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을 작업실 삼는 작가, 김재현
작가 김재현은 불상과 강렬한 원색으로 둘러싸인 사찰에서 가장 편안한 장면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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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은 어디에나 있다
폐공장, 빌라 반지하, 사찰. 어디든 작업실이 될 수 있지만, 누구나 이곳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자기에게 꼭 맞는 공간을 찾아낸 예술가들을 만났다.
복전함 앞에 작은 사이즈의 입체 작업들이 모여 있다.
김재현
」일상 속 기대와 예측을 벗어난 장면에 꽂혀 그림을 그린다. 주로 산책할 때 그런 풍경을 마주친다. 먹을 쓰기도 하고, 유화도 수채화나 담채화처럼 얇게 그리는 등 기법적인 측면에서 학부 시절 전공한 동양화의 영향을 받은 작업을 한다. 서울 은평구의 한 사찰 빈 지하 공간에다 작업실을 마련한 지는 올해로 3년 차가 됐다. 냉난방이 되지 않는 곳에서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법은 물론이고, 계절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까지 터득했다.
작가 김재현과 그의 작업을 처음 만난 건 지난 5월 송은에서 열린 전시 «스프링 피버»에서다. 3명의 작가가 함께한 전시에서 김재현은 <과초점(Hyperfocal Focus)>이라는 소제를 달고 회화를 선보였다. 초록이 만연한, 자기 키보다 큰 그림 앞에서 네덜란드 유학 시절 산책하다 만난 어느 순간에 대해 나직이 읊조리는 것을 보며 역시, 작가와 작업은 닮아 있다고 생각하던 중에 전시 홍보 담당자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재현 작가 작업실이 은평구의 한 사찰에 있대요. 작년에 오픈 스튜디오도 하셨다더라고요. 절에서 이런 그림이 나오다니, 너무 재미있지 않아요?”
사연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직후 작가에겐 보광동 작업실이 있었다. 급하게 구한 작업실은 한쪽에서 자고 한쪽에서 작업하며 지낼 수 있는 작은 투 룸 구조였다. 작가는 폐병원이나 학교를 단기로 싸게 렌트해주는 네덜란드의 ‘안티 스쿼트(anti-squat)’ 문화 덕에 유학 시절 내내 큰 작업실을 썼다. 먼 발치서 그림을 볼 수 있는 공간에 있다 보광동 작업실에 있자니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물리적 공간이 작업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한 그맘때, 가족들과 머리를 식힐 겸 양주의 어느 절로 템플 스테이를 떠났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예술에 관심이 많은 주지 스님을 만난다. 뭘 먹고 사냐는 스님의 물음에 그림을 그리며 최근 유학을 다녀와 새로운 작업실을 찾고 있다고 답했고,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깊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로부터 며칠 뒤, 스님은 은평구에 쓸만한 공간이 하나 있다며 연락을 줬다. 그곳이 지금의 작업실이다. “이 규모가 마음에 들었어요.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거든요. 정제 없이 말하자면, 큰 그림은 형편을 생각하게 해요. 이곳에서는 공간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 부담을 비교적 덜 수 있으니 사용해보자 했죠.”
눈 닿는 거의 모든 곳에 금색 불상이 있고, 사방이 빨강, 초록, 파랑, 노랑 채도 높은 화려한 원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점은 괜찮았을까? 이 공간의 존재를 안 뒤부터 김재현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노랗고 초록빛인 색채가 사찰의 화려한 색감에서 영향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처음 3개월 정도는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어요. 저는 제 안에 있는 추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작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 요소가 작업에 많이 묻어나거든요. 공간의 색이 그림에도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그림을 아예 그리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흰색으로 칠해진 보통의 작업실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전히 적응했고요.” 인터뷰 도중 1층 법당에서 밥 먹으라며 작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시계를 보니 12시다. 스님들은 항상 같은 시간에 공양을 하고, 김재현도 그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다. “절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규칙적으로 움직여요. 여기 있다 보면 이분들의 삶의 리듬을 간접적으로 따라가게 돼요. 일정한 루틴도 생기고, 작업의 집중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되더라고요. 대표적으로 식사 시간이 그렇죠. 오늘은 좀 늦게 먹는다고 말씀드렸어요.(웃음)” 문득 이 말을 하는 작가가 무척 편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김재현은 네덜란드 유학 시절 그림을 편안하게 그리는 방법을 알게 됐다 말한 적이 있다. 공유하는 체계나 가치가 다른 나라에서 그간 해왔던 작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뭔가 그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저 운동하고 산책만 하던 때. 순간순간 내가 보고 듣고 감각하는 것을 그리는 것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 김재현은 그때 느낀 편안함이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역이었다고 회상한다. 내가 보고, 듣고, 감각해서 그린 것.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진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누군가에겐 작은 것일지도 모를 그 사소한 감각을 찾기 위해 유학을 결심한 것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에서 한 작업을 갖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여기선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뭐랄까, 좀 순진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럼에도 서울에서 일말의 확신을 주는 순간들을 찾으며 발전시키고 있어요. 그런 순간에 대한 확신은 서서히 생겨요. 늘 다니는 길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산책에서 자주 소재가 나오는 것 같아요.”
요즘 김재현은 독립문 공원을 자주 걷는다. 공원 안쪽 조그마한 인공 연못, 수북한 물풀에 번번이 눈길이 간다. 수직으로 자라다 부력 때문에 바닥과 평행하게 누운 꼴이 되었는데, 늘어진 잎에 오리 털, 나뭇잎, 꽃잎이 쌓여 매일 모습이 달라진다. 이제 곧 김재현의 캔버스에는 올여름 숱하게 본 이 장면들이 그려질 것이다.
고영진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후암동 남산 소월길을 지척에 두고 원고를 쓸 수 있는 작업실을 갖고 싶다.
Credit
- 글/고영진
- 사진/ 박현경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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