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부터 약주까지, 저마다의 여름을 담은 여섯 가지 전통주
소설가, 큐레이터, 바텐더, 작가, 에디터가 사심을 담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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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도 제철이 있다면
이곳에 모인 여섯 가지 술의 제철은 여름일 것이다. 작가, 큐레이터, 바텐더, 에디터 여섯이 저마다의 여름이 한 움큼씩 담긴 전통주를 골랐다.
이강주 25도
배나무 이(梨), 생강 강(薑). 이름 그대로 배와 생강의 맛과 향을 입힌 25도짜리 증류식 소주. 맛이 셀 것 같다는 편견은 첫입에 사라졌다. 달콤하고 청량한 배의 향과 알싸한 생강 향 덕에 약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끝맛은 부드럽고 깔끔하다. 여름날 여러 문화 공간이 오손도손 모여 있는 사직터널 근처의 작은 술집에서 이 술을 처음 만났다. 어쩐지 이 동네를 닮았다고도 생각했다. 조선의 3대 명주라는 수식보다도 서촌에서 보내는 여름의 느긋한 저녁을 상징하는 술이 된 이유다. 여름에 얼음 가득한 잔에다 마시는 기쁨도 분명하지만, 실온에서 미지근해진 술을 소주잔에 따라 홀짝이는 겨울도 제법 근사할 것 같다. ‐ 큐레이터 양진영
담은막걸리
전시 오프닝 땐 늘 한 손에 와인이나 위스키가 들려 있다. 얼마나 마셨는지도 모르게 한 모금씩 들이켜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편하게 즐길 술이 필요하다. 도수가 높거나 향이 강한 것보다 음료처럼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쪽 말이다. 담은막걸리는 이 조건에 정확히 부합한다. 우유보다도 부드러운 텍스처에 기분 좋은 단맛과 막걸리 특유의 청량함도 갖췄다. 마치 화채를 먹는 것 같달까. 막걸리 하면 떠오르는 전, 수육 같은 음식이 아닌 치즈나 과일같이 가벼운 안주와 잘 어울린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 작가 연진영
장성만리
2023년 여름, 전통주에 상당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서촌의 어느 식당에서 추천을 받아 처음 마신 술이다. 그날의 관건은 주로 산미가 강한 와인을 선호하는 아내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였다. 전남 장성군의 ‘해월도가’에서 만든 이 술은 약주의 기본 재료인 쌀, 누룩, 물에다 연꽃을 넣은 것이 특징이다. 화사하고 산미가 강한데, 적당한 바디감에 쌀의 질감도 느껴진다. 한마디로 경쾌하다. 기분 좋게 마셨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에 이런 훌륭한 술이 있다니, 위안이 될 정도였으니까. 이제 여름이 올 때마다 장성만리를 찾게 된 우리는 이 술이 특히 싱싱한 해산물과 조합이 훌륭하다는 점도 알아냈다. ‐ ‘바 참’ & ‘바 뽐’ 대표 임병진
도한 청명주
여름밤에는 주로 뛴다. 한낮의 열기를 머금은 아스팔트는 여전히 뜨겁고, 그 위를 한참 달리면 몸은 물에 적신 수건처럼 축 늘어진다. 2년 전 어느 여름밤에도 그랬다. 땀을 흠뻑 흘린 뒤의 갈증은 산미 가득한 아이스 커피나 맥주로 달래는 편이지만, 그날은 함께 뛴 친구가 집에서 챙겨온 청명주로 대신했다. 편의점 얼음 컵에 술을 가득 따르자 먹기도 전에 달콤한 과실 향이 피어올랐다. 한 모금 머금으니 새콤한 요거트를 닮은 맛이 혀끝을 스쳤다. 그리고는 꿀꺽 꿀꺽. 술을 물처럼 넘긴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뭉친 햄스트링까지 스르르 풀리는 맛이었다. 해가 길어질 무렵이면 냉장고에 청명주부터 들인다. 잔을 비우면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떠올라 씁쓸해지다가 이내 첫 모금의 단맛이 떠올라 다시 잔을 채우기를 반복한다. ‐ 프리랜스 에디터 김승훈
마루나 약주
바이오리듬을 정반대로 맞추어 놓고 사는 바텐더에게 밤이 짧아지는 여름은 미운 계절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달갑다. 부산의 해풍으로 단련된 나에게 여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청어다. 기름이 차오른 여름 청어는 잘 손질한 뒤 살짝 칼집을 내 두껍게 썰고 간장 대신 라임즙을 듬뿍 뿌린 뒤에 소금에 찍어 먹는다. 이걸 다섯 배 정도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술이 있다면 아토양조장에서 만든 마루나 약주다. 밀누룩으로 한 번 발효해 만든 마루나 약주의 상큼한 신맛과 과일 향이 청어의 느끼함과 비린내를 잡고 한층 산뜻하게 만든다. 여름밤 얼음물에 칠링한 약주와 청어를 함께 곁들이는 행복을 모두가 누려보길. ‐ 바 ‘파인앤코’ 대표 박범석
한산소곡주 생주
보기만 해도 상쾌한 글자를 딱 하나만 꼽자면 단연 술 앞에 붙은 ‘生’ 자가 아닐까. 여름이면 생맥주와 생막걸리에 기대 더위를 나던 나는 최근 약주 중에서도 열처리를 하지 않고 쭉 냉장 보관하여 신선하게 마실 수 있는 생주에 취미를 들였다. 초당옥수수가 나는 철에는 가장 먼저 한산소곡주 생주가 떠오른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만드는 이 술은 백제의 왕실주로서 무려 천년의 역사를 가졌단다. 멥쌀보다 찹쌀의 비중이 높아 옛 풍류객들에게는 입에 착 붙는다는 평을 들었다고. 달콤한 감칠맛과 목넘김이 매끄럽다는 특징이 있는데, 생주는 단맛이 더 가볍고 화사한 쪽이라 초당옥수수의 맛을 닮았다. 말하자면 곡주와 과실주의 장점을 모두 지닌 맛. 한식과 함께한다면 매콤한 것부터 담백한 것까지 두루 잘 어울린다. ‐ 소설가 은모든
Credit
- 사진/ 이효진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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