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미스터리의 시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두 명의 작가가 두 곳의 전문 서점을 탐문했다. 추리소설 전문 서점 미스터리 유니온과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보낸 시간. | 미스터리유니온,위트앤시니컬,서점

미스터리 책방이 등장했다얼마 전 이대 뒷골목 어딘가에 미스터리 소설만 취급하는 전문 서점이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던 차에 이곳을 방문해달라는 의 청탁이 들어왔다. “정식으로 취재 요청을 드리고 가는 게 좋을까요?” “미스터리 서점이니까 탐정처럼 슬쩍 탐문하는 건 어때요?” 에디터와 수군수군 공모를 하다가 그날 당장 찾아가버린 이 서점의 이름은 ‘미스터리 유니온’이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좋은 냄새가 났다. 비가 왔다 그쳤다 하는 날이어서 책 냄새와 나무 냄새가 더욱 진했다. 추리소설로 가득한 공간 군데 군데에 놓인 작은 초상화들이 눈에 띄었다. 뛰어난 추리 실력과 빼어난 개성으로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소설 속 주인공들의 초상화였다. 그 어떤 실존 인물보다 생생한 존재감을 가진 인물들의 모습을 잠시 들여다봤다.천천히 서가를 훑었다. 곧바로 훌륭한 컬렉션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큰 출판사의 책과 작은 출판사의 책, 오래된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 해외 소설과 국내 소설, 구판과 신판이 다 있었다. 웬만한 추리소설은 다 읽은 미스터리 팬일수록 가봐야 하는 곳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역을 부지런히 파고든 사람이라도 놓친 영역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 빈 구석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독서 경험은 훨씬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곳을 둘러본 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출간됐는지도 몰랐던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발견했다.진열장 한가운데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스터리 작가인 조세핀 테이의 책이 놓여 있었다. 다른 손님이 자리를 뜨길 기다렸다가 사장님께 상의를 드렸다. “이 작가를 좋아해서 국내에 소개된 책은 다 읽었는데, 비슷한 분위기의 작가나 책을 추천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윽한 분위기의 사장님은 무척이나 신중하게 고민하셨다. 누군가가 추천을 부탁하면 마구 신이 나는 사람이 있고 한없이 신중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은 후자이신 듯했다. “도로시 세이어스가 어떨까요?” 도로시 세이어스라면 피터 웜지 시리즈를 읽은 적이 있었다. 1977년 초판이 발행된 도로시 세이어스의 를 추천해주셔서 흔쾌히 구매하기로 했다. “를 재밌게 읽었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의 책을 더 읽는다면 이 좋을까요, 이 좋을까요?” 사장님께서는 다시 깊은 고민에 빠지셨다. 번거롭게 해드리려는 건 아니었지만 전문 서점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조언인지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후자의 책을 샀다. 개인적으로 미스터리 월드의 시작점이 되어줄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면 조세핀 테이의 이다. 내가 읽어본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리소설이었다.이번에 산 책들을 다 읽으면 그곳에 또 갈 것이다. 수사관이 쓸 법한 작은 수첩에 회원 등록을 하고 왔다. 컴퓨터가 아니라 수첩이라니, 역시나 매력적이었다. 서울의 골목골목에 작고 멋진 서점들이 별처럼 흩뿌려지기를 원한다. 그중에 하나, 미스터리 유니온이 그 자리에 오래오래 머물기를. 글/ 정세랑(소설가)21세기의 마리서사광복 직후, 박인환 시인은 종로3가에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이름의 서점을 차린다. 20평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제법 큰 서점이었다. 마리서사는 동료 문인들에게 특히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신간뿐 아니라 일본에서 들여온 세계 여러 문인들의 시집과 소설집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새로운 것에 목마른 문인들이 좋아했을 것이다. 박인환이 서점을 낸 가장 큰 이유는 이렇다.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마도 그는 폴 발레리, 기욤 아폴리네르, 장 콕토 등의 예술인들이 한데 모였던 파리의 아드리엔 서점처럼, 서울에도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김수영의 수필 ‘마리서사’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올해, 시를 쓰는 나에게도 마리서사와 같은 공간이 생겼다. 유희경 시인이 운영하는 ‘위트 앤 시니컬’. 마리서사가 문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공간이었다면, 위트 앤 시니컬은 독자들에게 더욱 열려 있는 공간이다. 시집만 있는 서점, 시집만 있어서 시의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서점, 시를 몰라도 시심에 젖어서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위트 앤 시니컬이다. 한 달에 적게는 두 번, 많게는 네 번까지 열리는 낭독회는 매번 인산인해를 이룬다. 시를 마음에 담으려고 이 자리를 찾은 이들은 늘 뭔가를 가득 안고 돌아간다. 보이지 않지만, 내일을 좀 더 잘 살게 도와줄 불씨 한 점이나 얼음 한 조각을.나는 목마를 때마다 늘 위트 앤 시니컬을 찾는다. 생리적인 목마름은 물을 마시면 해결할 수 있지만 영혼의 목마름, 머리와 가슴의 목마름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처음 이 공간을 방문했을 때, 나는 심신의 갈증이 확 달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말에 산책을 하고 싶을 때, 온종일 열심히 일하고 기진맥진해졌을 때, 밀린 원고를 마감하고 잠깐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어느새 위트 앤 시니컬에 와 있었다. 여기는 내 삶에 틈을 내는 시간이자 시와 음악에 취하고 싶어 찾는 공간, 그리하여 나를 좀 더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시공간인 셈이다. 위트 앤 시니컬에 다녀온 날에는 매번 힘을 쓰면서 힘을 얻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위트 앤 시니컬에 가면 약속도 안 했는데 운 좋게 동료 문인들을 만나기도 한다. 시인 허연 형은 재밌게도 ‘21세기의 마리서사’에서 박인환 시집을 읽고 있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자신의 시집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 시인도 있었다. 어떤 독자가 자신의 시집을 사 갈지 상상하며, 책에 서명을 하는 시인도 있었다. 위트 앤 시니컬에서 시집을 산 후, 한 공간에 있는 카페 파스텔에서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그 시집을 읽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항상 생기가 돌았다. 위트 앤 시니컬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명사(Wit)와 형용사(Cynical)는 성분이 달라 ‘and’로 연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이 공간의 사랑스러운 부분이다. 우리는 문법을 비롯한 각종 규칙과 법을 지키고 살아야 겨우 평균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은가. 도처에 있는 고리타분한 규율을 깨뜨리고 일상의 빤한 패턴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공간. 나는 지금도 거기에 가는 길이다. 글/ 오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