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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 삼촌>의 다섯 배우가 소환한 것들

세 끼 꼬박 챙겨 먹는 게 귀하던 시절,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각자 다른 꿈을 꾸던 사람들이 있다. <삼식이 삼촌>의 다섯 배우 송강호, 변요한, 이규형, 진기주, 서현우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치열하고 빛나는 장면에서 그들이 소환한 것들.

프로필 by 안서경 2024.05.21
(왼쪽부터) 서현우가 착용한 재킷, 팬츠는 Ami. 셔츠,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규형이 착용한 셔츠, 팬츠는 Valentino. 송강호가 입은 재킷은 Martine Rose by Adekuver. 목걸이는 Chrome Hearts. 반지는 Yend. 진기주가 착용한 코트는 Charms. 반지는 Chaumet. 변요한이 착용한 코트는 Alexander McQueen.
셔츠, 팬츠, 랩 스커트, 타이, 슈즈는 모두 Bottega Veneta.

송강호
하퍼스 바자 제작발표회에서 신연식 감독이 <삼식이 삼촌>은 배우 송강호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라 언급한 바 있어요.
송강호 딱 4년 전,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갈 무렵 지금과는 다른 초안을 접했어요. 제목도 정해지지 않았고 근현대사 속 어떤 인물들의 이야기를 구상한다는 정도만 들었죠. 이후 신 감독과 같이 <거미집>과 독립영화 <1승> 현장을 함께하면서 그 시나리오가 무르익어가는 걸 지켜봐왔어요.
하퍼스 바자 전쟁 중에도 자기 사람에게 하루 세 끼니를 반드시 먹인다는 인물. <삼식이 삼촌>의 삼식이, 정치와 조폭들의 뒷일까지 도맡는 박두칠 역을 맡았습니다. <변호인> <택시운전사> 등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배경으로 연기한 적은 있지만 1960년대는 처음이죠. 이번 시나리오에서 가장 매력을 느낀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송강호 제가 67년생인데 <삼식이 삼촌>은 1960년부터 1962년 초반까지를 배경으로 삼아요. 제가 태어나기 바로 직전, 근현대사의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던 몇 해를 다루죠. 다른 영화처럼 특정한 정치적 사건보다는 그 시대를 관통한 순수한 열정들이 어떻게 충돌하고 화합하는지, 사람들이 주가 되는 이야기가 흥미로웠어요. 물론 시대가 변했고 외부적, 구조적인 것들은 달라졌지만 어느 시대이든 변화를 꿈꾸는 삶에 대한 열망은 같은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종종 “배우는 얼굴을 찾아주는 직업이다”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게 배우로서 제 가치관입니다. ‘삼식이 삼촌’이라는 낯선 인물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잊고 있던 자신의 얼굴을 관객이 얼핏 봐주길 바랄 뿐이에요.
하퍼스 바자 처음엔 단팥빵이나 피자가 귀하던 시대적 배경과 ‘삼식이 삼촌’이라는 설정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송강호 6·25전쟁 이후 보릿고개를 겪을 만큼 굶는 사람이 많던 시절 세 끼를 다 먹는다는 건 굉장히 행복한 일이었고 절박한 삶의 명제였을 거예요.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어마무시한 존재라는 걸 드러내는 표현이죠. ‘삼촌’이라는 말도 한국 사회에서는 혈육이 아니라 내가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인물에게 쓰기도 하잖아요. 그런 상징적인 존재예요. 저는 살아오면서 외롭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가족 말고는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된다라는 게 참 좋았어요.
하퍼스 바자 <거미집>에서 맡은 감독 김열이 내레이션과 연기를 통해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인물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상황을 관조하는 배우 송강호의 얼굴을 내내 볼 수 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송강호 제 필모그래피를 돌아봤을 때 색다른 모습이라 느끼실 테고, 전편을 보고 나면 처음 보는 캐릭터일 거라 생각해요. 강한 카리스마를 내보였다가도 이기적이기도 하고 무척 인간적이기도 해요. 내면적인 모습은 꽤 모호해 보일 거예요. 관객이 ‘저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 느낀다면 그게 정답이라 생각해요. 이 역은 속내를 다 들켜버리면 매력이 없거든요.
하퍼스 바자 어느 인터뷰에서 신연식 감독이 삼식이 삼촌과 김산이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신은 자신과 송강호 배우가 대화 나누던 모습에서 모티프를 따왔다고 말하기도 했죠. 극 중 실제 송강호의 모습이 반영된 부분을 꼽아본다면요?
송강호 어떤 창작자든 주위에서 많은 영감을 받겠지만 신연식 감독은 특정 순간을 스펀지처럼 잘 흡수하는 사람이에요. “동의하시죠?”라는 대사가 있는데 그건 평소 제 말버릇이에요. 어느 날 자연스러운 상황에 그 말을 써보라는 신 감독의 말에 중요한 장면에서 그 말을 뱉었죠. 또 극 후반에 시루떡이 등장하는데, 그건 제가 “나는 시루떡 같은 사람이 좋다”라는 말을 한 데에서 착안한 거예요. 요즘 얼마나 달콤하고 화려한 떡이 많아요? 그 사이에서 시루떡은 넓적하고 투박해 보이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얘길 했는데 대화를 잘 캐치하더고요.
하퍼스 바자 배우로서 30여 년 동안 영화 작업을 이어오다 첫 드라마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죠. 영화 외골수로 살아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송강호 제가 두 가지 일을 못해요. 데뷔 시절부터 원래 제 스타일이 그래요. 일부러 드라마를 배척한다거나 영화만 하겠다는 신념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다재다능한 배우들이 영화를 찍으면서 동시에 드라마도 찍는 게 너무 부러웠어요. 한 작품을 집중해서 끝내고 나야 다른 작품을 할 수 있었고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까지 30여 년간 여러 감독을 돌고 돌면서 역할을 맡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웃음)
하퍼스 바자 첫 드라마 현장은 어떻던가요?
송강호 두 시간 안에 모든 걸 끝내야 된다는 호흡으로 작품에 임하다가 긴 호흡으로 가다 보니 신기했죠. 딱히 힘든 건 없었지만 너무 방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어요.
하퍼스 바자 최근 몇 해 동안 국제적인 행사에 참여하느라 분주하셨죠. 지난 연말부터 올초까지는 LA 아카데미영화박물관에서 송강호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는데, 어떤 소회가 들었는지 궁금해요.
송강호 지난 6년간 많은 일이 있었죠. 개인적인 영광을 떠나 한국 영화나 콘텐츠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게 무척 반가운 일이에요. 하지만 처음 칸에 가던 때와 지금 제 생각이 달라진 건 없어요. 칸 영화제 수상 이후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을 숱하게 받을 때마다 배우로서 제 활동이나 가치관에 어떤 변화도 없다고 답해왔어요. 이건 겸손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제 의지에 가깝고 진심이에요. 긴 배우 인생에 하나의 ‘소중한 점’ 정도로 여기려 해요.
하퍼스 바자 촬영이 없을 때도 늘 현장에 가는 걸로도 유명하죠. 송강호에게 현장은 끼니를 챙기는 것처럼 당연한 일과인가요?
송강호 이번 현장은 영화보다 적게 간 편이에요. 원래 거의 매일 가는데, 호흡이 길어서.(웃음) 제가 현장에 자주 가려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전 다른 걸 못해요. 예를 들어 전 골프를 안 쳐요. 이유는 필드에 가면 정신이 사나워서요. 다들 걸어가면서 이야기하고 생각을 환기를 시키는 게 좋다는데 전 그게 하나도 흥미롭지가 않아요. 작품을 맡으면서는 작품 얘기만 하는 게 제일 흥미롭거든요. 와이프에겐 미안하지만 여행도 싫어해요. 작품을 안 할 땐 그냥 가만히 머리를 비우는 게 편안한 휴식이죠.
하퍼스 바자 배우 송강호는 언제 만족감을 느끼나요? 작품을 끝내고 나서 스스로 추스르는 편인지, 현장의 순간에서 답을 찾는 편인지 궁금해요.
송강호 흥행과 관계없이 작품마다 다르게 와닿는 것 같아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품도 있죠. <복수는 나의 것>을 할 때는 당시에 힘들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제 연기에 대해 돌아볼 틈이 없었는데 한 20여 년쯤 지나 다시 보니 ‘괜찮게 했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삼식이 삼촌> 역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방송이 된 뒤 머지않아 알 수 있겠죠.
하퍼스 바자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삼식이 삼촌처럼, 배우 송강호가 삶에서 이루고 싶은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송강호 살다 보니 아무리 어떤 욕망을 가진다고 해서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고요.(웃음) 요즘은 목표를 위해 노력은 하지만 어떤 결과가 주어졌을 때 그걸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고요. <삼식이 삼촌>에서도 각자 욕망의 결론을 인물들이 얻게 되지만, 결국 받아들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죠. 그게 우리 삶과 맞닿은 부분일 테고요.
하퍼스 바자 지금 배우 송강호는 자유로운 상태인가요?
송강호 자유로워지려고 부단히 애를 쓰긴 하는데, 사람인지라 잘 안 되기도 합니다.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 약간 자유로워지기도 하죠. 어떤 결과가 오든 겸허함과 자유로움이 있다면 삶은 불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재킷, 셔츠, 타이는 모두 Bottega Veneta. 반지는 Chrome Hearts, Tiffany & Co..

변요한
하퍼스 바자 <삼식이 삼촌>과 <그녀가 죽었다>가 같은 날 공개를 앞두고 있어요. 뒤이어 <블랙아웃> <파반느> 같은 작품 소식도 들려오고요.
변요한 저는 늘 하던 대로 해오고 있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작품 공개 시기가 겹쳤어요. 감사한 일이죠. <삼식이 삼촌>을 찍은 지 7~8개월 정도 지났으니 이 멤버들도 오랜만에 보는 거예요. 이렇게 화보 촬영까지 끝냈으니 우린 이제 준비 끝. 보여줄 일만 남았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네요.
하퍼스 바자 공교롭게도 <미스터 션샤인> <자산어보> <한산: 용의 출현>, 공개를 앞둔 <삼식이 삼촌>까지 최근 참여한 작품들에 시대극이 많아요. 그 안에서 시대도, 국적도, 신분도 전혀 다른 역할을 연기했음에도 늘 자연스럽게 녹아든 모습을 보여줬고요.
변요한 처음엔 어느정도 의도한 선택이기도 했어요. 연극을 할 때 셰익스피어와 안톤 체호프의 극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런 작품들을 하고 나면 늘 월등히 성장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매체의 시대극에 놓였을 때도 무색무취가 아닌 내 색을 뿜어낼 수 있을까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했던 것이 <육룡이 나르샤>였죠. 말씀주신 작품들은 저에게 분명한 자양분이 됐어요. 이제는 어떤 환경에서도 제 색이 묻어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삼식이 삼촌>을 만난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그렇게 만난 <삼식이 삼촌>에서는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김산을 연기했어요. 1950년대 말, 전쟁 후 혼란스러운 시대에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이 나라를 변화시켜보겠다는 꿈을 가진 인물이죠. 김산의 뜨거운 기질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면요?
변요한 삼식이 삼촌과 빵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삼식이 삼촌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김산을 앉혀놓고 자기도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손을 내미는 장면인데, 이런 뉘앙스의 대사를 던져요. “국가 재건 계획서 보셨다고 하셨죠? 5년에서 길면 7년. 이거 놓치면 대한민국 기회 없습니다.” 이 인물이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하고 정확한지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나라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간절하면 시간까지 체크하면서 내다보고 있는 걸까. 슈퍼 J구나.
하퍼스 바자 인간 변요한은 어때요? 김산과 닮아 있는 점이 있나요?
변요한 저도 J인데 이 정도로 계획적이진 못한 것 같아요. 비슷한 점이라면 저 역시 한 사람이 세상이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가끔씩 아주 짧은 만남만으로도 분명한 에너지를 주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어요. 그런 사람과 교감한 뒤에는 제 말과 행동이 조금씩 변하는 걸 느끼거든요. 그래서 김산의 믿음에 충분한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김산이 올브라이트 장학생이잖아요. 저도 한예종 입학할 때 장학금 받고 들어갔어요.(웃음)
하퍼스 바자 신연식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김산에게 자신을 투영시켰다고 말했어요. 김산에 대해 두 분은 어떤 이야기를 주로 나눴나요?
변요한 감독님은 그저 현장의 흐름에 집중하는 편이셨어요. 주로 제가 말이 많았죠. 이건 왜 이렇게 된 거냐, 저건 무슨 뜻이냐. 슛 들어가기 전까지도 계속 감독님을 붙잡고 있었더니 나중에 감독님께서 저를 두고 ‘욕망이 이글거리는 배우’라고 말하셨더라고요.(웃음) 사실 저는 온도로 따지면 차갑게 연기하는 걸 좋아하는데 김산을 연기할 땐 뜨겁게 하고 싶었어요. 보는 사람들이 그 온도를 같이 느꼈으면 해서.
하퍼스 바자 한국 사회에서는 ‘삼촌’이라는 호칭이 주는 따뜻함이 있죠. 김산에게 삼식이 삼촌도 그런 존재였을까요?
변요한 16부 마지막 신에서 삼식이 삼촌을 부르는데 마치 아빠를 부르는 느낌이었어요. 기분이 좀 이상한 거죠. 김산은 아빠에 대한 콤플렉스가 굉장히 컸으니까요. 동경, 애정, 결핍. 여러 감정이 뒤엉켜 있어요. 삼식이 삼촌과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을 함께할 때 누구보다 진지했고 사랑으로 임했을 거예요. 아주 많이 아꼈지만 동시에 미워하고 의심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만나고 지지해줬던 관계. 삼식이 삼촌은 김산에게 미우나 고우나 같이 걷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동행하는 사람.

원피스는 We11done. 반지는 Chanel, Dinh Van, Yend. 팔찌는 Takahiromiyashitathe Soloist × Cody Sanderson. 롱 부츠는 Giuseppe Zanotti.

진기주
하퍼스 바자 김산의 연인이자 냉철한 시선을 지닌 기자 주여진 역을 맡았습니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여진의 어떤 점에 이끌렸나요?
진기주 그동안 제가 많았던 캐릭터와 매우 다른 결을 지닌 인물이에요. 처음 받은 시나리오가 여진이 기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시점까지 쓰여 있었거든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짜릿하고 멋있더라고요. 사람 피를 끓게 만드는 그런 매력이 있는 캐릭터라는 점이 좋았어요.
하퍼스 바자 배우 진기주를 각인시킨 드라마인 <오! 삼광빌라!>와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서 밝고 활발한 역을 맡아왔는데, 말수도 적고 차분한 모습이 새롭더군요. 여진이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요?
진기주 여진은 다른 인물들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이상을 품고 있지만 자기 감정을 속으로 삼키는 사람이에요. 겉은 고요한데 속에서는 계속 파도가 쳐요. 대사에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역을 주로 맡아왔는데, 이렇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양가적인 감정이 담긴 인물은 처음이었어요. 그 점이 제겐 무척 큰 도전이었죠.
하퍼스 바자 전작인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1987년으로 회귀하는 이야기였는데 이번에는 더 과거로 돌아갔어요. 연인인 김산에게 존칭을 쓰거나 서로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더군요. 낯선 시대적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 고민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진기주 오히려 둘 사이에 깊은 신뢰가 있기에 서로를 더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기에 고단한 시기였죠. 감독님께 “여진은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는데 왜 그렇지 않냐”는 질문을 한 적도 있어요. 여진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 감독님이 테마곡을 들려주셨는데, 그때 의문이 해소되었어요.
하퍼스 바자 우아한 선율의 ‘세헤라자데’가 흘러나오는 이유가 있었네요. 극 중 기자라는 직업을 맡은 경험은 어땠어요?
진기주 타닥타닥 기사를 타자기로 치는 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여진은 극 중에서 유일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시대를 기록하고 평가하는 인물이죠. 여진의 기사를 통해 현재를 사는 관객들이 역사를 이해하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하퍼스 바자 <삼식이 삼촌>의 보스, 송강호 배우에게선 어떤 영향을 받았어요?
진기주 사실 선배님과 한 장면에서 호흡을 맞추는 점이 없어 무척 아쉬웠는데, 선배님이 항상 현장에 일찍 나오시는 편이라 다른 배우들에게 조언을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더라고요. 저도 속으로만 ‘뭘 더하면 될까요?’ 하고 여쭤보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다가 딱 한 번 용기를 내 여쭤본 적이 있어요. “잘하고 있어. 나 다 보고 있어! 걱정 마!”라고 해주셔서 큰 힘을 얻은 기억이 나요.
하퍼스 바자 여진과 배우 진기주 사이의 공통점을 꼽아본다면?
진기주 은근 비슷한 면이 많아요. 저도 머릿속은 복잡해도 그걸 입 밖으로 잘 말하지 않아요. 고민이 생기면 그 감정이 바닥까지 찍을 때까지, 그 마음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느끼는 편이 닮아 있죠. 혼자 시간을 충분히 보낸 다음에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점도요.
하퍼스 바자 <삼식이 삼촌>은 다양한 인물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죠. 지금 진기주가 꿈꾸는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진기주 인간 진기주는 개인적으로 지금 과도기에 있는 것 같아요. 이 시기를 무사히 잘 넘겨 성숙한 사람으로 변하고 싶고, 그 점을 기대하고 있어요. 20대를 돌아봤을 때 저는 후회되는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을 찾기까지 치열하게 보내왔고 주어진 목표만 생각하고 달려와서요. 그런데 30대가 된 이후에는 점점 아쉬운 순간들이 생기더라고요. 체력도 조금 떨어지고 연기적인 고민도 늘어나고. 요즘은 촬영이 없는 날에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건 무언지, 나 자신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하퍼스 바자 진기주의 20대가 명료한 시간이었다면 지금은 건강한 고민들로 채워진 시간이네요. 마지막으로 <삼식이 삼촌>이 시청자에게 어떤 이야기로 다가갔으면 하나요?
진기주 김산과 주여진, 시대를 대표하는 두 젊은 청춘이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해요. 흔히 교과서로 접한 시대이지만 그 속에는 열정 어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려볼 수 있는 이야기로 남으면 좋겠어요.

코트, 셔츠, 타이는 모두 Fendi. 팬츠는 Etro.

서현우
하퍼스 바자 대기실보다 촬영 공간에 오래 머무르는 것 같던데요. 스튜디오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서현우 단독 컷 찍은 공간 맞은편을 <삼식이 삼촌> 분위기로 꾸며놓으셨더라고요. 그쪽을 보면서 집중했습니다. 기분이 묘하던데요. 촬영 끝난 지가 좀 돼서 인터뷰 전에 되짚어볼 겸 어제 대본을 10부까지 읽고 왔어요. 그 덕에 정한민의 감각은 꽤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외적으로는 군복을 벗고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묘했던 것 같아요. 환생한 느낌.
하퍼스 바자 <삼식이 삼촌>을 글로 먼저 접했을 땐 어떤 것을 포착했나요?
서현우 처음 대본을 읽으면서 사진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게 기억나요. 인과관계를 토대로 다음 신을 예측하게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신들이 사진처럼 쑥쑥 들어오더라고요. 정한민이 등장하고부터는 조금 걱정도 됐어요. 이 인물은 구체적인 전사가 드러나진 않고 그저 의지와 엄청난 에너지만 존재하거든요.
하퍼스 바자 동료 군인들 앞에서 썩어빠진 군대에 대해 열변을 토해야 직성이 풀리는 불 같은 성격을 지녔죠. 절절한 가족애를 보여준 <로기완>의 은철부터 <헤어질 결심>의 신 스틸러 사철성까지. 에너지의 크기라면 뒤지지 않는 여러 인물을 거쳐왔음에도 유독 정한민이 두려웠던 이유는 뭘까요?
서현우 늘 전 작품과는 조금 다른 질감을 보여주려는 마음으로 맡는 역할에 어떤 겹을 만들려고 해요. 인물이 가진 위트, 고독함, 비겁함 같은 면모를 끄집어내서 다면적으로 풀어보는 거죠. 하지만 이번에는 되려 단순화시켜야 했어요. 정한민은 한 마디로 ‘기세’예요. 이런 사람에게 겹을 만들어버리면 이 인물의 진심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어마어마한 깊이를 가진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을까 걱정한 것 같아요. 나는 진지한 톤의 대사를 뱉어놓고도 농담인 척 풀고 싶은 기질을 가진 사람인데. 감정을 차곡차곡 눌러가며 쌓는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일종의 숙제였어요. 그 숙제를 조금은 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하퍼스 바자 “우리 대위님 영혼에 용광로가 계시네. 그 뜨거운 기운을 누가 불어주나.” 정한민을 처음 만난 삼식이 삼촌이 뱉은 말이에요. 어쩌면 정한민을 설명해주는 가장 명료한 문장일 수도 있겠네요.
서현우 맞아요. 그 한마디에 혹했죠 한민이가. 마치 용한 무당을 만난 것처럼. “요즘 뭐 안 좋은 일 있네, 그지?” 여기에 걸린 거예요. 어떻게 보면 순수하죠. 영리한 편은 아니고요. 열정과 의지를 주체하지 못해 주변의 먹잇감이 되기 쉬우니까. 이건 인물에게 공감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제가 연기를 하기 이전에 꽤나 다혈질이었거든요.
하퍼스 바자 이렇게 차분히 답변을 이어가는 모습만 봤을 땐 전혀 그려지지 않는 기질인데요.
서현우 감정을 잘 컨트롤하게 된 건 연극을 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정한민과 서현우가 다른 점이라면, 저는 유머를 좋아한다는 거.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위트를 넣어야 해요.(웃음)
하퍼스 바자 도전이자 숙제 같았던 정한민으로서의 삶을 무사히 통과해낸 뒤 배우 서현우에겐 무엇이 남아 있던가요?
서현우 참 좋은 배우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배우라는 말에는 인품도 당연히 포함되지만, 실력적으로 뛰어난 고수들을 만난 느낌이었어요. 신연식 감독님도 그러셨어요. 무림의 고수들이 뛰노는 걸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고요.
하퍼스 바자 원 없이 마음껏 뛰놀았던 장면 하나만 꼽아본다면요?
서현우 호텔 로비에서 삼식이 삼촌과 김산, 정한민이 아주 긴박하게 대화를 나누는 신이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될 정도의 육성으로 대사를 쉼 없이 주고받아야 하는데 2시간짜리 연극 한 편 한 것처럼 막 어지럽더라고요. 다음 테이크 들어가기 전에 송강호 선배님부터 요한이 보면 다 저쪽에서 몸 풀고 있어요.(웃음) 촬영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듯 또 순식간에 서로에게 집중해서 대사가 오가고. 이 과정이 ‘너어무’ 재밌는 거죠. 이 엄청난 에너지가 그립기도 해요. 중독된 듯이.

재킷, 셔츠는 Valentino. 이어커프는 Trencadism. 반지는 Dinh Van, Trencadism, Golden Goose.

이규형
하퍼스 바자 정치적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성민을 연기했어요. 어딘가 의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묘한 긴장감을 준다는 점에서 <비밀의 숲>의 윤과장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규형 그랬나요? 저에게 두 인물은 전혀 달라요. 강성민은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훨씬 다양한 얼굴이 보이거든요. 초반에는 수틀리면 다 죽여버리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로만 그려진다면 극이 진행될수록 양면성이 극대화되죠. 몸담고 있는 정계에서 국무총리 그 이상의 목표를 내다보며 작은 걸림돌도 용서하지 않는 날 선 모습 뒤에는 사실 두려움에 떨고, 엄청난 열등감을 느끼고, 삼식이 삼촌에게 의지하려 하는 약한 면모가 있거든요. 대본을 읽으면서 강성민을 연기하기 참 재밌겠다고 생각한 지점이기도 해요.
하퍼스 바자 그래서인지 <삼식이 삼촌>의 여느 인물보다도 가장 입체적으로 느껴졌어요. 이토록 다면적인 얼굴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 데 참고한 작품도 있었나요?
이규형 강성민은 어린 시절 자신의 가족을 짓밟은 가문에게 치욕을 당하며 자랐어요. 이 인물의 가장 큰 약점이자 동력이죠. 그러니까 타고나기를 이렇게 양면적인 인간은 아니었던 거예요. 모종의 사건들로 인해 변화하다 급기야 뒤틀려버린 건데. 이렇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어 참고한 작품이 여럿 있었어요. 지금 기억나는 건 영화 <대부>에서 알 파치노의 연기예요. 성당에서의 마지막 장면. 그 분위기를 자주 떠올렸어요.
하퍼스 바자 인물이 가진 레이어가 다양한 만큼 감정을 표현하기 까다로운 장면도 많았으리라 짐작해요.
이규형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도 현장에서 원하는 만큼 만족스럽지 못하게 나오는 경우도 있었죠. 집안의 원수인 안요섭을 붙잡고 열변을 토하는 신이 있었는데,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는데도 왜인지 2% 부족하게 느껴졌어요. 안요섭을 연기하신 주진모 선배님도 같은 아쉬움을 느끼셨는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더 거칠어도 되고 실수해도 되니까 과감하게 해보자고요. 결국 그렇게 만든 신에서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왔어요. 각자 준비해온 재료를 갖고 이리저리 요리해보듯 액션을 맞춰보는 과정이 참 어려웠지만, 돌이켜보면 아주 즐거웠던 것 같아요. 짜릿했고요.
하퍼스 바자 삼식이 삼촌과 강성민의 관계도 흥미로워요. 가족과 다름없을 정도로 내밀한 관계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치부이기도 하죠.
이규형 이 둘의 관계의 특이점은 ‘키운 정’이 있다는 거예요. 이거 무시 못하거든요. 삼식이 삼촌은 강성민이 태어났을 때부터 봐온, 그야말로 삼촌 같은 존재예요. 각자의 욕망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견제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지만 단번에 등 돌릴 수 있는 사이는 아니죠. 실질적 이해관계도, 감정적인 유대도 얽히고설켜 있는 아주 복잡한 관계 같아요. 강성민이 선을 넘는 수준이 삼식이 삼촌이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김산과 삼촌이 손을 잡기 시작하면서 이 드라마의 심리전은 더 치열해져요.
하퍼스 바자 1960년대 혼란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준비한 부분도 있었나요?
이규형 오히려 그보다 조금 앞선 일제강점기는 무대 공연을 통해서도 여러 번 경험해봤지만, 이 시기는 꽤나 새로웠어요. 시대가 주는 무게감도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연기 톤도 훨씬 차분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니 강성민은 웃는 장면도 없네요. 의상도 전부 스리피스에 칼각이 잡혀 있는 수트 위주죠. 각이 잡힌, 꼿꼿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퍼스 바자 모든 촬영이 끝나고 작품 공개만을 앞두고 있는 지금, <삼식이 삼촌>이 어떤 이야기를 파생시키길 기대하나요?
이규형 <삼식이 삼촌>은 구성이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색이 아주 뚜렷해요. 각자가 가슴에 뜨거운 용광로 하나쯤은 품고 사는 인물들이니까요. 배우들이 연기하며 느꼈을 뜨거움이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되었으면 해요.

(왼쪽부터) 변요한이 착용한 재킷은 Egonlab by Adekuver. 셔츠, 팬츠는 Dries Van Noten. 반지는 Tiffany & Co.. 슬리브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송강호가 착용한 재킷, 셔츠, 팬츠, 슈즈는 모두 Bottega Veneta. 진기주가 착용한 원피스는 Isabel Marant. 귀고리는 Chaumet. 반지는 Trencadism. 롱 부츠는 Giuseppe Zanotti.

(왼쪽부터) 서현우가 착용한 재킷은 Bally. 슬리브리스는 We11done. 바지는 스타일리슽 소장품. 이규형이 착용한 재킷, 슬리브리스, 목걸이는 모두 Versace.

(왼쪽부터) 변요한이 착용한 재킷, 셔츠, 타이, 팬츠는 모두 Ralph Lauren Purple Label. 반지는 Dinh Van, Didier Dubot. 안경은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진기주가 착용한 재킷,셔츠는 Dries Van Noten. 귀고리는 Bottega Veneta. 서현우가 착용한 셔츠, 타이, 팬츠는 모두 Giorgio Armani. 반지는 Dinh Van. 이규형이 착용한 슈즈는 Christian Louboutin. 팬츠는 Haversack.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왼쪽부터) 변요한이 착용한 재킷, 셔츠, 타이, 팬츠는 모두 Ralph Lauren Purple Label. 반지는 Dinh Van, Didier Dubot. 안경은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진기주가 착용한 재킷,셔츠는 Dries Van Noten. 귀고리는 Bottega Veneta. 반지는 Trencadism, Yend. 서현우가 착용한 셔츠, 타이는 Giorgio Armani. 반지는 Golden Goose. 이규형이 착용한 니트는 Ferragamo. 팬츠는 Haversack.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코트, 재킷, 팬츠는 모두 Ami. 목걸이는 Versace, Chrome Hearts. 반지는 Golden Goose ,Yend. 슈즈는 Ferragamo. 슬리브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Credit

  • 인터뷰/ 안서경 고영진
  • 사진/ 고원태
  • 헤어/ 권지희(송강호),미소(변요한),재황(이규형),강현진(진기주),오은(서현우)
  • 메이크업/ 한다슬(송강호),박지미(변요한),임소영(이규형),강인주(진기주),하영주(서현우)
  • 스타일리스트/ 이명선
  • 프롭 스타일리스트/ 유여정
  • 어시스턴트/ 허지수,조혜원
  • 디자인/ 이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