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디자이너들은 왜 미국으로 향했을까?

크루즈 쇼를 선보이는 5개의 주요 하우스 중 무려 3곳이 선택했다.

프로필 by 이진선 2026.07.03

A NEW STAGE!


크루즈 쇼를 선보이는 5개의 주요 하우스 중 무려 세 곳이 선택한 이곳. 디자이너들은 왜 미국으로 향했을까?


1910년대, 유럽과 북미에 거주하는 부유층인 카페 소사이어티(Cafe Society)들은 추운 겨울이 오면 기차와 호화 여객선을 타고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프랑스의 도빌, 리비에라, 코트다쥐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리도, 미국의 플로리다 팜비치, 마이애미 그리고 카리브해…. 그러자 그들에게는 곧 해변과 요트에서 입을 가볍고 활동적인 리조트 룩이 절실해졌고, 이를 가장 먼저 간파한 이가 바로 가브리엘 샤넬이다. 1919년경 그녀는 남프랑스의 휴양도시 비아리츠를 배경으로 한 유연하고 편안한 저지 소재의 해변용 의상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크루즈 컬렉션의 시초로 손꼽힌다. 1970년대 이후 상업용 여객기가 상용화되며 이를 타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젯셋족(Jet-setter)이 탄생했고, 크루즈 컬렉션은 한층 몸집을 키우게 되었다.

오늘날의 크루즈 쇼는 계절에 상관없이, 패션 하우스들의 자본력과 글로벌 전략을 집약해 선보이는 장으로 진화한 모습이다. 세계적인 건축적 명소나 상징적인 랜드마크를 무대로 펼쳐지는, 일명 ‘데스티네이션 쇼(destination show)’가 일반화되었으며, 수영복과 리조트 웨어 외에도 다양한 기후와 라이프스타일을 넘나드는 고객들의 니즈를 반영해 다채로운 아우터 피스가 크루즈 컬렉션을 채우고 있다. 여기에 철저히 상업적인 측면을 고려해 완성되는 크루즈 컬렉션은 11월 즈음 매장에 등장한 뒤 다음 해 정규 S/S 컬렉션이 나오기 전까지 무려 6개월가량을 매장에 머무르기에 브랜드의 전체 매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캐시카우(cash cow)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처럼 빅 하우스들에게 주요 이벤트가 된 크루즈 쇼가 이번 시즌 미국을 중심으로 열린다는 소식은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게다가 크루즈 쇼를 선보이는 주요 5개 하우스 중 세 곳이 미국을 선택했다. 디올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구찌와 루이 비통은 뉴욕이다. 흥미로운 건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환경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온 유럽의 패션 하우스들(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과 ‘성소수자 권리 축소’에 반발하며 케어링과 LVMH 산하의 여러 디자이너들이 런웨이에서 ‘다양성(diversity)’과 ‘포용성(inclusion)’을 강조하는 슬로건 티셔츠를 선보였고 백스테이지 인터뷰를 통해 공개적인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이 정작 한 해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를 개최할 장소로 미국을 선택했다는 거다.

디자이너들은 왜 미국으로 향했을까? 더군다나 조나단 앤더슨과 뎀나는 이직 후 선보이는 첫 크루즈 쇼가 아니던가. 누구도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지만, 그 답의 일부는 경제적인 데 있다. 디올, 구찌, 루이 비통 등 대부분의 하우스를 거느린 거대 기업 LVMH와 케어링은 트럼프가 매긴 유럽산 럭셔리 상품의 관세가 자신들의 수익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예리하게 인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그의 딸이자 디올의 CEO인 델핀, 아들 알렉상드르와 함께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도.(전직 대통령들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런웨이 위에서의 정치적 제스처와 그 밖에서의 정치적 제스처가 꼭 같을 수만은 없을 터다. 또 중국와 유럽의 럭셔리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하우스들은 상대적으로 견고한 구매력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 시장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장악한 스펙터클한 런웨이로 아메리칸 컨슈머리즘의 심장부를 직격한 뎀나의 구찌 크루즈 쇼야말로 이에 대한 강력한 방증일 것. 나머지에 대한 답은 구조적인 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이미지 생산 환경을 유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나라다. 또 그 안에서도 뉴욕과 LA는 거대한 미디어 인프라를 가진 도시. 브랜드가 런웨이 쇼를 통해 띄운 메시지가 대중에게 즉각적으로 읽히고, 전 세계적으로 소비되며,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이다. 이들은 그 가능성을 내다보고 저마다의 내러티브를 지닌 채 미국으로의 착륙을 결정했다.


무엇보다 각 하우스의 스토리텔링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미국의 유서 깊은 문화·예술 기관과의 파트너십. 먼저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헨리 클레이 프릭의 수집품으로 이루어진 미술관인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을 배경으로(이곳의 역사적인 1층 갤러리가 패션쇼를 위해 사용된 건 처음이다) ‘파리와 뉴욕의 미학적 교환’이라는 주제를 탐구했다. 그 결과 가장 프랑스적인 장인정신인 사보아-페어(savoir-faire, 최고의 수공예 기술)를 조명하면서도 1980년대 스트리트 아트의 전설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아트워크를 과감히 차용함으로써 또 한 번의 미래지향적인 럭셔리를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디올의 조나단 앤더슨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에 새로 개관한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를 자신의 첫 번째 크루즈 쇼를 선보일 무대로 선택했다. “크리스찬 디올은 전후 시기 사람들에게 ‘꿈’이라는 개념이 일종의 도피처로서 얼마나 중요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요. 그는 오트 쿠튀르를 통해 꿈을 탐구했고, 초현실주의를 추구하던 그의 친구들은 꿈에 매료되었으며, 할리우드는 당연히 그 자체로 ‘꿈의 공장’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시 문화적 변화의 거대한 흐름 안에 있었죠.” 이처럼 ‘할리우드의 도피주의적 낭만’에 집중한 앤더슨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1949년 영화 속에서 마를렌 디트리히가 입었던 디올의 쿠튀르 재킷에서 영감을 받는가 하면, 미국의 팝 아티스트인 에드 루샤(Ed Ruscha)와의 협업을 통해 아메리칸 셔츠의 원형을 재해석하기도 했다. 또 디올의 크루즈 역사상 최초로 남녀 모델을 런웨이에 함께 세우며 하우스의 엄격한 젠더 벽을 유연하게 허물기도.

뎀나의 첫 구찌 크루즈 쇼는 앞서 언급했듯 뉴욕을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인 타임스퀘어에서 펼쳐졌다. 사실 뉴욕은 1953년에 구찌가 첫 해외 매장을 오픈한 도시다. 때문에 하우스에 있어서도 귀환(homecoming)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뎀나는 하우스의 본질에 집중한 ‘구찌코어(GucciCore)’ 테마를 세상에서 가장 상업적인 공간에 역설적으로 던져 놓았고, 가장 강력한 시각적 언어로 표현했다. 의상 역시 휴양지나 파티를 위한 것이 아닌, 철저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아이템에 집중했으며 알렉스 콘사니, 아녹 야이 같은 전문 모델들 사이로 패리스 힐튼, 톰 브래디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해 현실의 다양한 인간상을 엿볼 수 있었다. 발렌시아가 시절, 트럼프의 취임식 전날에 열린 파리 쇼에서 코트와 스카프에 그와 대척점에 있던 진보 정치인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의 로고를 새겨 넣었던 뎀나. 그랬던 그가 미국 대통령의 본거지에서 거대한 쇼를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패션계가 들썩였다.

루이 비통 쇼가 열린 프릭 컬렉션 1층 갤러리 공간. 뉴욕 타임스퀘어를 장악한 구찌 크루즈 쇼. 할리우드 영화 세트장을 연상케 한 디올 크루즈 쇼장 풍경.

세 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미국’이라는 공통된 배경을 선택했지만, 이를 각 하우스의 헤리티지와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으로 번역해내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그럼에도 이들의 2027 크루즈 컬렉션을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 본다면 ‘아메리카나(Americana)의 고급화’가 아닐까 싶다. 세 곳의 하우스 모두 미국이라는 무대에 맞춰 실용주의, 서브컬처, 할리우드 글래머 등 미국적 요소를 적극 수용하면서도, 하우스 특유의 장인정신과 결합해 완전히 새로운 하이패션 트렌드를 제시했으니. 2028 크루즈 쇼는 또 어디를 중심으로 열릴까? 장소 자체가 패션 하우스의 철학을 대변하는 거대한 메시지가 된 요즘, 이들의 다음 행선지가 더욱 더 궁금해진다.

Credit

  • 사진/ © Dior, Gucci, Louis Vuitton, Getty Images(콜라주 소스)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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