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현실은 광고가 된다

도파민을 불러일으키는 패션 판타지에도 디톡스는 필요한 법. 지극히 현실적인 광고 캠페인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프로필 by 이진선 2024.01.30
흡사 파파라치 컷을 연상케 하는 구찌 발리제리아 광고 캠페인.

흡사 파파라치 컷을 연상케 하는 구찌 발리제리아 광고 캠페인.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2021년 봄. 코페르니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및 혼합현실(MR)을 망라한 이른바 ‘확장현실’을 일컫는 XR 기술을 도입해 비디오 형식의 신선한 광고를 완성했다. 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아찔한 높이의 구조물 위에서 춤을 추고 키스를 나누는 모델들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초’현실적이었다. 더 나아가 2023년엔 이러한 초현실주의와 스턴트 마케팅(Stunt Marketing, 브랜드가 입소문을 내기 위해 콘텐츠를 공유하는 전술)을 조합한 캠페인이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다. 파리 도심을 달리는 자크뮈스의 거대한 가방과 프라다의 가을 광고 캠페인에 등장한 사람 크기만 한 꽃, 쿠사마 야요이의 형상을 한 루이 비통의 거대한 풍선 조각품을 떠올려보라. 충격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이 결과물들이 현실도피를 추구하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도파민을 불러일으키는 패션 판타지에도 디톡스는 필요한 법. 이제는 가상현실 혹은 초현실에서 벗어나 진짜 현실을 마주해야 할 때다. 그리고 이를 방증하듯 새 시즌의 패션 하우스들은 지극히 현실적인(모델이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광고 캠페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화제가 된 건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 켄들 제너와 에이셉 라키가 함께한 보테가 베네타의 2024 프리 스프링 컬렉션 캠페인 ‘Readymade’. 사진 속에는 꽃과 장바구니를 든 채 마켓을 나서거나 개를 산책시키는 켄들 제너, 커피를 들고 길을 걷거나 조깅을 하는 에이셉 라키의 일상이 담겨 있다. 게다가 몇몇 컷은 브랜드 로고가 없다면 실제 파파라치 컷으로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다.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관음주의와 파파라치 사진에 대한 관심을 현명하게 활용한 셈. 에이셉 라키는 이 사진들을 공개하며 SNS를 통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제 일상적인 모습을 촬영한 솔직한 사진들을 연결하고 활용하는 건 천재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페인이라기보다는 보테가 베네타의 마티유 블라지, 저 자신, 그리고 재능 있는 타블로이드 스타일의 사진가가 완성한 창의적인 삼중주라는 느낌을 주죠.”
이보다 앞선 작년 9월, 구찌에서는 소문과 목격담이 끊이질 않았던 커플인 켄들 제너와 배드 버니가 등장한 ‘구찌 발리제리아’ 컬렉션의 광고 캠페인을 선보이기도 했다.(현재 두 사람은 결별한 상태다.) 포토그래퍼 안토니오 세클라위가 공항을 배경으로 촬영했으며 그중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빠져나오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은 완벽하게 연출된 파파라치 컷처럼 보인다.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과 맺는 관계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번 캠페인은 하우스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사바토 데 사르노의 비전이 담긴 것이기도 하다.
파파라치 콘셉트가 아닌, 셀러브리티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연결한 현실적인 광고 캠페인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이번 홀리데이 시즌에 자크뮈스가 선보인 ‘자크뮈스 갈란드’ 캠페인으로 1편엔 켄들 제너가, 2편엔 블랙핑크의 제니가 등장한다. 특히 침실과 거실을 배경으로 귀여운 강아지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 제니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럽다. 대중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이유 중 하나도 그녀와 그녀가 키우는 반려견, 쿠마와의 교감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 한편 프로엔자 스쿨러와 로에베의 2024 봄 컬렉션의 광고 캠페인은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두 여배우의 모습을 담아내며 주목을 받았다. 먼저 프로엔자 스쿨러는 과감하게 민낯을 드러낸 파멜라 앤더슨의 포트레이트로 캠페인을 진행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섹스 심벌이자 패션 아이콘이었던 그녀의 나이는 올해로 56세. 최근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였던 짙은 화장을 버리고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주름과 잡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맨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서서 오롯이 자신과 옷을 위해 포즈를 취한 파멜라 앤더슨의 사진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강렬하다. 로에베의 프리 스프링 컬렉션 광고에는 우리에게 <해리포터> 시리즈로 친숙한 88세의 배우 매기 스미스가 등장한다. 피사체의 현실감 있는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내는 사진가 유르겐 텔러의 사진 속에서 매기는 붉은 벽돌 담, 소파를 배경으로 가만히 카메라를 응시할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바로 이곳이라는 듯이. 불확실한 경제상황과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트렌드로 인해 패션 하우스 역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마케팅에 눈길을 돌리는 추세다.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다른 장소, 다른 공간, 다른 세계에 대해 너무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사바토 데 사르노와 함께 구찌의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아트 디렉터 리카르도 차놀라(Riccardo Zanola)의 말이 너무도 공감되는 지금, 현실과 맞닿아 있는 광고 캠페인이 대중의 마음을, 그리고 지갑을 열게 하고 있다.

Credit

  • 사진/ ⓒ Bottega Veneta, Gucci, Jacquemus, Loewe, Proenza Schouler, Getty Images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