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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 이상희와의 인터뷰

매 순간 진심과 맞닿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상희는 배우로서든 사람으로서든 그것을 꿈꾸는 것 같다. 그의 연기가 미더운 까닭이 거기 있다.

프로필 by 안서경 2025.05.28

ACTOR'S CHAIR #13


매 순간 진심과 맞닿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상희는 배우로서든 사람으로서든 그것을 꿈꾸는 것 같다. 그의 연기가 미더운 까닭이 거기 있다.


셔츠, 팬츠는 Ami. 반지는 Numbering. 슈즈는 Aldo. 타이로 연출한 로즈 디테일 초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데뷔 15년 만에 <디 이펙트>로 첫 연극 무대에 오르죠. 불현듯 연극이라니,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이상희 저는 영화가 좋아서 연기를 시작한 경우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영화보다 연기가 더 좋아요. 그러다 보니 무대 연기를 꼭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주변에 연극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조금씩 하고 다녔죠.

하퍼스 바자 역시 하고 싶은 건 말을 하고 다녀야 하는군요.(웃음)

이상희 그러니까요. 강승호라는 친구가 있어요. <장손>의 주인공요. 승호한테 “나 연극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냐” 하고 물었더니 민새롬 연출님한테 제 얘기를 전해줬어요.

하퍼스 바자 연극은 새로운 도전인데 어때요?

이상희 연습 초기에는 일단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어요. 스스로를 많이도 괴롭혔죠. 선후배, 동료 배우들이 연극은 그렇게 하면 지쳐서 끝까지 못 간다고 얘기해줬어요. 연극은 같이 대본 읽고 연습도 하면서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게 있는데, 저 혼자 질주한 거죠. 매체 연기는 준비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으니까 그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걸 빨리 찾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연극 작업은 주어진 정답 없이 계속 찾아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무대에 오르는 게 두렵거나 하진 않나요?

이상희 겁은 안 나요. 다만 잘하고 싶은 마음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뿐.(웃음) 독립영화를 하다가 상업영화로, 또 드라마를 하다가 이제 막 연극 무대에 오르는 건데 그럴 때마다 매번 연기를 처음 하는 것 같아요. 매체마다 원하는 연기와 시스템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많이 헤매기도 했고, 아주 오랜만에 바닥도 치고 올라왔어요. 그러고 나니 잘하자에서 ‘잘’이 떨어져 나가고 ‘그냥 하자’로 바뀌었어요. (웃음) 그래서 막상 지금은 불안하진 않아요.

하퍼스 바자 <디 이펙트>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연극인가요?

이상희 (잠시 침묵)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저 이런 정리를 진짜 못하는데.

하퍼스 바자 일목요연하지 않아도 됩니다.(웃음)

이상희 대본 첫머리에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 같아요. 네 사람의 사랑과 슬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이게 무슨 얘기야? 했죠.(웃음)

하퍼스 바자 항우울제 임상 테스트에 참여한 두 사람과 그들을 감독하는 두 명의 박사가 등장하잖아요. 그중 박사인 로나 제임스 역을 맡았고. 그렇게 네 사람을 뜻하는 건가요?

이상희 맞아요. 각각 사각형의 꼭짓점에 있는 사람들이죠. 극이 진행될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변화하게 돼요.

하퍼스 바자 인간의 감정에 관한 사고 실험 같은 건가요?

이상희 감정보다는 사랑에 좀 더 포커스가 있어요. 그런데 제가 느낀 건 그냥 삶이었어요. 네 사람의 삶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다 결국 그 삶들이 겹쳐지는 느낌요.

하퍼스 바자 그러면 관계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네요. 상대와 호흡을 주고받을 때 그 순간의 감정에 몸을 싣는 편인지, 미리 짜놓은 이성적 설계를 붙들려 하는 편인지 궁금해요.

이상희 장면에 따라 다른 것 같긴 한데, 기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연기는 그냥 흘러가는 연기예요. 그 순간 어떤 공기에 맡기는 것인데, 연기를 계속하다 보니 그런 방식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걸 느꼈어요.

하퍼스 바자 나한테 주어지는 강렬한 충동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이상희 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요. 그래서 혼자 공부도 하고, 여럿이서 스터디도 하고, 워크숍도 하면서 다른 방법들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어요.

하퍼스 바자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바뀐 건 사람 이상희가 바뀌어서일까요?

이상희 그런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 가치관도, 관점도 바뀌잖아요. 예전에는 ‘연기하는 나’와 ‘삶을 사는 나’가 굉장히 분리돼 있었어요. 그래서 집에 이상희 사진은 걸지도 않았어요. 오직 이나리만 살게 했죠.

하퍼스 바자 왜 그랬을까요?

이상희 그게 편했던 것 같아요. 이상희는 어딘가 신기루 같고, 시상식장 같은 화려한 데 다녀오면 약간 꿈같기도 하고. 배우로서의 삶을 악착같이 분리하는 게 진짜 내 삶을 지키는 방법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애초에 완벽히 분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은 어느 정도 교차점이 생겼고, 그러고 나니 오히려 내 삶의 바운더리가 더 잘 건사되는 느낌이에요.

하퍼스 바자 어떤 두려움이었겠지요. 직업이 (간호사에서 배우로) 갑자기 바뀌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일 자체의 특성이 워낙 파급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거고.

이상희 맞아요. 내가 무너질까 봐 그랬나 봐요. 그런 일말의 감정은 지금도 있어요. 어쨌든 노출되는 직업이다 보니 그 모습만 보고 이상희는 이러이러할 것이다, 하는 이미지가 생기잖아요. 그게 좀 버거웠나 봐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제 연기가 거절당하는 건 괜찮거든요. 연기는 취향이라고 생각하고, 저도 제가 좋아하는 연기적 색깔이 있으니까. 그런데 나 자체가 거절당하는 건 굉장한 상처가 되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그런 감정은 주로 어떤 경험에서 왔나요?

이상희 오디션을 볼 때 연기로 봤다가 떨어지면 큰 상처가 안 되는데, 미팅만 했는데 캐스팅이 안 되면 내가 거절당한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저랑 반대더군요. 자기 연기가 가닿지 않았을 때가 더 상처래요. 그 말에 환기가 됐어요.

하퍼스 바자 신선한 충격이었겠어요.

이상희 엄청요. 그러면서 난 왜 이렇게 내가 거절당하는 일에 겁이 많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답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하퍼스 바자 거절에 익숙해지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앞서 말한 대로 연기는 취향의 영역이기도 한데, 배우 이상희는 독립영화 신에서 상업 신으로 넘어온 후 폭넓은 취향의 관객을 만족시켰고, 연기력 또한 인정 받았다고 생각해요. 이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느끼나요?

이상희 사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도 그렇고, <로기완>도 그렇고, 사람들이 거기서 제 연기가 좋았다는데 좀 의아했어요. 왜냐하면 늘 하던 대로 했으니까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나 뭐가 달라졌어? 난 똑같은 것 같은데 왜 어떤 작품에서는 주목받지 못하고, 어떤 작품에서는 칭찬받을까. 제 연기를 떠나 작품 자체가 대중에게 얼마나 가닿았는지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코트는 Eponym. 뮬은 Ferragamo.


하퍼스 바자 신인이던 독립영화 시절부터 워낙 연기를 잘했고 존재감도 컸잖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느끼는 배우 이상희의 인상은 ‘진짜 같다’는 거예요. 그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 같은 신뢰감. 그게 이상희가 하는 연기의 진실함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연기에 큰 편차도 없고요.

이상희 처음 드라마 할 때는 미숙한 부분이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진짜 존재만 해가지고. 으하하. 뭐 좀 하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거 아시죠? 독립영화에서는 뭘 하려고 하면 그냥 존재해 달라고 하잖아요.(웃음) 매체의 차이를 알아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드라마 몇 편은 꽤 많이 헤맸죠.

하퍼스 바자 능숙해 보이는 배우 이상희에게도 헤매던 시간이 있었다는 게 왜 이렇게 안심이 되죠? 지금 어디선가 헤매고 있는 배우들이 있을 테니까요.

이상희 나이 들어서 좋은 게 딱 이거 같아요. 헤매는 게 예전처럼 그렇게까지 쇼킹한 일은 아니고, 당연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점요. 예전에는 뭘 못 해내면 “우아, 큰일 났다. 이거 찍고 나면 나 사장될 수도 있겠다” 막 이랬는데 요즘엔 그렇게까지 가진 않아요.(웃음)

하퍼스 바자 경험치의 여유가 생긴 거네요. 여기까지 오는 길에 커리어에 대한 조급함이나 불안이 들 때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나요?

이상희 최근에 이 길을 시작하는 분에게 이런 말을 한 것 같아요. 씩씩하게 버티라고. 저도 옛날에는 몰랐어요. 모든 게 다 지나간다는 걸. 힘들 때는 꼭 안 지나갈 것만 같잖아요. 영원히 거기 머물러 있을 것만 같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지나가요. 배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씩씩하게 지금을 버티는 것. 그리고 그렇게 버텨오신 선배님들이 지금 제가 좋아하는 곳에서 제가 좋아하는 연기를 보여주시고 계세요. 저도 그러고 싶고요.

하퍼스 바자 이상희가 얘기하는 ‘씩씩하다’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상희 미래를 미리 불안해하면서 초조해하지 않는 것. 사실 사람인지라 저도 너무나 자주 그런 생각이 들지만, 그것들을 밀어내고 지금 여기 발붙이고 있는 것 자체가 씩씩한 일 같아요.

하퍼스 바자 그렇게 힘들었던 경험과 감정의 파고가 연기할 때 다 도움이 되죠?

이상희 그럼요, 자양분이 되죠. 한때 제 연기가 조금 지겨워지는 순간이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스터디도 하고 여러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어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할 때 배우 이정은 언니와 대기하면서 연기 얘기를 많이 했는데, 언니는 삶의 경험도 많고 다른 사람의 삶을 관찰하는 능력도 뛰어나요. 대본에서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정은 언니는 “나는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어” 하면서 그 기억을 꺼내서 연기하는 것 같더라고요.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제가 느끼기엔 그랬어요. 언니는 그런 능력이 발달된 사람이에요. 저는 그렇게 누군가를 관찰했던 기억을 꺼낸 적은 별로 없고, 내 안에서 열심히 찾는 편이거든요.

하퍼스 바자 본인의 연기가 지겨워진 때가 언제쯤인가요?

이상희 지금으로부터 한 4~5년 전이에요.

하퍼스 바자 한창 드라마 작업을 할 때인데, 왜 그랬던 것 같아요?

이상희 연기를 하고 있는데 내 얼굴이 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그런 감각 아세요? 모니터링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학습이 됐나 봐요. 여기서 어떤 각도로 틀어야 효과적인지도 알게 되는 거죠. 그런 순간이 좀 싫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엔 모니터링을 잘 안 해요. 장단점이 있겠지만, 거기로부터 조금 자유롭고 싶거든요.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감각이 잘 발달했고, 그걸 정말 영리하게 쓰시는 선배님들도 참 많아요. 그리고 결국 배우에겐 그 능력이 필요한 것 같고요. 그런데 아직은 제가 그러고 싶지 않은 때인가 봐요.

하퍼스 바자 “나를 모르면 연기를 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하나요?

이상희 맞아요. 배우 일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공부하게 되거든요. 그게 이 일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대체로 우리의 시선은 타인을 향해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배우라는 도구가 되면서 나라는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한 거죠. 그 과정이 신선하고 재밌어요.

하퍼스 바자 외부의 인물을 연기하는데, 그게 나를 알아가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요. 캐릭터와 상황을 대하는 나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는 의미인가요?

이상희 도구로서 나를 잘 쓰려면 내가 편안해야 하잖아요. 어떨 때 편하고 어떨 때 불편한지, 자기 사용 설명서를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가령 저는 재벌 역할은 좀 불편하거든요. 이게 왜 불편할까를 생각해 보죠.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또 가까운 주변에서 관찰한 적도 없으니까? 그러다가 내가 내 외모에 약간의 열등감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죠. 재벌 특유의 귀티를 어떻게든 연기로 커버하고 싶은데 나에게 그런 재료가 없어서 불안한 걸 수도 있겠다, 뭐 이런 식으로 나를 알아가는 거예요.


드레스는 Son Jung Wan. 이어커프, 반지는 Portrait Report.


하퍼스 바자 연기를 하다 보면 원래 타인에게 별 흥미가 없었다 해도 점차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 같아요.

이상희 그래야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선배님들은 다 그 방향성이 있어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 인간에 대한 관심. 그건 배우의 덕목이자 능력이기도 해요. 전 아직 그렇지 못해요. 인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작품 속 인물에 대한 관심이 더 크거든요. 하지만 결국 거기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제가 인물을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출발은 호기심이나 탐구였다고 해도 그러다 보면 종국엔 사랑하는 마음으로까지 가게 될 것 같아요. 인간사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기반되어 있는 배우의 눈빛은 다르잖아요.

이상희 맞아요. 그래서 줄리언 무어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세상을 다 끌어안는 느낌. 인간애가 있죠.

하퍼스 바자 배우가 되고 난 뒤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나요?

이상희 예전에 한석규 선배님이 이런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좋은 삶을 살아야 좋은 연기를 하고, 좋은 사람이 결국 좋은 배우가 된다. 전 한때 불안을 동력 삼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연기한 작품은 내가 봤을 때 보기 싫더라고요. 건강하지도 않고, 그냥 꼴뵈기 싫었어요.(웃음) 스스로 너무 몰아붙이고 쥐어짠 것 같아서요. 그건 그 인물이 아니라 나거든요.

하퍼스 바자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이상희 도움이 필요한 곳에 선뜻 손 내밀 수 있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있고, 추구하는 가치관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요. 사실 저는 별로인 순간도 많고, 스스로 못마땅한 모습도 많은데, 이런 인터뷰 속에서는 꽤 근사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서 때론 모순과 충돌을 느끼곤 해요. 저는 좋은 사람이고 싶지만, 자주 고꾸라지고 미끄러지는 사람이에요.

Credit

  • 프리랜서 에디터/ 김현민
  • 사진/김영준
  • 헤어/ 한지선
  • 메이크업/ 홍현정
  • 스타일리스트/ 김경선
  • 어시스턴트/ 유정아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