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마음에 대하여
지겨움과 경이로움 사이, 영화 ‘유레카’와 ‘레오파드’, 왕빙의 영화들로 거슬러 올라간 어느 관객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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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이이이다란 인생 영화들
세 시간, 네 시간, 혹은 그보다 오래. 기나긴 영화에 꼼짝없이 붙잡혀 견뎌낸 시간들에 대하여.
<레오파드>
1
」“잠깐.”
막 상영관의 불이 꺼지려던 참이었다. 영화표를 유심히 보던 J가 다급히 속삭였다.
“영화, 3시간 37분이라는데?”
우리는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2000년도 작 <유레카>를 보러 극장에 왔다. 그때 나는 영화 끝나고 뭐 먹지, 하며 스마트폰으로 근처 맛집 정보를 뒤지고 있었다. 3시간 37분이라고? 저녁 먹긴 글렀네. 애플워치를 극장 모드로 바꾸는 척 곁눈질 하는데, J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말했다.
“2시간 정도 될 거라며.”
혼란, 두려움, 약간의 분노와 원망, 흔들리는 눈동자. 어떡한담?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해본다. 이상하다, 아니 왜 이렇게 긴 거야? 영화는 원래 두 시간이어야 하잖아. 그건 법칙이라고.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유레카>가 원래 길다. 어쩐지. 그래서 볼까 말까 망설였던 거였네. 와, 어쩜 예매하던 그때 마침 딱 까먹었지? 하지만 꼭 봐야 하는 영화인걸. 결국 우린 이 영화를 보게 됐을 거야. 러닝타임이 어떻든…. (그리고 당신 5시간 28분짜리 영화 본 적도 있잖아) (그건 다르다고?) (인터미션 10분이 있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영화는 제시간에 시작했고, 끊어지고 부딪혀 흐려지는 말줄임표처럼 우리의 대화도 극장의 어둠 속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내가 또 긴 영화를 예매했다. 드문 일이지만, 없던 일은 아니다. 지난달만 해도 그랬다. 이 극장 바로 옆옆 블록에 위치한 정동길 서울아트시네마에서였다. <레오파드>를 봤는데, 두 시간 정도 되겠지 했던 영화는 끝나고 보니 3시간 6분짜리였다. 뭐 그 정도면 길다고 불평하기엔 좀 애매한 러닝타임 아닌가? 그러나 정말로 긴 것은 영화 자체가 아니었다. 그 유명한 무도회 시퀀스였다.
<레오파드>
2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1963년 작 <레오파드>는 이탈리아가 통일 전쟁으로 혼돈에 빠져 있던 19세기 후반, 시칠리아의 귀족 가문을 배경으로 몰락하는 시간을 담은 영화다. 살리나 공작. 그는 저물어가는 중이다. 세상은 그를 보내고 신념과 전통보다는 욕망과 기회를 좇는 젊은 탄크레디와 부와 미모를 가진 자유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영혼 안젤리카를 주인공으로 맞이할 준비를 한다. 무도회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시대는 이곳에서 교체된다.
늙은 공주의 무도회가 시작된다. 높은 천장의 실내, 묵직한 카펫이 깔린 바닥, 샹들리에와 촛불, 은식기와 화병의 꽃, 마차를 타고 온 사람들. 그들은 비단 장갑을 꼈거나 보타이를 맸다. 무도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 중엔 시칠리아의 진짜 귀족들도 있다. 알랭 들롱과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있다. 할리우드 서부극의 스타였던 버트 랭커스터가 있다. 관객석에 앉은 우리는 동전처럼 눈을 빛내며 그 장면에 빠져든다. 그들은 왈츠며 마주르카를 춘다. 사람들은 어쩌다 춤을 발명했을까? 똑같은 음악에 맞춰 똑같은 몸짓을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느껴진다. 뷔페는 만원 지하철 같다. 고귀한 이들이 앞다퉈 음식을 담는다. 테라스 테이블에선 지루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취한 이들이 하나둘 엎어진다. 사람들이 떠난 무도회장 바닥엔 쓰레기들이 굴러다닌다. 금과 흰 대리석으로 장식한 화장실은 나팔 모양의 높고 긴 요강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것들은 모두 가득 차 있고 저들은 땀을 흘린다. 드레스며 턱시도 아래로 끊임없이 땀을 흘리고 있다. 사람들의 숨과 냄새와 열기를 품은 무도회장의 공기. 그 축축하고 묵직한 감각이 스크린을 넘어 극장에까지 전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쪽 문으로 퇴장한 줄 알았던 살리나 공작이 저쪽 복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수백 년조차 몇 분으로 압축하는 편집의 마법은 여기에서 적용되지 않는 것만 같다. 이 무도회는 몇 시간째 지속되고 있는가. 지친 사람들은 왜 아무도 집에 가지 않는가. 살리나 공작은 역사의 뒤안길로 대체 언제 사라질 참인가. 이 시대는 언제 끝나는가!
끝날 듯 끝날 듯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무도회에 경악하다가 깨닫는다. 그것은 사라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극장의 스크린에 유령처럼 들러붙어 서성이거나 머뭇거릴 것이다. 그리고 이곳을 찾은 나는 지금 유령의 자발적인 시종이다. 입도 떼지 못하고, 꼼짝달싹 못 한 채, 가끔 발끝이나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주인들의 무도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유레카>
3
」“무도회, 한 시간이었던 거 알아?”
그때 극장을 나오며 J가 말했다. 한 시간? 어쩐지. 지겹다, 지겨워. 그래도 멋졌지. 아, 정말로 아름다웠지. 간신히 탈출한 주제에 과거 따위 단숨에 잊고 이런 대화를 나눈다. 같이 영화를 본 모르는 사람들도 점점이 흩어져 각자의 봄밤 속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모두 방금 겪은 아리송한 시간들을 곱씹는 중이다. 지겨워 죽겠는 영화. 영원히 보고 싶던 시간들. 나는 백 번쯤 했을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기로 한다. “이런 긴 영화는 이제 힘들다. 그런데 내가 왕빙 영화를 처음 봤던 때 말이야, 그때는 심지어 겨울이었거든.”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4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그저 제목에 이끌려 3시간 47분짜리 영화를 예매한 적 있다. 2015년 2월이었다.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본 적은 있어도 두 편 길이의 한 편을 본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3월이면 당시 위치했던 낙원상가 허리우드극장을 떠날 예정이었고, 나는 이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한 편을 관람한다면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이 작품을 골랐다.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13). 중국 윈난성 자오퉁시 소재의 한 정신병원을 찍은 다큐멘터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킹덤> 같은 걸 상상했던 것 같다. 영화는 못 보고 영화 잡지만 읽던 어린 시절, 나는 잡지에서 발견한 <킹덤>이란 영화에 오랜 세월 사로잡혀 있었다. 1997년, 세기말의 심야 상영 영화. 미쳐버린 의사들, 유리병에 담긴 인간의 표본, 저주받은 태아. 이런 말들 사이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건 이 이미지들이 4시간 39분간 지속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러닝타임이 이토록 긴 영화를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드라마는 한 시간이고 영화는 두 시간이다. 그것이 규격이다. 4시간이 넘는다고? 그것은 폭력적으로 훼손된 규칙이다. 비이성적 집념의 독재 행위다. 무엇보다 불온하다. 그런데 그 영화가 연일 매진이라 했다. 광기와 원혼과 포르말린 냄새가 떠도는 어두운 극장인지 종합병원에 4시간 넘게 떠돌려고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겨울. 마침내 나는 오래된 잔상을 따라 종로3가, 낡고 거대한 낙원상가 4층으로 걸어 올라갔던 것이다.
<킹덤>의 러닝타임이 알고 보니 드라마 네 편을 극장용 한 편으로 묶은 결과였다는 사실 외에도 두 영화는 유사점이라곤 없었다. 이날 한 사람이 등장한다. 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정성일은 왕빙 감독의 열렬한 지지자로,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을 <천당의 밤과 안개>라는 또 다른 다큐로 완성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책 <나의 작가주의: 왕빙, 영화가 여기에 있다>에 이렇게 쓴다. “중국 윈난성 정신병원으로 들어간 왕빙의 스펙터클을 구경하고 있다면 나는 당신을 경멸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 관객이었다.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이 처한 극악한 환경, 병자들의 기괴하고 충격적인 행위들, 그들 개개인의 사연, 불공평한 사회 구조에 대한 지식, 분노와 눈물 같은 것들을 기대하며 여기에 왔다. 영화가 시작됐다. 내가 기대했던 것들은 영화에 다 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조용히 굳어가고 있었다. 피를 돌게 하는 스펙터클은 없었다. 담담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그들 곁에 서거나 앉은 시선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이 내게 물었다. 이들이 인간이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느냐고. 이들은 특정 조건에서 영화가 될 뿐, 원래부터 영화였던 게 아님을 알고 있느냐고.
<유레카>
5
」윈난성의 가혹한 겨울에 정신병원의 콘크리트 벽은 두부처럼 쓸모없어 보였다. 그 벽 안과 밖에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이상행동이라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극장은 만석이었다. 불편하고 삐걱거리는 좌석마다 손길만 닿아도 바스락대는 합성섬유 패딩을 껴입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나는 모르는 타인에 닿기 싫은 나머지 자리에 앉은 내내 양팔을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바깥은 한겨울이었고 상영관에선 히터가 쉴 틈 없이 돌아갔다. 열풍은 피부와 눈알과 머리칼과 입술은 물론 들숨과 날숨에 섞인 수분까지 남김없이 말려댔다. 그러니 3시간 47분은 형벌과도 같았다. 영화가 끝났다. 곧이어 정성일 감독의 강연이 시작됐다. 그의 해설은 극장에 불이 꺼질 때까지 그치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는 오늘 작정하고 이 자리에 섰다. 관객들은 다시 네 시간 동안 꼼짝 못 하고 그의 말에 붙들려 있다. 훗날 나는 허리 디스크가 터져 MRI를 찍게 되는데, 자료를 살피던 의사가 디스크가 한 번 찢어졌다가 아문 자국이 있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나는 8시간 동안 극장에 앉아 있던 이 겨울밤을 떠올렸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세부 내용을 틀리기 일쑤다. 그날 세계에 균열을 내던 평론가의 말도 희미하다. 그런데도 내가 이 영화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날 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왕빙 감독은 어떤 서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영화를 찍지 않는다. 그들 곁에 잠시 같이 있기 위해 카메라를 든다. 그는 긴 영화들을 찍었다. 9시간 11분, 16시간 30분, 8시간 15분. 이 숫자들은 내게 질문과 같다. 한 사람의 무수한 날 중 채 하루도 못 되는 시간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담았노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영화는 삶 앞에서 겸허하기에 기나길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인생을 함께했다. 그 시간은 이해도, 공감도, 기억도 아닌 촉감으로 내게 남았다.
0. 오프닝
」여기 극장이 있다. 빠져나가는 창구는 둘. 스크린과 출입구. 하나를 택하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다른 하나를 택하면 영화로부터 고립된다. 나는 내가 속한 곳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싶어 극장을 찾았기에 출입구로부터 기꺼이 등을 돌렸다. 지금부터 이곳은 나의 시간을 소유하고 통제한다. 무자비하게 강탈하기도 한다. 길다고 느리지 않고 짧다고 빠르지 않은 시간이 아무튼 흘러, 마침내 영화가 끝나면, 간신히 탈출하는 관객들. 하나같이 탈진했다. 그런데 이 답답한 자들은 방금 우리가 통과한 이 기나긴 영화가 감옥처럼 갑갑했음을 금세 잊고 만다. 우리는 잊는 사람들. 기쁨(아, 정말 아름다웠다. 그치? 멋진 걸 봤어), 그리고 덤으로 따라오는 성취감(그저 앉아 있기만 했으면서!)과 함께 집에 돌아와 다음 상영 목록을 확인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극장의 시간 속에서 감금됐던 불안과 무기력의 기억은 다음 기나긴 영화가 막 시작될 참에서야 벼락처럼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지금 우리는 새로 시작될 3시간 37분을 앞두고 공포에 질려 있다. 넓지도 좁지도 푹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이 어중간한 빨간 의자에 꼼짝없이 붙박인 채로 영화가 시작되는 장면을 본다. 곧 어린 미야자키 아오이가 등장할 것이다. 젊은 야쿠쇼 코지는 낡은 버스를 운전할 것이다. 스크린에는 세피아 빛 하늘이 펼쳐질 것이다. 어둡고 흰 길들이 이어질 것이다. 묵묵하고 끔찍한 여행 끝에 마침내 세상의 끝에 도달하는 한 여자아이를 보게 될 것이다.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극장을 나올 것이다. 똑같은 대화를 할 것이다. 오래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기나긴 인생, 영화들에 관하여.
임유청은 텍스트 기획자이다. 이름은 하나인데 직업은 서너 개. 주로 영화 도서 편집자, 텍스트 기획자로 쓴다. 극장에 가면 대체로 복도석에 앉는다.
Credit
- 글/ 임유청
- 사진/ 로테르담 국제영화제,라이트하우스,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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