지만 그리다 만 상태로서 여전히 캔버스 배경을 덮고 있는 연갈색의 잔잔한 붓 터치들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다른 매끈한 완성작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극도의 섬세함을 보여준다고 평가 받는다. 미완성의 그림. 결코 끝나지 않는, 영속적인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장승연( 편집장)롱 원피스,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룩내가 만약 다른 시대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면, 20세기 초반 유럽의 여인이고 싶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적인 시대 상황에서도 하늘거리는 롱 원피스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우아한 모자로 머리를 감싼 패션 스타일이 너무나 고혹적이라는 감각적인 인상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왕좌를 포기했던 에드워드 8세의 로맨스와 스캔들을 다룬 영화 (마돈나가 감독했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 받는 신예 알리시아 비칸데르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을 안겨준 영화인 ,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젊은 날의 기억을 담은 베라 브리튼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 그리고 요즘 몰입하고 있는 영국의 시대 드라마 에 이르기까지. 영화 스토리보다 더 명료하게 잔상으로 남는 것은 여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스타일과 룩이다.신분계급의 붕괴, 근대화로 넘어가는 그 시대의 격정적인 변화와 암울함 속에서도 세련된 품위와 적절한 화려함을 보여주었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스타일은 오늘날의 것보다 더 모던하고 우월한 느낌을 준다. 그중에서도 절제된 듯 섬세한 디테일이 우아한 롱 원피스는 코르셋으로부터의 해방이 주는 자유로움과 진보성을 내포한다. 묵직한 코트와 딱딱한 재킷 안에서도 치마 결이 살랑거리는 롱 원피스는 여성스러움을 감출 수 없게 하며, 숨기고 싶은 울퉁불퉁한 무릎을 덮고 내려와 가녀린 발목만을 살짝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자극적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란 본원적인 것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동시에 진부하지 않은 적절한 긴장감을 동반해야만 한다. 내게 롱 원피스는 그런 아름다움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박정애(‘라니앤컴퍼니’ 대표)선인장사실 나는 아름다운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나는 미에 대한 기준이 뚜렷하다. 보통 그걸 미감이라 부른다. 하지만 내 미감은 대개의 취향을 포섭할 만한 아름다움을 거의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나의 미감이란 그저 내가 강박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다 더한 수를 나이로 나눈 값에 지나지 않는다. 맞다. 그건 엄밀히 말해 미감이라 불러선 안 되는 것이며, 심지어 해가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감이 떨어지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름다운 걸 사랑하는 건 모든 동물이 다 하는 것이지만 아름답지 않은 걸 사랑할 수 있는 건 사람뿐이다. 아름답지 않은 걸 사랑하는 일은 인간을 사람답게 만드는 중요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것을 꼽아달라는 요청에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있는 게 어쩌구저쩌구라는 답을 하는 건 이 요청에 답을 보내온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례한 짓이다. 그래서 고민해봤는데, 나는 선인장이 아름답다고 결정을 내렸다.꼭 한 해 전에 처음 선인장을 샀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첫눈에 반해서 샀다. 굉장히 크고 화려하고 예뻤다. 선인장은 세 달 만에 죽었다. 과습 때문이었다. 물을 너무 많이 주었다. 살리려고 흙을 파서 말려보고 꽃집에도 가져가보았지만 허사였다. 선인장은 완전히 회생 불가라는 판정을 받기 전까지 거실 그 자리에 사흘 동안 있었다. 내 집 안에서 생명이 꺼져가는 걸 며칠간 지켜보면서 나는 굉장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끼고 사랑한답시고 익사시킨 것이다. 선인장이 죽어가던 모습을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나는 곧바로 다른 선인장을 샀다. 그리고 이번에는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이따금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선인장을 곁눈질로 보며 그 곧고 한결같은 생명력에 내심 경탄했다.두어 달 전, 선인장이 하얗게 변해버린 걸 발견했다. 언제부터 그랬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전의 선인장이 떠올라서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반나절 동안은 빨리 포기해버리고 저번처럼 죽어가는 걸 지켜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관심을 쏟아도 안 되고 너무 관심을 쏟지 않아도 안 된다니 나는 남은 평생 이런 걸 기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 나머지 반나절 동안 마음을 고쳐먹었다. 열심히 수소문했다. 깍지벌레라는 병충해였다. 농약을 사서 일주일에 세 번씩 뿌리고 칫솔로 부지런히 닦아냈다. 병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손에 가시가 박힌 상처들이 아물고 다시 다치기를 두 번 정도 반복했다. 지난 주말 아침에 일어나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녹색의 윤기를 되찾은 선인장이 햇볕을 받는 순간 꿈틀거리는 걸 본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살면서 본 광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나는 아름다움에 관한 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확신할 순 없다. 세상일이란 너무 다가가서도,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서도 안 되는 모양이다. 허지웅(작가)딸기를 자르는 일최근 몇 년간 본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이었다. 노란색 표지의 이 두꺼운 책은 4만원이라는 섬뜩한 가격을 달고 있었지만, 나는 책을 폈고, 페이지를 가득 채운 흑백 사진과 넉넉한 여백의 조판 디자인을 보았고, 결국 망설임 없이 책을 구입했다. 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책의 마지막인 5백94페이지에 나온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건물과 도시, 자연과 언어를 이루는 수많은 패턴과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난 뒤, 돌연 일상으로 귀환한다. 그는 말한다. “나의 삶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가장 평범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덴마크에서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친구는 차와 함께 딸기를 먹자고 하면서 딸기를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저몄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알렉산더는 왜 그렇게 자르냐고 물었다. 그녀는 말했다. “딸기를 먹을 때 그 맛은 입에 닿는 딸기의 표면에서 나와. 그래서 표면이 넓을수록 맛도 더 좋아. 내가 딸기를 얇게 저미는 것은 그 표면을 넓히려고 그러는 거야.”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은 이룰 수 없는 욕망을 동반한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이 싫다. 아름다움은 사람을 가난하게 만든다. 그러나 딸기를 자르는 일과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이걸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언제나 아름답고 싶다. 내가 그 순간을 겪지 않아도 좋다. 누군가, 어디선가 딸기를 자르는 일과 같은 경험을 한다면 그 경험을 글로 남겨달라. 나는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정지돈(소설가)진주나의 첫 진주는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다. 엄마가 외출한 틈을 타 얼굴에 빨간 립스틱과 보라색 아이섀도를 발랐다. 그리고 엄마의 홈스펀 재킷과 기계주름 스커트를 걸치고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는 코르크 웨지 힐과 GG 로고의 구찌 백을 마무리로 당시 황신혜가 ‘선전’하던 태평양 ‘나그랑’ CF의 한 장면을 따라 해보곤 했다. 나의 두 번째 진주는 대학 때다. 당시 아르마니와 베르사체 수트가 유행이었지만 평범한 대학생에게는 사치품일 뿐이었다. 보다 저렴한 국내 브랜드 블랙 수트에 엄마가 사준 진주 목걸이를 둘렀다. 허세 가득한 스무 살은 은은하게 광택 나는 울룩불룩 못난이 천연진주 목걸이로 어깨가 으쓱해졌고 외출은 무척 즐거웠다. 나의 세 번째 진주는 캐롤린 베셋 케네디의 진주 귀고리이다. 1999년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추락사한 그녀는 캘빈 클라인의 홍보로 일하다 존 F. 케네디 주니어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모던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나는 당시 그녀를 롤모델로 추종했는데 깔끔하게 빗어 묶은 머리와 아주 심플한 룩에 매치한 콩알만 한 진주 귀고리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작은 귀고리는 블링블링한 펜던트 목걸이나 반짝이는 몇 캐럿 다이아몬드의 브로치와 견주어도 큰 힘을 발휘하는 작은 소품이었다.진주는 다이아몬드 세공법이 생기기 전까지 최고의 보석이었다. 오죽하면 코코 샤넬이 인조 진주를 잔뜩 매단 목걸이를 만들며 “모든 여자는 아름다워질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했겠는가. 진주는 한 소녀가 비로소 여자가 되고 싶다는 표현의 매개체이자 욕망의 수단이다. 나 역시 진주를 찬양하는 한 여자일 뿐이고. 서정은(스타일리스트)검은 고양이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 방어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불륜이 그렇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불륜도 있다. 그러나 섣불리 말해선 안 된다. 의심받기 딱 좋다. 또 하나 예를 들면, 굽이 철사처럼 가는 하이힐이 있다. 발목이 가는 여자가 신고 다니면 아름다움이 비처럼 떨어진다. 그러나 이것도 섣불리 말해선 안 된다. 여성 인권에 둔감한 사람이 되거나, 혹시라도 여자친구가 하이힐을 신고 나오면 금세 지팡이 신세가 된다. 그리고 검은 고양이가 있다.한국에서 애묘인의 수가 애견인의 수를 넘어섰다지만 검은 고양이는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에 더 가깝다. 에드거 앨런 포의 역할이 지대했다. 벽지 속에서 울고 있는 검은 고양이, 꼬리를 바짝 세운 채 지붕 위를 도둑처럼 걷는 검은 고양이, 생쥐를 입에 문 채 피를 뚝뚝 흘리는 검은 고양이. 검은 고양이에 대한 묘사는 글을 늘 공포나 스릴러 장르로 끌고 간다. 검은 고양이가 등장하는 로맨스 소설은 없다. 치정을 다루었다면 모를까. 검은 고양이는 앞으로도 대중적으로 사랑 받지 못할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고양이는 아름답다.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무언가를 응시하는 검은 고양이는 달빛을 등에 진 밤의 파수꾼이다. 검은 고양이는 모두가 잠든 시각, 초록빛 혹은 노란빛의 눈동자로 몸을 들키지 않고 밤의 진실을 지켜보는 유일한 생존자다. 길게 입을 벌려 하품하며 어둠을 집어삼키는 아침의 전령이다.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야 하는 시대에, 드러난 아름다움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아름다움만이 찬양 받는 시대에, 검은 고양이는 여전히 미지의 존재로 남은 채 유일하게 우리의 주위를 배회하는 신비로움이다. 밤에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낮에는 여느 고양이들처럼 제 몸을 핥고 하릴없이 이곳저곳 어슬렁거리는, 털을 기계처럼 뽑아대는 귀여운 네 발 짐승이다. 그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내 옆에서 그르렁거리고 있다. 김기창(소설가)화이트 턱시도 셔츠흰색은 모든 사물을 정화하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때로는 축구선수 메시의 골을 덤덤히 어시스트하는 이니에스타처럼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컬러를 돋보이게 하고 흰색을 만드는 재료의 형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많은 세상의 아름다움은 저마다의 화려함으로 조화와 균형의 중심이 되고자 하지만 결코 흰색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자 하지 않는다. 셔츠라는 아이템 또한 그렇다. 화려한 타이와 잘 재단된 수트, 혹은 질 좋은 니트와 함께 더 풍성한 매력을 발휘한다.이쯤 되면 아름다움의 기초적 가치인 조화와 균형의 조력자로서의 화이트 셔츠에 대한 예찬은 충분해 보인다. 적어도 예전엔 그랬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고 이제 화이트 턱시도 셔츠를 입는다는 것은 학생 시절 시험을 끝내고 오락실에서 맞이하는 일탈의 순간처럼 작은 흥분을 만든다. 턱시도가 의미하는 포멀한 순간에 대한 기대감은 이 화이트 턱시도 셔츠를 일상에서 입을 때도 그대로 유지된다. 안쪽으로 곱게 접힌 턱에 새겨진 스티치와 흰색의 오브제가 갖는 조형감은 그 안에서도 다양한 질감을 경험하게 한다. 또한 셔츠 소매의 더블 커프스를 무심하고도 치밀하게 접어 올린 턱시도 셔츠는 조력자로서의 모습이 아닌 근본적인 휴머니즘적 발톱을 드러내기도 한다. 조연과 주연이라는 두 가지 양면성을 지닌 화이트 턱시도 셔츠는 낮과 밤이 교차하는 그 시간의 하늘처럼 아름답다. 한상혁(패션 디자이너)중학생인간의 성장이란 참 이상하다. 그저 사랑 받고 싶고, 기쁘고 싶고, 즐겁고 싶을 뿐이던 어린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호르몬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심각하고 우울하고 우스꽝스러운 인간이 되어버린다. 중학생 시절이란 그렇게 갑자기 성장하게 되어버린 웃기고 슬픈 나날들이다. (불행하게도) 두뇌가 발달해버리는 바람에, 내가 ‘나’라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가는 그 시절, 내가 ‘나’라서 자꾸 겪게 되는 그 무수한 시행착오들. 중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누구든 당장 땅속 깊숙이 머리를 박고 싶어지리라.그 육체는 또 얼마나 불안한지. 갑자기 자라난 신체의 일부가 나머지 부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비례가 망가지고, 어쩐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인 것이 중학생이다. 붉게 여드름이 오른 얼굴, 혼자 길어져버린 팔, 그에 비해 여전히 좁고 작은 어깨와 가슴, 항상 긴장되어 있으며, 공격적인 어조의 목소리 따위가 서로 무지막지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이 중학생의 신체인 것이다. 게다가 중학교 졸업 앨범을 펼치면 그것이 나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못생겼으며,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양의 안경을 쓰고 있는 나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있다.나에게 중학생 시절이란 처음으로 내가 이렇게나 추악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끊임없이 나를 증오하게 되는 시간이었고, 비대해진 자의식으로 인해, 자신의 내면이 이토록이나 기괴한 모습을 이루어버렸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시간이었으며, 스스로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욕망의 낙차가 만들어내는 괴로움에 시달려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 모든 미숙함과 흉함과 어리석음의 시간들. 그리하여 점차 중학생은 인간이 되어간다. 자신이 이토록이나 흉하고 사악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라는 것을 폭발시키며. 그렇게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미숙하고 어린 시절을 통과하며 인간이 되어가는 이 과정이 나에게는 아주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황인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