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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술관 경비원과의 동행

화제의 베스트셀러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고 느낀 것들.

프로필 by 손안나 2024.04.25
몇 년 전, 루브르 박물관이 유리 피라미드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장-미셸 오토니엘의 회화를 선보인 적 있다. 현대미술을 잘 다루지 않는 루브르의 이례적인 행보였다. 이 역사적 행사에서 오토니엘은 대학 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이곳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다는 사연을 들려주며 살짝 눈물을 훔쳤다. 박수가 쏟아졌다. 루브르의 경비원으로 일하던 그가 루브르로 금의환향했다는 사실보다 그의 작품을 더 빛나게 만들 서사는 없을 것 같았다. 올해 초 장안의 화제가 된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받아 들었을 때, 고백조의 제목에 무장해제된 것도 아마 이와 같은 원리가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책 제목이 원제 <All the Beauty in the World>를 살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었다면, 미안하지만 그냥 지나쳤을 공산이 크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큐레이터입니다>였다 해도 재독의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을까 싶다. 말하자면 지금 나는 문제의 ‘미술관 경비원’이 예상치 못한 촉매 작용을 일으키며 나로 하여금 기꺼이 감동할 수 있도록 종용했음을 시인하고 있는 셈이다.
알려진 대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전도유망했던 젊은 뉴요커가 형의 죽음을 계기로 ‘경이로운 세계’에 숨어들어 보낸 10년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패트릭 브링리(Patrick Bringley)가 경비원으로 취직한 첫 날의 상황으로 시작해 퇴사하는 날의 풍경으로 끝맺는 이 책은 형을 잃은 지독한 상실감을 극복해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우리의 10년이 그렇듯, 그의 10년도 덩어리째 굴러간다. 매일 미술관에 출근하고, 작품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퇴근하고 다시 출근하기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겪게 된다. 처음 그는 이 거대하고도 역동적인 미술관에서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뜨고, 망을 보는 새로운 직업에 적응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그리고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한 평화 안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매진하는 데 익숙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관람객의 존재, 함께 일하는 동료의 존재에 대해 사유한다. 그러다 드디어 다시 세상에 나아가기로 결정한 자의 이야기에, 심경의 변화 자체보다 더한 우여곡절이 있을 리 만무하다.
메트로폴리탄 곳곳의 걸작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갈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책에 언급된 소장품을 일일이 찾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불평했지만, 나는 오히려 휴대폰 사진첩을 뒤져보느라 시간을 더 쓴 것 같다. 내게는 애초에 미술관의 걸작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경비원이 더 매혹적이었다는 증거다. 가족들 사진 사이사이, 해외 미술관에서 포착한 경비원 사진이 놀랍게도 제법 많았다. 나는 출장길 낯선 골목에서 남의 집 문을 자주 찍는데, 그 뒤로 펼쳐질 세계, 즉 실제적 풍경(인테리어 같은)이나 상징적 풍경(가족의 사연 같은)을 취재하고 싶다는 막연한 욕심 탓이다. 말하자면 내게 미술관의 경비원은 이국에서 만나는 굳게 닫힌 문 같은 존재다. 소리 없이 서 있다가 내가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라치면 어느새 곁으로 와 저지하던 부지런한 경비원도 있었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포즈를 취하던 경비원도 있었으며,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 캡션만 열심히 읽던 학구적인 경비원도 있었다. 각기 다른 곳에서 만난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무색무취의 존재들이라는 것. 은쟁반 뒤에 모습을 숨기는 영국 집사처럼, 이들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볼 필요가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대상들이다.

예술가를 충실히 보좌하느라 녹초가 된 날에도, 나는 잠들기 전 명상하듯 책을 펼쳐보며 “거북이처럼 흐르는 파수꾼의 시간”을 함께했다. 고독과 고립, 단순함과 비움의 태도로 예술작품을 보고, 이로써 스스로를 지킨 그의 시간은 내게 어떤 성공담보다도 강렬한 대리만족의 쾌감과 묘한 위로를 선사했다.

‘미술관의 경비원’이라는 설정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흥미로운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본래 미술관은 보이는 작품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이 둘의 간극에서 관람객은 길을 잃기도, 길을 찾기도 한다. 형을 잃은 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그는 무인도나 산속이 아니라 인류의 흔적을 촘촘히 담은 작품으로 가득한 미술관, 그리고 이를 보려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기를 택한다. 모두가 작품 앞에서 이면의 보이지 않는 진리를 읽어내고자 애쓰는 그 순간을, 기꺼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바라본 것이다. “작품을 지켜보는 일을 하는 나는 이 작품을 본래의 의도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던 그는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우리와 다름없이 오류투성이인 다른 인간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봄으로써 영원히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자기 마음의 윤곽을 점차 찾아나간다. 모네에 대한 이야기든, 은키시 주술상에 대한 이야기든, <론다니니 피에타>에 대한 이야기든, 예술에 대한 그의 감상은 그에 머물지 않고 삶의 희열과 고통, 죽음의 불가사의함, 일상의 위대함, 관계의 소중함 등으로 귀결된다. 이는 걸작을 향한 무조건적인 찬사 혹은 세상의 질서와 속도에 스스로를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나른한 조언과는 차원이 다른 실천이자 온전한 삶이다.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존재인 경비원이 입을 열어 들려주는 예술에 관한 말들은 동료와의 대화에서 길어 올린 것만큼이나 설득력 있다. 미술관의 다층적인 시공간을 완전히 삶에서 익힌 자의 친절함과 담담함 덕분인가 싶다.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 같은 문장은 위로가 되었고,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을 배우려고 한다”는 문장은 확신을 더해주었다. 그는 너무 광범위해서, 혹은 너무 전형적이어서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숱한 유물과 근대 이전의 예술에 대한 담론을 고유한 통찰력으로 해석한다. 관객과 작가, 큐레이터와 경비원 그 중간 어디쯤 여유롭게 위치하는 자만이 건넬 수 있는 이야기들. 매일매일 일상에서 예술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쌓인 사유들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소박하지만 그만큼 굳건한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고, 그래서 자못 감동적이다.
만약 내가 여전히 에디터였거나 관객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미술관 경비원의 이야기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호응할 수 있었을까 싶다. 무대 뒤편의 이야기는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하기 마련이지만, 갤러리에서 일하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무대를 만드는 이들을 존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국제갤러리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원 수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고, 갤러리의 사무실 공간이 곳곳에 숨겨져 있음에 놀라고, 그 많은 이들이 모두 그 공간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작품이 드디어 세상에 드러낼 때까지, 미술가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 즉 우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시장은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만 보여주기에, 보여지는 전시와 작품 이면에 보이지 않는 노고와 흔적이 숨어 있을 거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작가가 자기 생각을 구현하도록 보좌하고 작업을 안팎으로 보살피는 일, 그 과정에서 미술가를 존중하는 마음을 스스로 잃지 않고 작가를 독려하는 일, 작품을 전시장으로 옮기고 배치하고 소중히 다루는 일, 작품과 전시, 미술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일 등 일련의 노력들이 다시 유무형의 숱한 노동으로 세분화된다는 것도 어쩌면 작가를 향해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관심 밖의 일일지 모른다.
갤러리에서 일하고 나서야 나는 미술을 애호한다는 것과 미술 일을 한다는 것의 차이는 다름 아닌 나의 시간과 노동으로 그 마음을 책임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지금도 순수한 마음으로 예술가를 동경하는 것에 머물고 싶다는 일종의 회의와, 그럼에도 예술가와 함께 걷는 이 상태를 긍정하는 각성의 순간을 수시로 오가곤 한다. 스스로 답이 필요할 때마다 나는 관객의 무리에 섞여 전시장에 우두커니 서 있곤 한다. 당장 사표를 내던지는 대신,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길 선택한 이 남자처럼 가장 치열한 곳에서 가장 가려진 일을 하는 사람임을 스스로 상기할 수 있는 방법이다. 관객들을 바라보고, 작품을 응시하다 떠돌던 시선은 결국 나를 향하게 된다. 예술이든 예술가든 그 자체로 이 많은 이들의 헌신을 받을 만한 대상임을 인정하는 건 나의 일을 계속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자 가장 어려운 일임을 직면한다. 그렇게, 예술가를 존중하는 나의 마음과 내가 온전히 작가와 작품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다.
이 책을 한참 열심히 읽던 2024년의 연초는 공교롭게도 앞으로 1년 동안 국내외 미술계에서 벌어질 각종 거대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대처하느라 정말이지 여념이 없던 시기였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 쏟아지던 세계의 관심이 드디어 미술 분야로 옮겨오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모여 하는 일이다 보니 아무래도 마음을 추스를 곤혹스러운 일들도 생겨났다. 작가가 미워지기도 했고, 대체 미술이 뭔가 싶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만난 경비원들, 스스로를 허수아비 혹은 보안예술가라 유쾌하게 자조하는 이들이 예술의 이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존재처럼 다가온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시끄러운 미술계의 온갖 관계와 정치, 소문과 팩트를 관망하는 그들의 입장이 내심 부러웠을 수도 있겠다. 나도 그렇게 예술과 가장 가까운 동시에 가장 절묘한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보리라 다짐도 했다. 저자 역시 세상과 거리를 두고자 미술관으로 숨어들었지만, 매일 예술의 곁을 지키면서 다시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세상은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 만드는 것이고, 가까이 있어야 절묘한 거리도 찾을 수 있다.
예술가를 충실히 보좌하느라 녹초가 된 날에도, 나는 잠들기 전 명상하듯 책을 펼쳐보며 “거북이처럼 흐르는 파수꾼의 시간”을 함께했다. 고독과 고립, 단순함과 비움의 태도로 예술작품을 보고, 이로써 스스로를 지킨 그의 시간은 내게 어떤 성공담보다도 강렬한 대리만족의 쾌감과 묘한 위로를 선사했다. 무엇보다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시간이 한가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구식의, 어쩌면 귀족적이기까지 한” 시간을 따라가면서, 내가 그런 시간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이 책의 배경이 요컨대 담론과 시장의 지배 하에 있는 현대미술의 ‘명예의 전당’ 격인 모마가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삶을 찬양하는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곳 작품들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보편적인 진리, 영원히 가치 있게 다뤄질 인류사를 통해 시간이 순환한다는 걸 증명하고, 나 자신을 유구한 시간성에 속한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아름다움을 모아둔 저장고 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작고 하찮은 먼지 조각이 된 것 같은 느낌”은 곧 내가, 나의 일이, 그리고 지금도 나를 번민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예술적 사건’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누구든 직업인으로 살다 보면,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캐묻곤 한다. 일에 치일수록 자기 인생의 본질을 직면하고 싶다는 욕망은 강해지고,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할지 답도 없는 고민을 하게 된다. 예술가나 사상가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요컨대 데이비드 소로는 “깨끗하게 길을 내고 인생을 궁지에 몰아넣고 최소한의 조건만 남기”기 위해 숲속에 들어가 살았다. 마르셀 뒤샹은 돌연 미술을 그만두고 체스를 두었고, 독일의 여성 작가 샤를로트 포세넨스케는 활동가로 살기 위해 미술가이길 포기했으며, 뉴욕 기반의 대만 미술가 테칭 시에는 그만두는 이유마저 말하지 않았다. 이들이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는 그만두는 것, 거절, 거부, 저항, 하지 않는 것의 잠재성을 개념적으로 드러냈고, 이는 엄청난 급진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급진적이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는 종종 “당신의 판타지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예술가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하곤 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작업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사실 가장 인상 깊은 대답은 따로 있었다. 내일 벌어질 세상의 멸망을 오늘 작업실에서 일하며 맞이할 것 같은 아무개 미술가의 답, “사라진다는 것.” 얼마나 멋지던지, 한동안 나도 “이 일을 그만두고 홀연히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이 나의 판타지”라며 잘난 척을 하고 다녔다. 사라진다 해도 딱히 회자될 만큼의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나마 나의 삶을 구동하는 작은 능력과 재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온전히 다른 일을 찾아내는 것이 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순간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짜릿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이 진정한 판타지인 이유는 진정으로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쓸모를 거부하고, 지금껏 배우고 익힌 바를 포기하는 비효율적 방식을 선택하는 데는 어마한 용기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게다가 사라진 후에도 삶은 계속될 테니, 나는 같은 고민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브랑리는 달랐다. 사라졌지만 덕분에 사라지지 않았고, 그럼에도 사라져버렸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변화시킨 그는 10년 후 본래의 자리가 아니라 다시 전혀 다른 삶으로 진격했다. 뉴욕 도보 가이드라니, 이건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미술관 경비원이 꼭꼭 눌러쓴 이 책은 내게 판타지로 가득한 소설이나 다름없다. 소설에 버금가는 멋진 자아성찰기를 경험과 가능성에 근거한 논픽션으로 완성하는 건 저자 브링리가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몫이라는 얘기다.

윤혜정은 국제갤러리 이사로 활동 중이며, 예술에 관한 다양한 결의 글과 인터뷰를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Credit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인생, 예술> 저자)
  • 사진/ Getty Images
  • 디자인/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