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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에베의 180주년

180년을 맞은 로에베의 아카이브, 그리고 아마조나 백 이야기.

프로필 by 윤혜영 2026.07.02

LIVING ARCHIVE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고 잊히는 시대에, 180년의 기억을 현재와 잇는 하우스가 있다. 로에베는 그 시간을 역사책이 아닌 가죽의 표면 위에 새겨왔다. 창립 180주년을 맞은 로에베의 아카이브, 그리고 아마조나 백 이야기.

1975년에 제작된 오리지널 아마조나 백.

1975년에 제작된 오리지널 아마조나 백.


미국 PBS에서 10년 넘게 방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Finding Your Roots>는 언론으로부터 “TV 역사상 가장 깊이 있고 지혜로운 시리즈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은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출연자들이 DNA 분석과 족보 추적을 통해 잊혀진 뿌리를 찾아간다. 먼지가 소복히 쌓인 과거 속에서 발견하는 흔적들은 의외로 지금의 그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 사실에 누구나 적지 않은 감동을 받는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호기심은 인간의 순수한 본능에 가깝다. 지금의 우리는 수많은 시간이 축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존재의 이유를 과거의 흐름 속에서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비록 내가 살아보지 못한 머나먼 과거라 해도, 그 시간은 어떻게든 현재의 나에게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흩어진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방식, 우리는 그것을 아카이브라고 부른다. 그 본능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래된 하우스가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로 건네는 방식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충동을 읽는다.

1965년경 마드리드 그란 비아 8번지 로에베 매장 쇼윈도를 장식한 호세 페레스 데 로사스의 디자인. 1960년 마드리드 세라노 거리 로에베 매장. 1966년 매거진에 실린 로에베 백들. 1979년 가을/겨울 로에베 카탈로그.

로에베가 올해 창립 180주년을 맞았다. 19세기 마드리드의 좁은 골목 한편에서 시작된 가죽 공방이 두 세기를 넘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19세기, 20세기, 21세기를 온전히 걸쳐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시대마다 일어나는 문화적, 사회적, 미학적 변화에 능숙하게 대응하며 살아남은 하우스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로에베는 그 드문 예외 중 하나다. 로에베에서 디자인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적 형식이다. 물질과 몸짓, 쓰임을 통해 지식을 표현하는 언어. 그리고 그 언어는 처음부터 가방이라는 오브제 안에 새겨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가방은 원래부터 작은 아카이브였다. 일상의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경험과 마모의 흔적,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신체에 밀착되고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마모되고 변형되는 가죽 제품의 특성 안에서 ‘디자인은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일상을 감각적으로 확장하는 분야’라는 로에베의 오랜 철학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백은 개인의 삶을 조용히 품은 채로 휴대용 아카이브로 거듭난다. 이 철학이 쌓이고 쌓인 공간이 로에베 하우스 아카이브다. 단순히 지나간 작품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다. 200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발전시켜온 변화를 생생하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기증을 통한 오브제들이 다수 보관되어 있으며, 그중 상당수에는 사용의 흔적이 묻어 있다. 마모된 가죽, 여닫으며 생긴 자국, 누군가의 손이 오래 닿았던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착용자와 한 몸처럼 함께해온 가죽의 표면에는 그 어떤 미화도 없이 긴 시간의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아카이브 속에서 오브제들은 그저 과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이곳에서 아름다움은 구현하는 그 자체로 끝나버리는 목적이 아니라 축적된 지식의 형태로 등장한다. 아카이브가 없는 하우스는 깊이감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과정도 없는 취약한 현재로 전락한다. 그것은 비단 하우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사람이 단단하게 서 있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가장 구체적으로 응축된 오브제가 있다. 아마조나 백이다.

아마조나 백을 든 사라 제시카 파커. 로에베 가방을 든 케이트 모스.

1975년, 아마조나는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서 탄생했다. 그해는 36년간 스페인을 철권 통치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사망한 해다. 수십 년간 스페인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제약들, 기혼 여성이 일을 하거나 재산을 소유하거나 은행 계좌를 개설할 때조차 남편의 동의를 얻도록 강제하던 법들이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무직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의 스페인 여성들을 위해 태어난 아마조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대적 상징이었다. 장식적 요소가 많았던 경직된 구조에서 벗어난 부드럽고 유연한 형태의 이 백은 당시 여성들의 자신감과 자립심을 담은 가방이었다. 마드리드 헤타페 근교 공방에서 51년째 로에베와 함께하고 있는 장인 파코 구즈만이 이 일을 시작한 해도 1975년이다. 그리고 그가 망설임 없이 가장 좋아하는 백으로 꼽는 것이 아마조나다. 그는 백을 분해하지 않아도 구조를 전부 파악한다. 머릿속에 이미 패턴 전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 동안 손으로 쌓아온 지식. 그것이 로에베 공예의 본질이고 아마조나라는 오브제가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다.

로에베 180주년 기념 캠페인.  에스파 지젤.  살마 아부 데이프.

이 무게를 올해 창립 180주년 캠페인이 정면으로 받아 든다. 사진을 맡은 이는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파인아트 사진작가 탈리아 체트릿. 인물의 내면과 정체성을 친밀한 시선으로 포착하는 그는 미술계와 패션계 양쪽에서 주목받아왔다. 피사체들이 흥미롭다. 배우 줄리아 가너, 살마 아부 데이프, 후이잉훙, 시시 스페이식, 에스파의 지젤, 아티스트 카라 워커. 세대도, 국적도, 장르도 제각각인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로에베의 백을 쥐고 있다. 플라멩코 클러치의 접힌 주름 안에, 퍼즐 백의 맞물린 조각들 사이에, 아마조나 180 백의 단단하고도 유연한 실루엣 위에 저마다의 시간이 얹힌다. 아마조나 180 백은 잭 맥컬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가 오리지널의 구조는 그대로 지키면서 스웨이드와 카프스킨의 새로운 촉감으로 표면을 다시 쓴 것이다. 누군가의 허락 없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일 수 있게 된 시절의 공기가 지금 이 백을 드는 사람의 손끝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스페인 말라가 출신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목소리로 완성된 애니메이션도 공개된다. 전구가 발명되기 전, 전화기가 생기기 전, 인류가 달에 착륙하기도 전에 로에베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그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에 의해 흘러나온다. 캠페인과 함께 비즈 자수, 가죽 인타르시아, 가죽 참으로 구성된 캡슐 컬렉션도 출시된다. 로에베가 독일어로 사자를 뜻하는 말임을 상기시키듯 사자 일러스트레이션 모티프가 백과 가죽 소품, 의류 곳곳에 새겨진다. 한국에서는 180주년 특별 간행물 <180 Years of Craft>를 서울의 그래픽 노블 서점 ‘그래픽’, 문화공간 ‘OFR 서울’, 포토그래피 전문 서점 ‘이라선’에서 무료로 만날 수 있다. 로에베 아카이브의 오브제, 마드리드 공방의 내부, 아마조나 백이 탄생한 시대의 스페인을 담은 이 간행물은 읽는 것이라기보다 손으로 넘기는 것에 가깝다. 180년의 시간이 종이 위에 조용히 얹혀 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알았고, 그 기억을 어떻게 이어야 하는지 알았던 로에베. 180년의 흐름이 나이테처럼 새겨진 곳은 언제나 가죽의 표면 위였다. 앞으로 아카이브라는 단어의 의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이 이름을 하나의 선명한 예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Credit

  • 글/ 김민정(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 Loewe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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