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구찌에게 런던이란?

브리티시 악센트가 들어간 구찌의 로맨틱한 연사를 들을 시간이다.

프로필 by 이진선 2024.06.22
정글로 변모한 테이트 모던 지하의 탱크스. 피날레의 모델들이 걸어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13일 구찌의 2025 크루즈 쇼가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열렸다. 사실 구찌의 런던행이 알려졌을 때부터 이미 이 쇼의 어마어마한 대비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장소가 테이트 모던이라는 사실에서 구찌 2025 크루즈 쇼가 얼마나 많은 은유와 상징을 담고, 또 얼마나 촘촘한 스토리를 풀어낼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날 우린 한 편의 소설 같은 쇼를 감상했다. 이제부터 이 쇼에 깔린 수많은 복선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탈리아의 상징인 구찌가 영국의 심장인 런던에서 쇼를 연다, 이 문장 하나에도 이미 강렬한 대비가 느껴진다. 클래식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와 모던의 시발점인 영국. 이 두 나라는 같은 유럽이지만 확연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마치 외향적이고 맛있고 멋진 것을 즐기며 대화와 표현이 활발한 열정적인 A와 일반적으로 과묵하면서도 차분하며 개인의 공간을 중시하고 감정 표현이 더 담백한 B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물론 A와 B는 각각 이탈리아와 영국을 의인화했을 때다. 이탈리아가 고대 로마 문명부터 시작해 르네상스 예술과 같은 클래식의 상징이라면,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세계 성장과 발전을 주도하며 ‘모던’이란 개념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나라다. 버지니아 울프, T.S. 엘리엇 같은 현대문학의 주요 작가를 비롯해 건축과 미술, 음악 등에서 현대적 추세와 양식을 형성하는 데 영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나라를 이탈리아 클래식의 상징과도 같은 구찌가 찾았다. 더욱이 그 구체적 장소가 테이트 ‘모던’이다.
“창의적인 방향성을 탐험하는 것은 이미 존재했던 공간에 들어선 뒤 그곳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를 재구성하기 위해 새롭게 작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크루즈 쇼를 위해 런던을 선택했고, 그것이 옳은 선택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저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저를 환영해주었고 제 말에 귀 기울였습니다. 런던은 구찌에게도 그런 도시로, 하우스의 창립자는 이곳에서 다양한 것을 경험하며 영감받았습니다.”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의 말처럼 런던은 구찌의 역사상 꽤나 중요한 장소다. 1899년, 구찌오 구찌는 런던의 사보이 호텔에서 포터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호텔의 상류층 고객들과 그들의 희귀한 취향을 열정적으로 관찰했다. 그들이 입고 다니는 모든 것과 가지고 다니는 것을 연구했고, 호텔을 찾는 여행객의 라이프스타일에 열광했다. 이후 그는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가죽 제품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1921년 구찌 하우스가 창립됐다. 구찌오 구찌가 온몸으로 느꼈던 영국과 이탈리아의 뚜렷한 대비점이 그의 인생을 흔들어놓은 것이다.

원형을 뒤틀고, 선입견에 도전하며, 다양한 관점을 선사한 구찌의 새로운 크루즈 컬렉션. 사바토 데 사르노의 감성이 담긴 ‘구찌 블론디’ 백과 다양한 룩에 매치된 홀스빗 발레리나 슈즈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번 크루즈 쇼를 런던에서 개최하게 된 것은 서로 대비되는 것을 하나로 모아 이들이 대화하며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원동력인 구찌의 창의성, 그 본질을 탐닉하고자 하는 하우스의 열망에서 비롯됐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테이트 모던은 런던의 정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테이트 모던의 독창적인 터빈 홀(Turbine Hall)은 모든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탱크스(Tanks)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공간입니다.” 1백여 년 후 구찌를 이끌고 있는 사바토 데 사르노 역시 ‘대비’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이번 쇼에는 그가 런던에서 경험한 다양한 장소와 사람, 생각 같은 개인적인 것들을 녹여냈다. 그건 마치 사보이 호텔 입구에서 구찌오 구찌가 한 일과 비슷하다. 그는 호텔 고객들의 짐을 옮기며 그들을 잠재적인 고객으로서 면밀히 관찰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냈다. 사바토 데 사르노와 구찌오 구찌가 생활하는 그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빛깔, 다른 공기를 가진 런던에서 말이다.

미술관 지하에 위치한 탱크스는 이번 쇼를 위해 온실, 아니 정글로 완전히 변했다. 과거 화력 발전소였던 테이트 모던의 흔적이 탱크스에는 거칠게 남아 있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이곳을 구찌는 약 1만여 종류의 다양한 식물로 무성하게 채웠다. 산업의 결과물인 회색 콘크리트와 자연의 창조물인 초록빛 식물의 대조가 눈부셨다. 노출 콘크리트의 탱크스 안에는 시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그린빛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이는 시각적으로 인간과 자연, 서정적인 것과 미니멀한 것을 통해 이중성을 포용하고, 런던의 두 가지 측면과 인생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첫 번째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 그리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피날레 전경.

쇼는 두아 리파, 마크 론슨, 알렉사 청, 케이트 모스와 그녀의 딸 릴라 등 영국을 대표하는 패셔니스타들이 프런트 로를 채우며 시작됐다. “패션 디자인은 연구하고 탐험하고 해석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전 패션쇼를 통해 열망과 관능에 대한 저의 생각을 표현하고 난 후 선보이는 이번 패션쇼는 또 다른 저의 모습이기도 하며, 더 낭만적인 동시에 모순적입니다. 저는 우리가 아는 것을 가져와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규칙에서 벗어나 최대한 멀리 가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반대로 나아가 조화를 찾는 것입니다.” 사바토 데 사르노는 구찌 2025 크루즈라는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수많은 복선을 깔아놨다. 그렇게 시작된 쇼에서는 그가 말하는 대로 ‘반대로 나아가 조화를 찾아가는’ 쪽으로 흘렀다. 이번 컬렉션은 구찌란 단어를 가장 군더더기 없이 풀어낸다. 그건 모던이란 형용사를 붙이기에 딱 적당한 뉘앙스다. 완벽하게 브리티시 악센트를 내는 이탤리언 스타일이었다. 혹은 이탤리언 스타일이 터치된 영국의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 나라, 두 취향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흠모할 만한 매력적인 룩들이 완성됐다. 예컨대 구찌의 아이코닉한 미니 드레스, 구찌만의 느슨한 애티튜드를 담은 데님 팬츠, 하우스의 상징 중 하나인 로브스터-클래스프(Lobster-clasp)를 재해석한 우아한 진주 네크리스, 홀스빗 모티프를 담은 발레리나 슈즈, 심지어 쇼 막바지에 등장한 시폰 드레스까지 모든 옷들은 ‘모던’이라는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는 듯 군더더기 없고 가볍고 담백하며 현대적이었다. 비즈 디테일이 강조된 룩조차 일반적인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우아했으며, 시스루 룩에 레이스 란제리를 드러낼 때도 구찌의 문법은 느끼하지 않고 현대적이다. 이번 컬렉션은 쇼 노트의 쓰인 문구처럼, “원형을 뒤틀고, 선입견에 도전하며, 다양한 관점을 선사”하고 있었다. 특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는 지난 구찌 앙코라 여성 및 남성 패션쇼에서 하우스의 시대를 초월한 미학에 그만의 비전을 담아낸 액세서리로 새로운 시대의 구찌가 나아갈 방향을 이야기한 바 있다. 이번 2025 크루즈 컬렉션에도 사바토 데 사르노는 홀스빗 발레리나 슈즈로 구찌 스타일링의 방점을 찍었다. 홀스빗 발레리나 슈즈는 이번 패션쇼에서 다양한 룩과 함께 등장하며 컬렉션에 로맨틱함을 불어넣었다. 또한 한순간 구찌의 황금기 였던 1970년대를 떠오르게 하는 뉴 백 ‘구찌 블론디’ 역시 사바토 데 사르노만의 감성을 담고 있다. 1970년대 초, 구찌는 하우스 아카이브 속 엠블럼이었던 인터로킹 G를 라운디드 형태로 새롭게 디자인한 것으로 레더와 스웨이드 또는 투알(Toile) 소재, 상징적인 GG 모노그램 캔버스 소재 등 다채로운 버전으로 선보였다. 새로운 구찌 블론디 핸드백은 현대적이고 모던한 애티튜드를 더해주는 톱 핸들 디자인, 그리고 패디드 효과가 적용된 레더 소재의 구찌 블론디 엠블럼이 특징이다. 여기에 수작업을 통한 스티치 디테일이 구찌의 정통성을 드러낸다. 블론디 백은 이브닝 룩에 어울릴 만한 체인 스트랩 버전과 엑스트라 라지 사이즈의 블론디 맥시 등 다양한 버전으로 분화되었다. 한편 이곳이 영국임을 한 번 더 상기시키는 타탄체크의 개버딘 코트 시리즈까지 더해져 쇼는 그야말로 완벽한 스토리를 이뤘다. 구찌는 이 쇼에 대해 이분법(dichotomies)이란 단어로 표현했다. 엄격함과 화려함, 섬세함 속에 담긴 강인함, 영국적인 것에 담긴 이탤리언 정신. 이 사이의 조화를 찾는 것에 이 쇼는 모든 것을 바쳤다.
쇼장의 어두운 바닥에는 시인이자 가수인 1996년생 무스타파 아메드의 노래 ‘Stay Alive’의 한 구절이 빛나고 있었다

이 모든 지역과 이 모든 거리 표지판들/ 이들은 너와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의 제국이 될 것이다/ 그저 살아남아, 살아남아, 살아남아

잘 짜인 소설 같았던 이번 쇼에서 마지막 이 노래 가사가 뭘 의미하는지, 그 해석의 재미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Credit

  • 글/ 김민정(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 Gucci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